10/04/2011

위대한 화가 빈센트 고흐 이야기

네덜란드 출신인 어떤 사람이 런던에서 그림을 파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전도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생애를 드리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헌신하였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전도도 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사역했던 교회에서는 그의 서투른 설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비판을 가했다.
비판적인 영성으로 충만했던 이 교회는 이 젊은이를 세워주지 못했다.
그는 결국 거기서 좌절하고 다른 사람의 권유에 따라 다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거의 신앙을 잃어버릴 뻔한 위기였지만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 사람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Gogh, Vincent van)이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가 그에 대해 이런 흥미로운 기록을 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열정과 창의력을 보면 그가 만약 전도자로 헌신했더라도 세계에서 위대한 설교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인류는 위대한 화가를 얻었지만 위대한 설교가는 잃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톨스토이는 이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모든 비난을 해결하고 얽힌 것을 풀어 헤치며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고 암담한 것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친절이다' 라고 말했다.
이런 친절은 소극적인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든면에서 적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성공하고 싶다면 친절의 분량을 계속해서 늘러나가야 한다.

친절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 바로 미소 이다. 친절하면서 웃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에게 미소를 가르쳐라 니체의 말이다. 미소가 흐르는 얼굴은 자신있게 보이며 미소가 흐르는 표정은 용기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인도의 간디는 비록 몸은 왜소 했을지라도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흘렀기 때문에 인도의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도 우리 민족에게 미소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그는 화내지 않고 웃으면서 사는 민족이 강한 나라를 만든다며 미소를 거듭 강조 했다.
요즘은 기업체나 연수원,공무원들에게 친절교육을 많이 시킨다. 그때마다 빠뜨릴 수 없는 얘기가 웃음과 미소다

21세기는 나를 상품화하는 시대다. 나의 미소는 나를 명품으로 만드는데 꼭 필요한 필수 요소이다. 우리는 맨 처음 상대를 대할 때 가장 먼저 상대방의 얼굴 표정을 본다. 우리의 첫 인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하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며 부드러운 말씨를 선택해서 쓴다면 우리는 미소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미소의 크기는 행복의 크기와도 비례한다.[청골산봉서방]

머리에서 가슴으로 까지

가정보다 자신의 여가보다 일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진급을 거듭한 끝에 최고라고 할수있는 이사의 자리에 오른 그 사람이 어느 날 암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쌓아 놓았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무너지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던 그 사람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는 시간의 어느날 집에서 누워지내다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아침햇살에창문을 열어보고는 이런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동안 ...아침에 만나는 이 찬란한 햇살을 보고 단순하게 '아 좋구나!'하고 감탄하지 못했던가 우유배달 아주머니의 이마에 맺힌 저 땀방울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머금은 저 미소의 소중함을 나는 왜 이제야 깨닫게 되었는가"라고

행복은 크고 거창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고 가까운곳내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 행복은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건네는 따스한 한 마디  ...말속에 길가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이의 미소에 이른 아침 커튼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한줌에서  나는 행복의 소리를 듣습니다.

더없이 푸르기만한 봄에서...사랑하는 사람과 마주잡은 두 손에서나는 행복의 속삭임을 듣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 곁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 이사실을가슴으로 내리기까지는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요.-좋은글 중에서-

몸부림 치지 말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1]

이 성경 구절을 읽다보면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큰 날개로 열심히 날갯짓해서 창공을 비상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주먹을 뿔끈 쥐며, "나도 독수리처럼 최선을 다해 날갯짓해서 저 멀리 하늘로 날아오르겠다"라고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비장한 모습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독수리처럼 잘 날 수 있도록 저에게도 강한 날개를 주시옵소서."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독수리는 자기 날개를 휘저으며 비상하는 새가 아니다. 사실 독수리는 나는 것에 약한 조류로, 날기에 굉장히 열악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다. 활짝 펴면 2미터에 이르는 육중한 날개를 지녔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하늘을 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독수리는 자기 날갯짓 대신에 공기의 흐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한다.

태양열이 땅에 비취면 공기가 따뜻해지고 그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을 갖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상승 온난 기류'를 찾아 들어가 날개를 펼친 상태로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영어 성경 NIV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사40:31) 에서 '올라감
이라는 단어를 "soar on"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는 마치 상승 기류를 타기 위해 접근하는 글라이더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메시지 성경은 "날개를 펴 날아오르다"라고 번역해 이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독수리가 가지 날개를 이용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글성경의 표현처럼 "날개치며" 자기 몸부림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상승 온난 기류'를 만날 때 자기 날개를 펴서 그 기류를 타고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다.

그렇다. 독수리가 자기 날개를 이용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글성경의 표현처럼 "날개 치며" 자기 몸부림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상승 온난 기류'를 만날 때 가지 날개를 펴서 그 기류를 타고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몸부림으로 날아보려고 바둥거리며 산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참새의 모습과 같다.
겉으로 보기에 참새는 독수리와는 달리 날기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벼운 몸통과 날갯짓하기에 적당한 아담한 날개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참새는 날기에 좋은 그 신체 조건을 이용해 날갯짓하며 하늘을 가벽게 날아다닌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결과적으로 참새가 높이 나는가? 독수리가 높이 나는가?
게다가 참새처럼 자기 날갯짓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금방 지칠 수밖에 없다.
이사야서 40:30절에 나오는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설명한다.

원어로 보면 여기 나오는 '소년'이라는 표현은 "인생의 전성기에 속하는 젊은 남자"를 뜻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힘이 펄펄 넘치는,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소년'이라도 결국은 피곤하며 곤비하며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 이루어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신앙생활은 결국 지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 참새처럼 날개짓하는 내 노력을 내려놓고 독수리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상승 온난 기류'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승 기류를 만날 때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서 그 상승 기류에 내 몸을 맡겨야 한다.

<보호하심중에서...이천수>

안디옥 교회는 상회에 순종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 : 22 ~ 35]

사도행전 15 : 22 ~ 35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기뻐한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함께 협력하고 있는 두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교회들은 어떤 모습으로 서로 협력하였습니까

안디옥 교회는 상회에 순종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5 : 22 ~ 35]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루살렘 교회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구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여 자기들의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에 정중하게 문의하였고, 답이 전해 질 때까지 인내로 기다렸으며, 상회의 결정이 주어졌을 때 기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감당했던 안디옥 교회가 자칫 잘못하면 교리적인 문제로 인해 선교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의 지경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적극적인 문제해결의 자세로 인해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선교사역은 거침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의 죄 된 본성은 어떤 문제를 핑계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핑계 댈 것이 생기면 그것을 핑계로 게으름을 피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문제를 핑계거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극복하고서 해야 할 일을 완수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사단은 문제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문제를 만났을 때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는 것은 신앙과 인격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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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5 : 22 ~ 35)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접하고 귀찮아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진지한 자세로 토론회를 열고 매우 현명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결정사항도 매우 지혜로운 방법으로 전달했습니다. 교회의 결정이 당사자들에게는 기쁨을, 하나님의 선교사역에는 진보를 가져 다 주었습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수호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얻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진리를 수호하려다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사람을 얻으려다 진리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양자를 다 얻을 수 있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리더입니다. 문제를 해결 해 줄 때 리더십이 생깁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줄 때 사람들이 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교회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안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셔서 사람들의 문제, 시대의 문제를 해결 해 주셨습니다. 안디옥, 예루살렘 두 교회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동역하였습니다.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갔습니다. 문제해결을 통해 서로 하나 됨을 경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