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2012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17:17)

야곱은 역전승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30년을 방황하면서 험난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의 인생 마지막 17년은 행복으로 인도된 삶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름답게 변화되고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픔을 승화시켜 성숙된 인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인생을 멋지게 혹은 아름답게 마칠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야곱은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매력적인 삶을 살았던 야곱을 인도한 분은 하나님이셨기에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자기중심적 믿음을 가졌었고 철저히 자기 확신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야곱은 이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 변화의 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쌓아오고 만들어가고 속여가며 누렸던 것이 진짜 복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환도뼈를 치실 때에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진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내 믿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축복하는 사람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야곱은 혼자 복 받기 위해 뛰어다니던 자였습니다. 물론 그는 그 사실을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던 그가 창세기 49장에서 축복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축복이 나오게 됩니다. 그는 자녀들을 축복하고, 바로를 축복하고, 만나는 자들을 축복하는 자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바로왕 앞에 섰을 때 예전이었다면 자녀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을 그가 이제는 왕까지 축복하는 자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인정하고 축복하는 것에 약합니다.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는 이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은 형이 망하고, 삼촌이 망하고, 다 망해도 자신이 부유해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지만 말년에는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축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배하는 사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믿음이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며 예배도 배웠는데 예배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배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배자는 나의 존재가치를 내려놓는 자입니다. 진짜 믿음이 좋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요 4:24).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야곱을 인생역전으로 인도하시고 풍성함으로 채우신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는 시간 가운데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인도하시길 소망합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음 갖기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2)



이스라엘 사회에 이러한 민화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아이를 업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짓궂은 친구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 이 말에 아버지는 “내 아들일세”라고 바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이번에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이 분이 네 아버지가 맞는가?” 그러자 이 아이가 “우리 아버지가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내려놓고 “내가 이제껏 너를 업고 왔고, 너를 키워왔는데 왜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 아니고도 업고, 키우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꼭 나를 업고 키웠다고 아버지라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 민화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입히시고 먹이시고 광야 40년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이방신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민화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당신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80%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믿지 못하고, 자녀를 믿지 못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불행으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건강한 사회는 신용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다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믿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이렇게 중요한데 왜 불신이 생기는 것입니까? 


첫 번째는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꾸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고, 주님과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의지적으로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꾸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랑은 믿음의 또 다른 언어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믿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계속해서 속아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속아줍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믿기 때문에 속아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너무 나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성경이 그렇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너무 많습니다.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고, 믿음이 생명이고, 믿음이 구원입니다. 이 믿음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에,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돼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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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가

“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여호와를 칭송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를 올려 여호와를 찬양하였으며” (대하30:2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물음은 여기에 열거되고 있는 죄의 목록이 단지 대표적인 실례이며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때 훨씬 더 날카로운 문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요구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에서 배제되는 여러 다른 부도덕에 대해서도 열거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는 음행, 우상숭배와 술 취함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더러운 것, 호색,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방탕함 등이다.

일단 우리가 바울이 열거한 내용을 전부 읽으면, 우리 가운데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읽은 후에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들조차도 죄로 얼룩져 있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눅 18:26)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고린도 인들은 스스로를 기만하여 하나님의 도적적인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자격을 거부하는 것이다.

바울은 실제적인 도덕성을 무시하여 당당하며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행위까지 부추겼던 종교관에도 관심을 두었다. 그는 고린도 교인 사이에 나타난 이러한 불의의 증거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와 양립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악을 비난하게 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왜 그런가? 
정의에 의하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악의 세력의 패배로 절대적인 의가 깃든 나라이기 때문이다(고전15:21~28).

바울은 이런 비난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불의한 옛 삶 속에 하나님의 변화의 기운이 개입하실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인간 삶의 찢기고 죄로 얼룩진 잔해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덧입혀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고 있다.

죄의 침범을 거부하는 하나님 백성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파괴적인 생활 방식에서 구원받은 죄인, 즉 기적의 산물이었다. “씻음”받은 모습은 그들의 세례를 생각나게 했으며, 동시에 이 의식이 상징하는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진 내적인 정화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었음에 틀림없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 “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더 나아가 그들은 ‘거룩함’을 얻었다. 이 같은 은혜의 선언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누구인가? 
서두에서 바울이 열거한 죄로 상처를 입었으나, 그들의 상처 난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받고 깨끗해져, 도래하는 주의 나라를 바라보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면서 끊임없이 파고드는 죄의 침범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며 산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큐티와 일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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