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2010

제16강 소중히 여겨진 마음 :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준비되다 (아 4:1-8)

I. 2:8-3:11 개관
A. 예수님은 신부가 그분을 더 많이 경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신부를 안전지대로부터 불러내어서 산꼭대기를 향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녀는 순종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그녀 없이 산으로 돌아 가라고 합니다.

8그가 산에서 달리고 ... 10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 일어나서 함께 가자 ... 17내 사랑하는 자야 돌아와서(turn:돌아가서) ... 사슴과 같을지라 ( 2:8-10, 17)

B. 하나님께서 그분의 명백한 임재를 거두심으로써 그녀는 그분의 사랑의 징계를 경험합니다. 그녀는 그분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화나신 것이 아니라 질투하기까지 더욱 깊은 동역의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2:6).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 3:1)

C. 3:6-11에서 신부가 산들을 직면할 때, 그녀를 100번의 순종으로 걸어갈 수 있게 만드는, 신랑이신 왕으로서의 주님의 안전한 지도력에 대한 계시를 얻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그녀의 사랑을 갈망하는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왕으로서 사랑으로 왕관을 씌워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의 “결혼 왕관”은 그분을 기쁘게 합니다. 그분은 그 왕관을 최고의 것으로 원하십니다.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 3:11)

II. 4:1-8의 개관
1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 네 눈이 비둘기 같고 ... 네 머리털은 염소 떼 같구나  2네 이는 ... 털 깎인 암양 .. 같구나  3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네 목은 다윗의 망대와 같고 5네 두 유방은 어린 사슴 같구나 ... 6내가 ... 산으로 가리라  7나의 사랑 너는 (모든 것이)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8내 신부야 ...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 꼭대기에서부터 표범산에서 내려 오너라 (4:1-8)

A. 하나님의 징계의 계절 후에, 신부는 여전히 믿음과 순종에 있어서 성숙해 가는 과정 가운데 있지만, 예수님은 신부를 부르시며 어여쁘고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4:1-5에서 예수님은 어린 신부의 삶에서 움트고 있는 8가지 미덕을 예언적으로 확증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참소를 극복하게 하시는 확증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우리를 무장시켜 주십니다( 12:10).

B. 이 단락은 하나님이 그분의 신부 안에서 분출되기 원하시는 8가지의 성품 묘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상징은 성경을 통해 개발되어 갑니다.

비둘기의 눈 : 한 마음의 전심과 계시의 눈
염소 같은 머리털 : 하나님을 향한 헌신
목욕한 암양 같은 이 : 말씀의 고기를 씹는 것
홍색 실 같은 입 : 구속된 말
입의 입맞춤 : 하나님과의 친밀감
가려진 성전들(/표정) : 하나님의 은혜에 영향 받은 감정
다윗의 망대 같은 목 :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정함
어린 사슴 같은 유방 : 다른 이들을 세워주고 먹이는 능력

III. 예수님께 마음을 정함
A. 4:1-5에서 우리는 신랑이며 왕이신 그분의 소중히 여기시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함으로써 반응합니다( 4:6-8).

B. 예수님은 소중히 여기심으로써 우리를 씻기시고 교회 안에 그분의 영광을 풀어 놓으십니다.

26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 29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cherish; 소중히 여기시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 5:26-29)

C. 연약한 신자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주요한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죄의 더러움과 수치심을 제거하십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진다고 느낄 때,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가운데 우리는 확신 있고 담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 안에서 다윗 왕은 자신의 삶의 능력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소중히 여기시는 마음은 아가서의 가장 탁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 18:35)

D.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싹이 나고 있는 미덕들을 확증해 주시면서,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서 존중하시고 친절과 애정으로 대우하심으로써, 우리를 소중히 여겨(cherish) 주십니다.

E. 예수님은 우리가 투쟁하는 문제들에 의해 우리를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넘어서 더 큰 것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미 달성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미덕의 씨앗들과 우리의 마음을 정하고 있는 것에 의해 우리를 정의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자원하는 영을 보십니다( 26:41).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갈망에 의해 우리를 정의하십니다.

F.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정의하시는지를 아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이 어떤지를 결정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 안에서 성품의 씨앗들을 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여정의 마지막을 확실하게 아십니다.

G. 이스라엘이 강한 미디안에게 공격을 받을 때, 기드온은 두려움으로 포도주 틀에 숨었습니다( 6).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큰 용사여!” 기드온이 자신 안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주님은 아직은 그 안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 믿음의 씨앗과 용기를 보셨습니다. 주님은 미래에 그가 될 모습에 의해서 기드온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은 계속 전진했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지도자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H. 예수님은 베드로가 두려움 안에서 그분을 부인할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석(움직여 질 수 없는 존재: 16:18)으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외적으로 타협자처럼 보였습니다. 베드로의 불안정성은 다시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 안에서 용기, 안정성, 신실함의 씨앗을 보셨고, 그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2:11-13)

I. 우리는 믿음 안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삶에서, 주님의 “세우시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4:20)

J.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며 그분의 목적을 성취할 것이라고 증거하시고 계십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 13:22, 36)

K. 주님은 진실한 신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로 부르십니다(13:23; 19:26; 20:2; 21:7, 20).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3:23)

L. 사탄은 우리를 가망성 없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원수는 많은 이들을 정죄와 고소로 계속 공격합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을 가망성 없는 위선자라고 느끼게 해서 스스로 포기해 버리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가 미성숙과 반역을 혼동하여 포기하기를 원합니다.

M. 많은 이들은 정죄와 무가치함의 불들과 싸우는데에 감정적 에너지를 지나치게 허비합니다. 정죄와 거절의 짐은 스스로를 다루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실패감와 수치심으로 사로잡히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과 함께 효과적으로 걸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N. 많은 이들이 자신의 마음의 의도를 순종과 믿음에 두기 보다는, 성숙한 단계를 얼마나 달성했느냐를 측정하는데 초점을 둡니다. 우리가 자신이 달성한 성숙을 측정하려고 할 때, 영적인 면에서 두가지가 취약해집니다.

1. 우리가 자신을 좋다고 판단하면, 교만하게 되고 실패한 다른 이들을 비판하게 됩니다.
2. 우리가 실패한다면, 정죄감을 느끼고 다 끝난 것 같이 느끼게 됩니다.

O.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감정(아름다움) 위에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믿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려는 우리 마음의 의도에 놓여 져야 합니다. 주님은 그분의 때에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승리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 2:13)

P.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한 남자가 아내나 자녀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징계는 그분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가운데 주어집니다. 부모들은 종종 자녀들 안에 움트고 있는 미덕들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헌신과 위대함의 싹 대신 실패하는 일을 보게 됩니다.

IV. 우리는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아름답다
A. 여인에 대한 징계의 시간(3:1-2)이 끝난 직후에, 주님은 그녀가 그분에게 아름답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2번이나 반복하시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계시를 강조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앞에서 이 신성한 나팔을 부시면서, “보아라! 너는 아름답고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정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계시에 의해, 우리는 변화됩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4:1)

B. 진실한 신자가 연약함 중에서도 하나님에게 아름답다는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해가는 기초입니다. ‘어여쁘다’(fair)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성경에서 ‘아름답다’(beautiful)고 번역됩니다. 이것은 아가서의 우선되는 주제들 중에 하나입니다(1:8,15,16; 2:10,13,14; 4:1,7,10;6:4,10; 7:1).

C. 아가서를 통해 우리가 아름답다는 주제가 발전되어 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D. 우리를 사랑하심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하시고(3:11), 우리를 아름답게 보시는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일어나서 모든 희생을 품어 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산이라도 오르며 어떤 장애물도 직면하게 하는 능력을 줄 것입니다.

E.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삶 안에서 8가지 “싹트는 미덕들”을 확증해 주십니다. 각각의 성품은 오직 씨앗의 형태로 시작되고, 확증에 의해 드러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우리 마음 안에서 보시는 사랑과 순종의 씨앗을 확증하심으로써, 사탄의 참소들에 대항하여 우리를 무장시키십니다.

F. 예수님은 그녀의 삶의 8가지 다른 특성들로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 안으로 자라가게 하십니다. 모든 구절은 특정한 방식으로 마음에 초점을 맞춘 하나님의 시적 로맨스입니다. 8가지 미덕들은 우리에게 부여되는 주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반영이고,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할 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3:11). 8가지 미덕들은 또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G. 그녀는 염소를 기르고 포도원을 지켰기 때문에, 왕은 그녀에게 익숙한 농부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상징은 성경에 의해 해석됩니다.

H. 왕은 그녀에게 산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점까지는 그녀가 산이 아니라 도시로 일어나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3:2). 신부는 아 5-8장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그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저 “예!”라고 답할 뿐입니다. 주님은 그녀가 앞으로 성숙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 “예!”를 인정하십니다.

I. 3가지가 함께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100% 순종의 헌신을 드리게 합니다(4:6). 첫째, 그녀는 거룩한 징계를 받습니다( 3:1-2). 둘째, 그녀는 예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습니다(3:6-11). 셋째, 그녀는 예수님의 눈에 자신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습니다( 4:1-5).

V. : 영적인 이해와 계시 ( 4:1)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 4:1)

A. 눈은 영적인 통찰력을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이해력을 가진 눈을 언급했습니다(1:18). 보는 것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관문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바울의 우선순위였습니다( 3:3-10; 고후 3:18).

B. 비둘기의 눈은 순결과 충성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비둘기로 상징됩니다. 비둘기는 짝이 죽으면 다시 짝짓기를 하지 않습니다. 비둘기는 충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둘기의 눈은 두 사물에 초점을 둘 수 없고, 주변적인 시야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마음(mind)을 뜻합니다. 한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며 헌신하다가, 정죄감에 사로잡히거나 타협해 버리는 대신에, 그녀는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음욕, 실패나 성공이 아니라, 그분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C. 그녀는 자신이 받은 계시 안에서 겸손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어떤 측면들을 감추어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은밀한 삶 즉 베일 속에 그녀의 삶은 개인적인 부분입니다. 풍성한 계시는 바울이 자고하도록 유혹했습니다(고후12:7-9). 바울은 지식은 종종 교만으로 인도된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8:1).

VI. 머리털 : 예수님을 향한 헌신 ( 4:1)
A. 신부의 머리털은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헌신을 말합니다. 나실인의 머리털은 서원과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6). 나실인의 맹세를 한 사람은 머리털을 자를 수 없었습니다. 삼손은 머리털이 잘렸고 헌신의 서원을 깨뜨렸으며 결국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머리털은 또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뜻합니다. 바울은 여인의 긴 머리는 그녀의 영광을 보여 주며 하나님의 권위에 헌신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5, 6, 15).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4:1)

B. 염소 떼로 나타낸 것처럼 여인은 위엄 있고 당당하게 걷습니다.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31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 할 수 없는 왕이니( 30:29-31)

C. 우리는 위엄을 가지고 혹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오는 당당함을 가지고, 헌신의 길을 걸어 갑니다. 헌신이 자아에 집중하는 육신적인 열정으로 부패되기 쉽다는 점은 모든 경우에 공통적입니다.

D. 그녀의 당당한 머리털 즉 헌신은 (성경으로부터) 온전하게 공급받은 결과입니다. 길르앗 산기슭의 염소는 풍성하게 먹여졌습니다. 염소가 잘 먹는 곳은 윤택한 장소들이 많은 기름진 구역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 가운데 온전히 공급받았습니다.

VII. : 그녀의 말씀 안에서의 삶 ( 4: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4:2)

A. 이는 고기를 씹을 수 있고 그래서 양분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어린아이는 고기를 씹을 수 있는 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이들은 말씀의 고기를 받을 수 없습니다(고전 3:1-2; 5:12-14). 이 미덕은 하나님의 말씀의 단단한 것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녀의 이에 대한 4가지 묘사는 농부의 관점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녀의 이는 강하고 풍성하고 효과적입니다.

B. 깎지 않은 양의 털은 불규칙(불균형)하게 자랍니다. 불규칙한 털은 육신적인 열정을 말합니다. 사독 제사장은 양털 옷은 스스로 만족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양털 옷 대신 베옷을 입어야 했습니다(44:15-18). 우리의 육신적인 열정은 성령님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합니다.

C. 목욕장에서 나왔다는 것은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해졌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 우리의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양과 같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끗게 합니다( 5:26).

D. 말씀 안에서 부지런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녀의 이는 “새끼 없는 것이 하나도 없이 쌍태를 낳은 털 깎인 암양”과 같습니다. “쌍태를 낳았다는 것”은 풍성한 수확을 뜻합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목욕장에서 나온 양과 같이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이의 깨끗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헌신을 뜻합니다(딤전 4:6-16). 4:1-2은 아 6:5-6과 같이 그녀의 눈, 머리털, 이 그리고 뺨을 묘사합니다.

VIII. 입술 : 경건하고 기름부음 받은 말 ( 4: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 4:3a)

A. 그녀의 입술은 그녀의 말을 의미합니다. 홍색 실과 같은 그녀의 말은 다른 이들을 속량하는 말을 뜻합니다. 홍색 실은 예수님의 보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속량하심을 말합니다. 정탐꾼이 여리고에 갔을 때, 라합은 속량 받기 위해 창문에 리본을 달았습니다(2:21). 모세는 붉은 양털로 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렸습니다( 9:19).

B. 홍색 실은 우리 입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가 세워주는 방식으로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4:6). 온전한 말은 우리 삶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4:29; 2:3).

IX. : 그녀의 하나님과의 친밀감 ( 4:3)
네 입은 어여쁘고 ( 4:3b)

A. 1:2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언급하는 그분의 입맞춤의 맥락에서, 입이 아가서에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는 그분에게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입이 친밀감을 의미하는 것같이 입술은 그러한 언변을 뜻합니다. 왕이 여인을 칭찬할 때 반복적이거나 장황하지 않습니다.

B. 우리의 사랑을 예수님께 드릴 때, 그것은 흔히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랑스럽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지는 교제를 즐거워하십니다.

X. 뺨 혹은 표정 : 그녀의 감정적인 성격 ( 4:3)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 4:3c,d)

A. 빰 혹은 표정은 사람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성전”(영어 성경에서)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표정” 혹은 “뺨”으로 번역됩니다. 많은 번역본들이 성전 대신에 뺨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표정이나 뺨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표정이나 뺨에서 분노, 기쁨, 즐거움, 슬픔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의 감정을 보여 주는 창입니다.

B. 그녀의 거룩한 감정은 달콤한 석류 한쪽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달콤합니다. 석류는 이스라엘에서 일반적인 달콤한 과일입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옷이나 에봇에도 나타납니다.

C. 석류를 쪼개면 그 속은 붉습니다. 붉은 것은 그녀의 온순함, 즉 수치스러운 일들로 얼굴이 붉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그녀의 성향을 뜻합니다.

D. 창녀는 불순하게 행하여도 얼굴을 붉히지 않습니다. 붉은 용모는 수치스러운 일들에 대해 민감한 것(얼굴을 붉혀서 빨개지는 것)을 뜻합니다. 너울(베일) 속이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녀의 은밀한 삶도 온순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그녀의 진심입니다. 외모로 단순하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온순함이 삶 속에 감추어 있습니다.

XI. : 그녀의 단호한 의지 ( 4: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 4:4)

A. 성경에서 목은 흔히 목을 곧게 하거나(저항하는 의미) 혹은 복종하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정복당한 적의 목을 밟을 때, 그것은 그들의 복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B. 신부의 의지는 그 마음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두는 다윗의 마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두 마음과 반대적인 것입니다.

C. 다윗의 망대는 강하고 높아서 예루살렘 도시를 지키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녀의 선택은 다윗의 망대처럼 강력합니다.

D. 전쟁을 위해 무기고에서 무기를 보관했습니다( 3:19, 25). 하나님께 순종하는 단호한 의지는 사탄의 왕국을 대적하는 무기의 저장소입니다. 방패는 흔히 팔을 보호하는 작고 둥근 것입니다. 1000개의 방패는 적에 대한 풍부한 보호를 뜻합니다. 그녀의 의지는 전쟁을 통해 숙련된 1000명의 용사의 방패와 같습니다. 이것들은 적으로부터 보호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보호하는데 사용되는 믿음의 방패를 뜻합니다(6:16).

E. 예수님께 복종하기로 한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의지는 영적 승리에 있어서 중요한 측면입니다.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를 훈련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예!”라고 말하게 하시면서까지, 그분 자신의 속량의 한계선을 침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XII. 유방 : 다른 이들을 양육하는 능력 ( 4: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 4:5)

A. 유방은 엄마가 아기를 젖 먹이듯이, 다른 이들을 양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사슴은 젊음이 가득찬 동물입니다. 그녀의 유방은 쌍태의 어린 사슴과 같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젖을 먹이면서, 다른 이들을 돌보는 두 갑절의 능력을 뜻합니다. 어린 사슴 같은 유방은 결코 마르지 않는 젊은 엄마의 젖을 뜻합니다. 이것은 늙은 여인과 반대적인 것입니다.

B. 여인의 사역은 순수함을 상징하는 백합화 가운데서 먹는 어린 사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그녀를 은으로 만든 장신구, 즉 사역 가운데 준비된 자로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10).

XIII. 그녀의 헌신은 영적 성숙의 기초이다 ( 4:6)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 4:6)

A. 그녀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확증에 대해서, 십자가를 껴안음으로써 즉 몰약 산에 가기로 헌신함으로써 반응합니다. 산은 그녀의 순종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뜻합니다( 2:8-9).

B. 몰약은 비싸고 귀중하며 향기를 내는 장례 향품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에게는 장례 향품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영에게는 향기와 같습니다. 그것은 (안락함이 아닌) 몰약의 산입니다. 그곳은 산(mountain)이요 작은 산(hill; 언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몰약의 산(the mountain of myrrh)으로 오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9:26).

C. 성경에서 유향 즉 향료는 기도를 말합니다( 141:2; 5:8). 우리는 유향의 작은 산(hill)에 올라, 몰약의 산(mountain)을 오를 힘을 부여 받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시험에 직면할 힘을 공급받도록 기도하라고 훈계하셨습니다( 26:40-41). 몰약 산은 유향의 작은 산에서 살지 않고는 오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맞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작은 산을 올라간 만큼 부인의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D. 유향의 작은 산은 몰약의 산보다는 작은 것입니다. 기도의 작은 양으로도 보다 큰 산을 오르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데 충분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효과는 산을 오르는 우리의 노력을 초월합니다. 짧은 기도는 우리를 멀리까지 가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로부터 우리는 훨씬 많은 유익을 받게 됩니다.

E. 여인은 안전지대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기로 즉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걸어가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내가 가리라” 이 단어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스럽습니까?

F. 그녀는 그것을 “나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하신 유일한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자로 잰 듯한 여정으로 부르십니다. 몰약의 산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독특한 길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특별한 고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G. 그녀는 모든 타협이 다 지나갈 때까지 즉 날이 밝아오고 어둠이 사라지기까지, 계속해서 몰약의 산으로 나아갈 것을 헌신합니다. 어둠은 작은 여우처럼(2:15) 약함과 타협이 있는 영역을 뜻합니다. 아침 빛은 새로운 날 즉 밤에 이루어진 노력들 끝에 승리의 계절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은 장차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살아갈 영원의 시간을 의미할 뿐 아니라이 땅에서 보다 큰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될 승리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XIV. 예수님의 새로운 확증의 말씀 ( 4:7)
나의 사랑 너는 (모든 것이)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 4:7)

A. 그분은 아가서 전체에서 그녀를 13번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아가서의 이 구절까지 주님은 그녀를 “아름답다”라거나 “어여쁘다”고 8번 부르셨습니다. “모든 것이 어여쁘다”라는 단어는 NAS에서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번역했습니다그분은 아가서의 처음 표현에 “모든 것이”라는 말을 첨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산으로 가기로 마음을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오직 “예!”만을 말합니다. 그녀가 아직 산으로 간 것은 아니지만, 그분은 그녀 안에서 아무 흠 곧 의도적으로 그분의 리더십을 거역하는 어떤 영역도 보실 수 없으십니다.

B. 그녀는 2가지 시험(test)을 직면하기 전까지 산으로 가지 않습니다( 5:2-8). 그분은 십자가를 껴안는 그녀의 자원함을 보십니다. 주님은 그녀의 약한 육신이나 성숙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자원하는 심령을 통해서 그녀를 정의하십니다.

XV. 영적 전쟁을 향한 부르심 ( 4: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 4:8)

A. 아가서에서 처음으로 왕께서 그녀를 신부로 부르십니다. 산으로 가려는 그녀의 헌신과 함께, 그녀는 이제 신부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녀는 이제 충성스러운 신부처럼 마음을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4장들에서 우리는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B. 예수님의 유업은 영원한 동반자 즉 사랑 안에서 그분과 함께 멍에를 지는 사랑으로 가득한 신부입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신부를, 아버지께 가정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순종 안에서 신부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2:17).

C. 예수님은 그녀를 초청하시어, 그분과 함께 영적 전쟁의 장소인 레바논의 산에서부터 그분을 따라서, 그분께서 가시려 하시는 어떤 곳이든 함께 가게 하십니다. 그분은 그녀가 그분을 따라 겟세마네로 가도록 부르십니다( 5:2-7).

D. 그녀는 이제 산으로 가자고 하셨던 처음의 도전에 순종합니다(2:10, 13). 솔로몬은 북이스라엘의 레바논 산지 숲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자신의 신부와 함께 갔습니다. 레바논은 향기로운 나무로 가득했습니다(4:11; 14:6). 그 영광은 사 35:2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E. 레바논은 지정학적 요충지였고 산악 지대였습니다. 스닐과 헤르몬은 레바논 산지 내에 있는 가장 높은 다른 두 산봉우리입니다헤르몬 산은 요단강 동편에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아모리 사람들에 의해 스닐 산으로 불려졌습니다. 아마나 산은 성경에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헤르몬 산악지대의 두 부분이었던 스닐 산과 헤르몬 산(3:9; 4:48; 대상5:23)에서 옆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F. 그녀는 아마나, 스닐, 헤르몬의 산꼭대기에서 즉 그분의 관점(하늘의 관점)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적 관점에서 어려움을 바라보면서 담대함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붙잡아야 하는 그분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G. 이스라엘이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암몬 족속을 정복한 후에, 그들은 이 동쪽 산들에 올라서서 요단 강 서쪽으로 펼쳐진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아모리 왕들(옥과 시혼)을 정복한 후에 이 산에 올랐습니다( 3:1-11). 그녀는 영적 전쟁을 약속하고 하늘의 처소에 앉은 전쟁하는 신부입니다.

H. 산꼭대기에는 사자와 표범이 있습니다. 인간들을 삼켜버리는 동물들인 사자와 표범을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삼켜 버리려고 하는 으르렁대는 사자입니다(벧전 5:8). 이것은 영적 전쟁을 말합니다( 6:10-12).

I. “삼켜 버림의 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며시 접근하는 맹수들이 있습니다( 76:4). 하박국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레바논의 산들에 약탈하는 짐승들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2:17)

<출처:선두주자커뮤니케션/IHOP번역글>

제15강 예수님의 안전한 지도력에 대한 계시 (아3:6-11)

I. 아가서 2:8-3:5 개관
A.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을 산들(장애물들)을 정복하신 왕으로, "만유의 주"로 알도록 새로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장애물들을 승리로 뛰어넘은 노루와 같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 2:8)

B. 예수님은 그 분의 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하려고, 그녀를 안전지대에서 나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도록 부르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2:10)

C. 여인은 일어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그녀 없이 산으로 돌아가라고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미성숙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turn:돌아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 2:17)

D.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여인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과의 그녀의 관계에 어떤 역동적인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삶의 각 계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과 순종의 기준을 일단 올리시면, 우리는 꼭 응답해야 하거나 아니면 예수님과의 우리의 관계가 뒷걸음치거나 둘 중 하나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님의 일들 안에서 자라기 원한다면 어제의 순종의 차원은 이제 충분치 않은 것이 됩니다. 성령님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빛을 증가시키면서, 우리로 응답할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만약 응답하기를 무시하면 그의 임재를 거두시어 우리의 주목을 얻으시려 합니다.

E. 하나님의 느낄 수 있는 임재가 여인에게서 거두어집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 3:1-2)

F.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사랑으로 징계하심입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그의 느낄 수 있는 임재에 대한 감각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는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시기하시기까지 더 깊은 동반자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G.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충만히 이르지 못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영적 풍요로움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얽매어서 종노릇하게 하는 것들에서 손을 떼게 하십니다. 순종의 대가는 큽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대가는 더 큽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그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거두어 가셔서 성령님의 지도력을 더 깊이 받아들이길 거절하는 타협의 심각성을 경계해주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성령님과의 관계에 방해되는 그 어떤 것도 절대 허용하지 않도록 결단하게 하십니다.

H. 주님이 우리를 징계할 때, 우리 삶에 그가 기뻐하지 않는 영역에 대한 불쾌함을 나타내십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하나님의 거절로 잘못 알지만, 이것은 그의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그가 징계하는 자는 기뻐하십니다. (12: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 3:12)

II. 아가서 3:6-11 개요
A. 이것은 아가서 안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네 번째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안전한 구원자"로서 신부에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 타락한 세상이라는 광야 밖으로 인도해 내시는 예수님의 안전한 지도력에 대한 계시를 신부가 얻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종하며, 감사로 가득하고, 신뢰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우리 마음이 성숙해 질 장소에 우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부는 이 계시를 예수님을 붙잡았을 때 받았습니다(3:4).

B.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왕이신 신랑으로 계시될 때만 안전에 거하게 됩니다. 왕이신 신랑은 우리가 산들을 만날 때 100 중의 순종과 믿음을 갖고 행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는 대환난 동안에 꼭 필요한 계시가 될 것입니다.

C. 성령님은 하나의 질문을 하신 뒤에(3:6) 간곡한 권고와 함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답을 주십니다.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의 지도력 아래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해 군사용어를 사용하여 계시하십니다(3:7,8).

둘째로 그의 안전한 지도력을 계시하려고 궁중 혼인 행렬을 사용하십니다(3:9,10).

우리 구원의 절정은 예수님을 왕이신 신랑으로 아는 것 안에 있습니다(3:11).

D. 사탄은 예수님이 안전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거짓말합니다. 이 기초가 되는 계시는 두려움 없는 깊은 헌신, 아가서 4장에서 8장을 통해 신부가 걸어갈 그 헌신을 위해 신부를 준비시킵니다.

III.   성령님은 누군가를 찾는 질문을 던지신다(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 3:6)

A. 이 누군가를 찾는 질문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교리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영적 번역으로 제가 믿기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 이름 없는 사람은 성령입니다. "이 자가 누구인가?"라는 같은 말을 사용해 묻는 질문이 나오는 상황이 세 번 있습니다(3:6; 6:10; 8:5). 두 번의 경우는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성령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6:10; 8:5). 그러므로 여기서도 성령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B. 이 질문을 신부가 하는 것은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가서3:11에서 화자는 "그의" 결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부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결혼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성령이 이 이야기를 신부의 입을 통해 딸들에게 알리고 계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C. 성령님은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후에 왕으로(9) 영원한 성에 들어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불안감이 아닌 경외와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경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의 희생제사에서 쓰이는 같은 맥락의 언어로 예수님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D. 예수님은 이 타락한 시대라는 광야에서 승리로 올라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생활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우리의 길에서 겪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의 분투를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아가서8:5에서 신부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옵니다.

E.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천하신 것이 여기서 연기 기둥으로 나타내어져 있습니다(19:18; 6:4; 8:4). 장막의 언어에서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번제의 연기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위로 올라간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불 속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이 연기 기둥처럼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 15:8)

F.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내를 풍기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몰약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고대에 몰약은 값비싼 장례용 향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몰약으로 둘러 싸여지셨습니다.

G. 유향예수님의 향기로운 중보를 말합니다(7:25). 대제사장이 유향(향이 나는)향로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갔던 것 같이 예수님은 중보로 가득 찬 그의 향로를 가지고 천국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천국의 제단에 있는 향이 담긴 금 대접은 우리의 기도를 말합니다(5:8; 8:3-5).

H. 상인의 향품예수님의 우릴 향한 헌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진주들(그의 신부)을 사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상인입니다. 상인은 시장에서 향품을 (사고 팔므로) 취급한 결과로 향내를 풍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모든 것을 팔아 버린 향기 나는 상인입니다.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I.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예수님이, 얼마나 더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시려 하겠습니까? 육신으로 오시고 죽으신 것은(6), 그가 우리의 유익을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광야에서의 이 여정 동안에, 그는 우리 죄와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의 죽음(몰약)과 중보(유향)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우 헌신되어 있기 때문에(상인의 향품) 우리는 안전지대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8:31-32)

IV. 성령님의 보호하시는 사역( 3:7-8)
7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8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 3:7-8)

A.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갖는 보호와 안전이 군사 용어로 묘사된 것을 보고 있습니다.

B. 솔로몬 왕은 아가서에서 왕이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솔로몬의 침상, 가마(9)는 그의 궁중 혼인 행렬에 쓰인 수레였습니다. 궁중 호위병의 어깨에 매고 운반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침상 안에서 그의 신부는 그의 곁에 앉아 안전하게 광야를 통과합니다. 솔로몬의 침상은 광야를 통과해 신부를 수넴(신부가 살던 도시)에서 그의 예루살렘 궁까지 데리고 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궁중 행렬이 다가오며 일으키는 먼지 구름을 봅니다. 칼과 전투 장비를 갖춘 용사들의 행렬을 난생 처음 보는 것입니다.

C. 솔로몬의 가마는 "복음 가마"(gospel couch) 혹은 혼인예식용 수레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 되어져 온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타락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나와 승리로 올라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원수들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로 그의 가마에서 안식하고 계십니다(110:1-3; 1:20-22).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1:20-21)

D. 이 가마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으며, 보좌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3:21).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2:6)

E. "복음 가마"는 광야를 통과하는 이 여정에서 안전하도록 우리 마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수레는 왕 옆에 앉은 신부같이 우리가 이 시대의 광야를 통과해 가는 동안 죄와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호위해 갑니다.

F. 솔로몬의 60명의 용사가 그의 가마를 둘러싸 광야를 지나는 동안 적으로부터 그의 신부를 보호했습니다. 영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는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오직 왕만이 전쟁에 익숙한 60명의 숙련된 용사로 충분한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G. 가마를 둘러 싼 용사는 성령님의 지키고, 보호하는 사역을 군사적 언어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솔로몬의 용사는 성령님의 엄청난 보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용맹스런 전사들은 하나님의 엄청나게 값비싼 보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장막 언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 안에는 60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H. 이 용사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오직 돈 때문에 지원했기에 위험이 오면 달아나버리는 용병이나 외국인 군병과 달리, 왕의 전차를 지키기에 충성되고 용감했습니다.

I. 신부는 싸움에 익숙한 용사가 둘러싸고 있는 가마에 앉아있기에 적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적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둘러싼 60명의 용사가 묘사하고 있듯이 우리를 파수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이 여정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J. 이들 용사들은 모두 "칼을 잡고" 있는데, 칼 쓰는데 능숙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이 풋내기가 아니라 경험 많고 노련한 전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잘 때 칼을 벗어놓는 군병과 달리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성실한 용사들로 어둠의 권세나 대적의 공격을 가리키는 밤의 두려움 때문에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6:12).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3:8)

K. 성령님은 사단의 모든 계략을 아는 전쟁에 능하신 분입니다( 6:10-12).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많은 방법을 사용해 일하십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예언적인 꿈을 주시거나, 문을 열던지 혹은 닫으시고, 우릴 위해 중보하도록 누군가를 감동하시며, 천사를 보내시고, 우릴 통해 성령의 은사를 풀어놓으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낼 말씀의 계시를 주시거나 혹은 우리를 안전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계시를 주십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능숙하게, 성실히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L. 그는 우리가 타락하지 않게 혹은 그만두지 않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들을 드리고 성경적 원리의 단순한 울타리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에게 너무 어려워 해결 못하는 죄란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24)

V. 예수님의 사랑의 구원은 우리에게 큰 안전을 가져다 준다( 3:9-10)
9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10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 3:9-10)

A. 우리의 안전은 아가서 3:9,10의 궁중 혼인 행렬의 언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복음 가마(7)는 지금 가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가마를 제공하십니다. 솔로몬은 커튼으로 감싸인 이동 가능한 의자를 만들어 궁중 호위병이 운행하게 했습니다.

B. 솔로몬은 그의 여왕을 데려오려 특별히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안식할 자기의 가마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저 천국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C. 복음 가마는 레바논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장막 안의 나무는 금으로 입혔습니다. 나무는 인성을 말하며, 금은 신성을 가리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데 쓰였습니다. 레바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값비싼, 또 가장 강한 나무였습니다. 복음은 이 땅에 살았던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하면서 가장 값비싼 육체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으로 나아 오셨었습니다.

D. 복음 가마는 은과 금으로 만들어졌었습니다. 은이 의미하는 것은 속량(redemption)이며, 금은 거룩한 성품을 말합니다. 은으로 된 기둥은 보좌를 둘러싼 난간들이었습니다. 가마의 바닥을 이루는 장치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바닥"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난간"이라는 단어입니다. 가마의 바닥이 금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우리의 보호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위대한 능력 위에 성립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부는 절대로 이 영광스러운 의자에서 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E. 이 복음 의자는 자색(purple)으로 왕권과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이 우리를 괴롭히려 기회를 찾을 때 복음은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풀어놓습니다.

F. 이 가마(복음) 안에 짜여져 있는 벽걸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 예루살렘 딸들, 즉 연약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이 엮어져 있습니다. 복음의 안 쪽, 즉 내적 사역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장식되어있습니다. 그의 교제 안에서 그 분은 매우 친절하십니다.

G. 복음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영원하신 사랑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에 "사랑이 엮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복음 가마의 안쪽은 하나님의 사랑이 엮어져 둘려 쳐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또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성도를 향한 그의 사랑을 통해 실행되어집니다. "내 위의 그의 깃발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 안에 엮어집니다. 이 계시는 우리가 사랑 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그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힘을 갖게 함으로 그 사랑 안에서 자라도록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되어질 때 가장 안전합니다.

H. NKJ에서 예루살렘 딸들에 "의해"("BY" the daughters) 라고 잘못 번역하고 있는 반면에 KJV에서는 "예루살렘 딸들을 위해"("FOR" the daughters of Jerusalem") 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 딸들에 "의해"("by") 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for") 엮어져 있습니다. 이는 딸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지, 예수님을 위한 딸들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VI. 성령님은 모든 교회에 신부의 패러다임을 갖도록 간곡히 권고하신다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 3:11)

A.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신 신랑으로 바라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2:2; 3:8; 33:17). 우리가 예수님을 그의 혼인 잔칫날 모든 권세로 왕관 쓰신 왕으로 묵상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왕관 쓰신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는 이제 산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2:8-13).

B. 그의 어머니는 교회의 한 그림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형제입니다(12:46-50). 우리의 영적인 탄생을 위해 그는 교회의 한 지체로써 전도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언급됩니다.

C. 예수님은 많은 왕관을 가지고 계십니다. 결혼 때 쓰는 왕관은 열방을 정복하고 얻은 왕관과 구별되는 독특한 것입니다. 이 왕관은 눈에 띄게 독특한 관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지만, 기쁨의 또 다른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왕관은 온 역사를 통해 구속받은 자들의 축적된 응답입니다.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우리의 사랑으로 그에게 관 씌우는 무리 중 하나가 되는 것 보다 더 위대한 지위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름부음 안에 살아가는 것에서 우리의 위대함과 지위는 발견되어집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그에게 관 씌우는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자발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면류관을 그 앞에 던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말해줍니다.

D. "어머니가 그분에게 왕관을 씌우십니다.”우리가 자발적인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왕 되심에 반응할 때, 교회는 그분에게 왕으로서 왕관을 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개인적인 왕이신 신랑으로서 왕관을 씌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다른 것보다도 우리가 더욱 갈망하는 왕관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왕관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 때, 우리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그들의 부르심을 알 때, 그들은 시온의 딸들로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혼의 날은 계시록 19:6-8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그분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리는 날입니다.

E. 예수님이 다가 올 결혼에 대해 어떻게 느끼실까요? 그분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국가와 정치적인 동맹을 맺기 위한 정략적인 결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압적인 결혼식(shotgun wedding)이 아닙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 62:5)

<출처:선두주자커뮤니케션/IHOP번역글>


제14강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 징계 (아 3:1-5)

I. 아가서 2:8-17 개관
A.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산들을 정복하신 왕, "만유의 주"라는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산들(장애물들)을 승리로 뛰어넘은 노루와 같았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 2:8-9a)

B. 예수님은 일어나 그와 산 위(높은 지대)로 함께 가자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차원의 믿음과 순종이 요구되는 새 과제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안전과 안락함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처음의 기도에서 예수님께 "나를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겠습니다"(1:4)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녀를 안전지대에서 나와 성령 안에 새로운 장소로 들어가도록 부르셔서 더 깊은 동반자 관계를 경험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2:10)

C. 여인은 일어나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께 그녀 없이 산으로 돌아가라고 말씀 드립니다. 그녀는 거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합니다(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함). 아침에 날이 밝아와 새 빛이 나타날 때 그녀 삶의 어두운 영역이 사라져 갑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새벽이 밝아오고 어둠이 사라질 때) 돌아와서(turn;돌아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 2:17)

II. 아가서 3:1-5 개요
A.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여인에게 주님이 주시는 응답은 사랑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느낄 수 있는 임재가 그 마음에서 거두어짐으로 징계(훈련)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화가 나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더 깊은 동반자로의 관계 안에서 그와 함께 걷는 성숙한 신부로서 예수님의 가치관을 함께 소유하게 되길 시기하기까지 원하시는 것입니다.

B.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성숙한 신부로 부족함 없게 하려 하십니다. 그녀가 영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도록 이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얽매 종노릇하게 하는 것들에서 손을 떼게 하십니다. 순종의 대가는 큽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대가는 더 큽니다. 성령의 지도력에 순종하는 걸 무시해 버리는 것은 큰 비용을 지불하게 합니다.

C. 주님은 몇 가지 이유로 그의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서 그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거두어 가십니다.

첫 번째로, 성령님의 지도력을 더 깊이 받아들이길 거절하는 타협의 심각성을 경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를 겸손케 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인식하게 하려 합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을 향한 깊은 배고픔을 일깨우시기 위해서입니다.

D.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그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향한 열심, 시기를 나타내실 것에 대해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마음으로 순종하여 살아갈 것을 시기하기까지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할 것이며, 우리의 위대함으로 끝맺게 할 것임을 열정적으로 역설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 4:5)

III.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거절하시는 것과 다르다
A. 아가서의 메시지는 우리의 연약함 중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영역들을 고쳐 우리 안에 사랑(거룩함)을 막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셔서)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12:10)

B.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실 때, 우리 삶에 그가 기뻐하지 않는 영역에 대한 불쾌함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한 인격체로서 우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인격체로 멸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떤 한 행동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하나님의 거절로 잘못 알지만, 이것은 그의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그가 징계하는 자는 기뻐하십니다(12: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 3:12)

C. 예수님은 회개의 필요성으로 믿는자들을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꾸짖고 회개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 사람들을 그의 보좌에 앉도록 초청합니다.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3:19, 21)

D. 징계 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돌보시며 우리를 포기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기간 죄와  "함께 머물러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게 이 사람들을 넘겨주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가 우리에 대해 포기치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1:24-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 ( 1:24)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1:32)

E. 하나님은 그가 징계하는 자들의 고통을 느끼시며 이들을 그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로 계속 여기십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 그의 사랑과 ... 구원하시고 ... ( 63:9)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 12:7)

F. 우리가 정직하게 그리고 철저히 우리 마음의 죄를 직면하는 것을 무시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덜 사랑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손해를 거듭하게 됩니다. 우리 구원의 기쁨, 계시의 영, 경건한 교제, 그리고 영원한 상급 받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G. 하나님은 한동안 부드러운 인내로 회개치 않는 믿는 자들을 대하십니다. 그의 인내하심을 그의 인정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과 그 제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었습니다.

21또 내가 그(이세벨)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 2:21,22)

H.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 회개하도록 일하실 때, 그의 사랑 안에서 끈기 있게 우리와 함께 오래도록 고통 받으십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 2:4)

IV. 하나님의 드러나는 임재가 여인에게서 거두어지다
A. 여인은 하나님을 찾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아가서 1-2장 전체에서는 그를 찾을 때 굉장한 달콤함으로 그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1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2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 3:1-2)

B. 여기 우리 영적인 삶 속에서 맞게 되는 네 가지 다른 "밤들"이 있습니다. 이 밤에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1. 밤 시간 : 이 시간들의 불편함을 참고라도 그를 알고자 하는 경건한 절박함 때문에 우리는  종종 밤 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2.고통의 밤 :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치고, 요셉이 지하 감옥에 있었던 것 같은 어려운 환경가운데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결론지어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3. 유혹의 밤 : 실패와 어두움의 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찾기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4. 영혼의 어두운 밤 : 중세시대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순종의 시간 동안에 일시적으로 거두어 진 것을 나타내는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5:6).

C. 여인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산으로 올랐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침상"(1:16,3:7)과 대조를 이루는 "그녀의 침상"에 있습니다. 그들의 동반자 관계는 중단되었습니다.

D. 그녀의 마음은 갈등과 분투 중에도 사랑하는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순종하길 두려하 는 것 때문에 그녀를 가망성 없는 위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안에서 승리를 거두기 전에도 예수님을 "나의 마음에 사랑하는 자"라고 계속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닿지 못할 것 같은 믿음/순종이라는 하나의 산과 마주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느낍니다. 산들 사이사이에는 골짜기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골짜기에 있는 하나님의 연인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 3:1)

E. 그녀는 과거에 했던 기도와 말씀묵상 같은 친숙한 영적인 훈련들을 통해 하나님 찾기를 계속합니다(2:3-5). 지금은 예수님이 새로운 차원의 순종을 요구하고 계시기에 그의 임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기도와 금식은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 8:4)

F. 우리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가 그를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4:8)

3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 24:3-4)

G.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로부터 숨기시면서 우리가 자신을 재촉하여 하나님을 붙들기를 요구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 64: 7)

H. 예레미야 20:7 원리 : 예레미야의 젊은 시절에 주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그에게 나타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지도자들에게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는 예언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안에 불을 타오르게 했습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게 하셨고, 나는 이제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당신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가서 1-2장에서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속이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속임을)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V. 젊은 신부는 기도에 순종을 더한다
2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3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A. 그 여인은 아 2:10에서 명령 받은 대로 이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임재를 뒤로 물러가게 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열심히 찾게 하시고, 두려움과 불신감과 타협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내십니다. 우리가 일어나 새로운 영역의 순종으로 나아갈 때까지 주님은 머물러 계십니다. 믿음과 순종으로 주님과 동반자가 되어 일어나는 것이 유일한 안전의 장소입니다.

B.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는 고통은 그녀가 자신의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안전 지대를 떠날 수 있는 동기를 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얼굴을 숨기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열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의 얼굴을 숨기십니다. 우리가 만족스러웠던 이전 계절을 기억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더 큰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녀는 기도에 순종을 더합니다. 기도만으로는 그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을 이해했습니다.

C. 그녀는 일어나서 도시 근처에 거리와 광장 사이에 사람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곳으로 갑니다. 이곳은 안락한 침대와 벽의 안전함을 벗어나 위기와 갈등과 위험과 증가된 영적 전쟁이 있는 곳입니다(1:16; 2:9). 

D. 야곱은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했습니다( 32:24-30). 야곱은 그가 하나님을 움직이기 전까지는 포기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돌파가 올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의 상징입니다. 호세아는 야곱을 눈물과 간구로 하나님을 열심히 구하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12:2-6).

E. 나의 한 친구(Michael Sullivant)는 그의 아들과 레슬링하면서 그 아들이 그를 바닥에 꼼짝 못하게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웃으면서 “내가 아빠를 이겼다.”라고 말했습니다. 내 친구는 그의 아들과 레슬링하면서 기쁨을 느꼈습니다. 주님이 그에게 “내가 내 자신이 너의 의해서 밀어붙여지게 했을 때,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한단다.” 우리가 하나님과 씨름해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한 사람 안에서 성장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기쁩니다.

VI. 그녀의 순종으로 예수님의 임재가 돌아오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 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 3:4)

A. 그녀가 일어나 순종함으로 예수님을 찾았을 때 그분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애정에 매여서 우리의 열심에 응답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오래 동안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B. 영적 굶주림의 원리 : 우리가 말씀 안에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면, 우리는 적절한 때에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 없이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 어떤 것을 너무나도 원하여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적절한 때에 그것을 소유할 것입니다.

C. 우리는 영적으로 지루하고 죄와 불신 안에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산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는 기름부음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안에서 예수님께 순종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36:26).

D. 그녀는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새로운 결심을 하는데, 그것은 영적인 싸움의 고통스런 계절로부터 나온 결단입니다. 그녀는 아가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분을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E. 영적 혼란의 시기는 때로 우리 안에 “거룩한 폭력”을 생산해 내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붙잡게 하고 우리 삶에서 타협이 다시금 용납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1:12).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결심을 합니다.

F. 그 여인은 가장 어려운 장소들로 나아가는 것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 ,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 3:4)

G. 그녀는 기름부음 받은 예수님의 대사입니다. 아버지의 선택하심의 도구인 그녀의 순종이 없다면 예수님이 가지 않으려 했던 곳으로, 그녀는 실제로 예수님을 데리고 갑니다. 아가서의 끝부분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8:2).

H. 어머니교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입니다( 12:46-50). 어머니 이스라엘은 속량 받은 자들을 태어나게 합니다( 12:7, 17). 예수님을 데리고 가기에 가장 어려운 곳은 흔히 친밀한 가족 관계 안에 있습니다.

I. 가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 어려운 곳을 대표하는데 그 이유는 매우 친근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그의 가정에서 존경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은 일어나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J. 가정은 또한 작음의 장소를 대표합니다. 우리는 사역하기 위해 반드시 비행기를 타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정과 이웃에 있는 적은 사람들에게 가서 사역할 수 있습니다.

VII. 성령님은 우리를 전략적인 영적인 계절로 인도하신 ( 2:7)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 2:7)

A. 성령님은 여기서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각 개인의 영적인 삶 안에 전략적인 계절들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대한 새롭고 깊은 계시들 안에서 우리가 세워지기를 그분은 갈망하시는 계절들이 있습니다. 이 계절에 신부를 향한 성령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그녀가 잔칫집에서 사과와 포도를 먹으므로 말씀으로 더욱 깊어지는 때에, 그녀 안에 상사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2:3-5).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서 깊어지기 위하여 그들의 삶이 바쳐지는 계절들이 필요함을 알지 못합니다.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은 방식으로 이해하라고 들었습니다( 10:9-11).

B. 예루살렘의 딸들은 성령의 다양한 활동과 하나님 안에 다른 계절들에 대한 분별이 없는 신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계절에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으로 인해 신부의 마음을 가진 헌신된 자들을 방해하거나 가로막지 말라고 성령님은 다른 신자들에게 엄하게 부탁합니다. 우리는 아 2:8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는 것처럼 계절이 변할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방해하시는 것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당신의 방식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힘을 얻고 새로워지기 위하여 침상에 앉아 있는 특별한 계절로부터 신부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가지의 충고만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을 줄이고 사역 활동을 늘리라는 것입니다.

C. 솔로몬은 노루나 들사슴을 두고 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2:7). 노루나 사슴은 이 계절에 젊은 신부와 관계되는 것에 있어서 부드러움과 민감함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노루나 사슴은 민감한 성격을 갖고 있고 쉽게 깜짝 놀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쉽게 말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우리는 다른 계절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에 민감성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D. "그것이 원하기 전에는“(Until it please)이라는 구절에서 히브리어로 “그것이”“그가”“그녀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NAS 번역본은 실제로 그 구절을 “그것이 원하기 전에는”이 아니라그녀가 원하기 전에는 사랑을 깨우지 말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그가”라고 번역되었다면, 그것은 예루살렘의 딸들에 의해 흔들어지는 주님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럴 필요도 없고, 노루에 의해 상징되는 부드러움에 의해 보호될 필요도 없습니다. 방해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신부입니다.

E. 예수님은 “그녀가 원하기 전에 일으키거나 깨우지 말아라”(2:7; 3:5; 8:4)는 구절을 세 번 언급합니다. 8:4에서 그분은 “그녀를 방해하지 말아라”는 같은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분은 다른 두 번처럼 그녀를 감싸 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언급에서는 “들사슴을 두고”라는 구절은 뺍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더 이상 미성숙하거나 쉽게 방해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4:14).

F. 성령님의 부탁은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는 움직이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G. 주님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우리 각자가 만들어지는 여정을 갖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신자들에게 그녀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징계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성화되지 못한 긍휼과 잘못된 위로에 의해서 이러한 특별한 계절로부터 그녀가 방해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출처:선두주자커뮤니케션/IHOP번역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