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아가서 2:8-3:5 개관
A.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을 산들(장애물들)을 정복하신 왕으로, "만유의 주"로 알도록 새로운 계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장애물들을 승리로 뛰어넘은 노루와 같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아 2:8)
B. 예수님은 그 분의 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하려고, 그녀를 안전지대에서 나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도록 부르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
C. 여인은 일어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그녀 없이 산으로 돌아가라고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미성숙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turn:돌아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아 2:17)
D.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여인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과의 그녀의 관계에 어떤 역동적인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삶의 각 계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과 순종의 기준을 일단 올리시면, 우리는 꼭 응답해야 하거나 아니면 예수님과의 우리의 관계가 뒷걸음치거나 둘 중 하나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성령님의 일들 안에서 자라기 원한다면 어제의 순종의 차원은 이제 충분치 않은 것이 됩니다. 성령님이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빛을 증가시키면서, 우리로 응답할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만약 응답하기를 무시하면 그의 임재를 거두시어 우리의 주목을 얻으시려 합니다.
E. 하나님의 느낄 수 있는 임재가 여인에게서 거두어집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하였노라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 (아 3:1-2)
F.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사랑으로 징계하심입니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그의 느낄 수 있는 임재에 대한 감각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는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시기하시기까지 더 깊은 동반자 관계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G.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 우리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충만히 이르지 못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영적 풍요로움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얽매어서 종노릇하게 하는 것들에서 손을 떼게 하십니다. 순종의 대가는 큽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대가는 더 큽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에서 그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거두어 가셔서 성령님의 지도력을 더 깊이 받아들이길 거절하는 타협의 심각성을 경계해주십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성령님과의 관계에 방해되는 그 어떤 것도 절대 허용하지 않도록 결단하게 하십니다.
H. 주님이 우리를 징계할 때, 우리 삶에 그가 기뻐하지 않는 영역에 대한 불쾌함을 나타내십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하나님의 거절로 잘못 알지만, 이것은 그의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그가 징계하는 자는 기뻐하십니다. (히12:6)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잠 3:12)
II. 아가서 3:6-11 개요
A. 이것은 아가서 안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네 번째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안전한 구원자"로서 신부에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 타락한 세상이라는 광야 밖으로 인도해 내시는 예수님의 안전한 지도력에 대한 계시를 신부가 얻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려움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종하며, 감사로 가득하고, 신뢰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우리 마음이 성숙해 질 장소에 우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부는 이 계시를 예수님을 붙잡았을 때 받았습니다(아3:4).
B.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왕이신 신랑으로 계시될 때만 안전에 거하게 됩니다. 왕이신 신랑은 우리가 산들을 만날 때 100 중의 순종과 믿음을 갖고 행진 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는 대환난 동안에 꼭 필요한 계시가 될 것입니다.
C. 성령님은 하나의 질문을 하신 뒤에(아3:6) 간곡한 권고와 함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답을 주십니다.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의 지도력 아래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해 군사용어를 사용하여 계시하십니다(아3:7,8).
둘째로 그의 안전한 지도력을 계시하려고 궁중 혼인 행렬을 사용하십니다(아3:9,10).
우리 구원의 절정은 예수님을 왕이신 신랑으로 아는 것 안에 있습니다(아3:11).
D. 사탄은 예수님이 안전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거짓말합니다. 이 기초가 되는 계시는 두려움 없는 깊은 헌신, 아가서 4장에서 8장을 통해 신부가 걸어갈 그 헌신을 위해 신부를 준비시킵니다.
III. 성령님은 누군가를 찾는 질문을 던지신다(아 3:6)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내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 (아 3:6)
A. 이 누군가를 찾는 질문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교리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영적 번역으로 제가 믿기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 이름 없는 사람은 성령입니다. "이 자가 누구인가?"라는 같은 말을 사용해 묻는 질문이 나오는 상황이 세 번 있습니다(아3:6; 6:10; 8:5). 두 번의 경우는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성령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아6:10; 8:5). 그러므로 여기서도 성령이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B. 이 질문을 신부가 하는 것은 아마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가서3:11에서 화자는 "그의" 결혼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부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결혼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성령이 이 이야기를 신부의 입을 통해 딸들에게 알리고 계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C. 성령님은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후에 왕으로(9절) 영원한 성에 들어오는 것을 드러내려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불안감이 아닌 경외와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위엄과 경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의 희생제사에서 쓰이는 같은 맥락의 언어로 예수님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D. 예수님은 이 타락한 시대라는 광야에서 승리로 올라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생활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우리의 길에서 겪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의 분투를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아가서8:5에서 신부는 그녀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옵니다.
E.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천하신 것이 여기서 연기 기둥으로 나타내어져 있습니다(출19:18; 사6:4; 계8:4). 장막의 언어에서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번제의 연기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위로 올라간 것과 같이 하나님의 불 속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이 연기 기둥처럼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계 15:8)
F.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가지 향품으로 향내를 풍기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몰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합니다. 고대에 몰약은 값비싼 장례용 향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몰약으로 둘러 싸여지셨습니다.
G. 유향은 예수님의 향기로운 중보를 말합니다(히7:25). 대제사장이 유향(향이 나는)향로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갔던 것 같이 예수님은 중보로 가득 찬 그의 향로를 가지고 천국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천국의 제단에 있는 향이 담긴 금 대접은 우리의 기도를 말합니다(계5:8; 8:3-5).
H. 상인의 향품은 예수님의 우릴 향한 헌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진주들(그의 신부)을 사기 위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는 상인입니다. 상인은 시장에서 향품을 (사고 팔므로) 취급한 결과로 향내를 풍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모든 것을 팔아 버린 향기 나는 상인입니다.
45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I.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신 예수님이, 얼마나 더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하시려 하겠습니까? 육신으로 오시고 죽으신 것은(6절), 그가 우리의 유익을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광야에서의 이 여정 동안에, 그는 우리 죄와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것에서 자신의 죽음(몰약)과 중보(유향)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매우 헌신되어 있기 때문에(상인의 향품) 우리는 안전지대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습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1-32)
IV. 성령님의 보호하시는 사역(아 3:7-8)
7볼지어다 솔로몬의 가마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명이 둘러쌌는데 8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아 3:7-8)
A.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갖는 보호와 안전이 군사 용어로 묘사된 것을 보고 있습니다.
B. 솔로몬 왕은 아가서에서 왕이신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솔로몬의 침상, 가마(9절)는 그의 궁중 혼인 행렬에 쓰인 수레였습니다. 궁중 호위병의 어깨에 매고 운반되었습니다. 솔로몬의 침상 안에서 그의 신부는 그의 곁에 앉아 안전하게 광야를 통과합니다. 솔로몬의 침상은 광야를 통과해 신부를 수넴(신부가 살던 도시)에서 그의 예루살렘 궁까지 데리고 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궁중 행렬이 다가오며 일으키는 먼지 구름을 봅니다. 칼과 전투 장비를 갖춘 용사들의 행렬을 난생 처음 보는 것입니다.
C. 솔로몬의 가마는 "복음 가마"(gospel couch) 혹은 혼인예식용 수레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 되어져 온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타락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나와 승리로 올라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원수들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로 그의 가마에서 안식하고 계십니다(시110:1-3; 엡1:20-22).
20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엡 1:20-21)
D. 이 가마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으며, 보좌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계3:21).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
E. "복음 가마"는 광야를 통과하는 이 여정에서 안전하도록 우리 마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수레는 왕 옆에 앉은 신부같이 우리가 이 시대의 광야를 통과해 가는 동안 죄와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호위해 갑니다.
F. 솔로몬의 60명의 용사가 그의 가마를 둘러싸 광야를 지나는 동안 적으로부터 그의 신부를 보호했습니다. 영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는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오직 왕만이 전쟁에 익숙한 60명의 숙련된 용사로 충분한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G. 가마를 둘러 싼 용사는 성령님의 지키고, 보호하는 사역을 군사적 언어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솔로몬의 용사는 성령님의 엄청난 보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용맹스런 전사들은 하나님의 엄청나게 값비싼 보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장막 언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 안에는 60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H. 이 용사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스라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오직 돈 때문에 지원했기에 위험이 오면 달아나버리는 용병이나 외국인 군병과 달리, 왕의 전차를 지키기에 충성되고 용감했습니다.
I. 신부는 싸움에 익숙한 용사가 둘러싸고 있는 가마에 앉아있기에 적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적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둘러싼 60명의 용사가 묘사하고 있듯이 우리를 파수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이 여정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J. 이들 용사들은 모두 "칼을 잡고" 있는데, 칼 쓰는데 능숙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이 풋내기가 아니라 경험 많고 노련한 전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잘 때 칼을 벗어놓는 군병과 달리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성실한 용사들로 어둠의 권세나 대적의 공격을 가리키는 밤의 두려움 때문에 언제든지 싸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엡6:12).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아 3:8)
K. 성령님은 사단의 모든 계략을 아는 전쟁에 능하신 분입니다(엡 6:10-12). 그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많은 방법을 사용해 일하십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 예언적인 꿈을 주시거나, 문을 열던지 혹은 닫으시고, 우릴 위해 중보하도록 누군가를 감동하시며, 천사를 보내시고, 우릴 통해 성령의 은사를 풀어놓으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낼 말씀의 계시를 주시거나 혹은 우리를 안전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계시를 주십니다. 그는 열정적으로, 능숙하게, 성실히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L. 그는 우리가 타락하지 않게 혹은 그만두지 않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들을 드리고 성경적 원리의 단순한 울타리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에게 너무 어려워 해결 못하는 죄란 없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유24)
V. 예수님의 사랑의 구원은 우리에게 큰 안전을 가져다 준다(아 3:9-10)
9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는데 10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깔개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구나 (아 3:9-10)
A. 우리의 안전은 아가서 3:9,10의 궁중 혼인 행렬의 언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복음 가마(7절)는 지금 가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가마를 제공하십니다. 솔로몬은 커튼으로 감싸인 이동 가능한 의자를 만들어 궁중 호위병이 운행하게 했습니다.
B. 솔로몬은 그의 여왕을 데려오려 특별히 "자기의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안식할 자기의 가마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사람이 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저 천국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C. 복음 가마는 레바논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장막 안의 나무는 금으로 입혔습니다. 나무는 인성을 말하며, 금은 신성을 가리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데 쓰였습니다. 레바논 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값비싼, 또 가장 강한 나무였습니다. 복음은 이 땅에 살았던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하면서 가장 값비싼 육체로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으로 나아 오셨었습니다.
D. 복음 가마는 은과 금으로 만들어졌었습니다. 은이 의미하는 것은 속량(redemption)이며, 금은 거룩한 성품을 말합니다. 은으로 된 기둥은 보좌를 둘러싼 난간들이었습니다. 가마의 바닥을 이루는 장치는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바닥"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난간"이라는 단어입니다. 가마의 바닥이 금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우리의 보호가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위대한 능력 위에 성립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부는 절대로 이 영광스러운 의자에서 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E. 이 복음 의자는 자색(purple)으로 왕권과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이 우리를 괴롭히려 기회를 찾을 때 복음은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풀어놓습니다.
F. 이 가마(복음) 안에 짜여져 있는 벽걸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 안에 예루살렘 딸들, 즉 연약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이 엮어져 있습니다. 복음의 안 쪽, 즉 내적 사역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장식되어있습니다. 그의 교제 안에서 그 분은 매우 친절하십니다.
G. 복음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영원하신 사랑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에 "사랑이 엮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복음 가마의 안쪽은 하나님의 사랑이 엮어져 둘려 쳐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또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지 성도를 향한 그의 사랑을 통해 실행되어집니다. "내 위의 그의 깃발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 안에 엮어집니다. 이 계시는 우리가 사랑 받는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그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힘을 갖게 함으로 그 사랑 안에서 자라도록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해되어질 때 가장 안전합니다.
H. NKJ에서 예루살렘 딸들에 "의해"("BY" the daughters) 라고 잘못 번역하고 있는 반면에 KJV에서는 "예루살렘 딸들을 위해"("FOR" the daughters of Jerusalem") 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루살렘 딸들에 "의해"("by") 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for") 엮어져 있습니다. 이는 딸들을 위한 예수님의 사랑이지, 예수님을 위한 딸들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VI. 성령님은 모든 교회에 신부의 패러다임을 갖도록 간곡히 권고하신다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의 어머니가 씌운 왕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아 3:11)
A. 우리는 예수님을 왕이신 신랑으로 바라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히12:2; 빌3:8; 사33:17). 우리가 예수님을 그의 혼인 잔칫날 모든 권세로 왕관 쓰신 왕으로 묵상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왕관 쓰신 예수님을 볼 때에, 우리는 이제 산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아2:8-13).
B. 그의 어머니는 교회의 한 그림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어머니이며 형제입니다(마12:46-50). 우리의 영적인 탄생을 위해 그는 교회의 한 지체로써 전도자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언급됩니다.
C. 예수님은 많은 왕관을 가지고 계십니다. 결혼 때 쓰는 왕관은 열방을 정복하고 얻은 왕관과 구별되는 독특한 것입니다. 이 왕관은 눈에 띄게 독특한 관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지만, 기쁨의 또 다른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왕관은 온 역사를 통해 구속받은 자들의 축적된 응답입니다.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우리의 사랑으로 그에게 관 씌우는 무리 중 하나가 되는 것 보다 더 위대한 지위는 없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름부음 안에 살아가는 것에서 우리의 위대함과 지위는 발견되어집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우리의 사랑으로 그에게 관 씌우는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자발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면류관을 그 앞에 던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말해줍니다.
D. "어머니가 그분에게 왕관을 씌우십니다.”우리가 자발적인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왕 되심에 반응할 때, 교회는 그분에게 왕으로서 왕관을 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때,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개인적인 왕이신 신랑으로서 왕관을 씌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다른 것보다도 우리가 더욱 갈망하는 왕관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왕관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 때, 우리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그들의 부르심을 알 때, 그들은 시온의 딸들로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혼의 날은 계시록 19:6-8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그분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드리는 날입니다.
E. 예수님이 다가 올 결혼에 대해 어떻게 느끼실까요? 그분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국가와 정치적인 동맹을 맺기 위한 정략적인 결혼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압적인 결혼식(shotgun wedding)이 아닙니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5)
<출처:선두주자커뮤니케션/IHOP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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