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신부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 예수님의 유업이 됨
A. 신부는 자신의 영적 정체성과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약속하신 유업으로써의 삶의 목적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의무적인 순종 그 이상을 원하십니다. 그는 존경어린 순종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것을 선택하는 영원한 동역자(신부)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B.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애정이 하나님께는 가장 귀한 소유입니다.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시려 죽으셨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애정을 얻게 되십니다.
C. 예수님은 믿는 자 하나 하나를 위해 특별한 계획,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의 계획은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잔칫상에서 즐기는 그 곳으로 데려오려는 것입니다. 즉, 우릴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축하할 곳으로 말입니다. 우리 삶을 이끄는 예수님의 지도력(우리 위에 그의 깃발은)의 가장 주된 목표는 우릴 향하신 사랑이 계시되며,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나누어지는 길(임파테이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사랑을 기념(기억)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아2:1,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아 2:4)
D. 신부는 사랑의 병이 났기에, 그녀의 삶에 예수님의 지도력은 효과적이었습니다. 신부는 예수님의 더 많은 것을 갈망하여 부르짖습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아 2:5)
E. 성령님은 사과나무 아래서 혼인 잔칫상에 앉아 있는 신부를 흔들어 방해하지 말 것을 다른 이들에게 엄하게 부탁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 그녀 삶에서의 갑작스런 계절 변화로, 그녀를 흔들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 2:7)
II. 아가서 2:8-17의 개관
A. 이 구절은 이 여인의 삶에 눈에 띄는 전환의 시작을 나타내줍니다. 아가서 4-8장 전체를 통해 보여지듯이, 그녀의 헌신 그 깊은 곳에서부터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열방을 다스리는 왕으로 자신을 여인에게 계시하십니다(아가서 안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세 번째 계시). 여인은 단지 예수님을 마음을 내려놓고 방향을 제시받는 목자로(아1:7-11) 알고 있었고, 함께 상에 앉아 사랑으로 포도와 사과로 먹이시는 애정 어린 아버지로(아1:12) 알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산들(장애물들)을 가볍게 뛰어넘으실 수 있는 분으로써 예수님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보고 있습니다.
B. 아가서 1:4에서 여인이 기도한 것은 “나를 이끄소서, 우리가 당신을 따라 달려가겠습니다” 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에 영적 위기가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이 지금 “함께 (달려)가”는 단계를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의 두려움을 발견함으로 맞는 두 번째 위기로, 아가서 1:5-7에서 여인은 자신의 죄를 발견함으로 첫 번째 영적 위기를 맞았었습니다.
C. 예수님은 술람미 여인을 안전지대에서 불러내, 예수님과의 깊은 동역 관계를 경험하도록 하려 하십니다. 여인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길 거절하는 데, 예수님에게 그녀 없이 돌아(turn) 가라고 말씀드립니다(아2:17).
D. 그녀 위의 주의 깃발(목적)이 사랑을 계시 하시며 또, 그녀 안에 이 사랑을 나누어 주려하심이라고 했던 술람미 여인의 고백을 주님은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지도력이 선하심을 믿을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하고, 고통을 가져다준다 할지라도 예수님께 100% 순종하는 것이 안전한 것인가?
III. 예수님께서 주권을 가진 왕으로 자신을 신부에게 계시하시다
8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9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성장한 수컷 사슴)과도 같아서 (아 2:8-9a)
A. 술람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받고 있는데, 그는 주권을 가진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열방을 다스리는 주”이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힘들이지 않고 모든 어려운 산들과 높은 지대를 정복하십니다. 예수님을 여러 산을 쉽게 승리로 뛰어넘는 노루와 어린사슴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루와 어린사슴은 무한한 에너지로 쉽게, 빠르게 산을 오를 수가 있습니다.
B. 왕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단의 정사와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엡1:22). 그는 모든 장애물(인간의 그리고 사단의)을 극복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역경이라는 산들에게 옮겨질 것을 명합니다. 산보다 더 작은 언덕들은 우리가 직면한 더 작은 어려움들을 말해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11:23)
C. 스룹바벨은 그 앞에 서있는 역경의 큰 산들에게 은혜를 외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 4:7)
D. 여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전지대로부터 나와 위기라는 위험한 산에 계신 그 분과 함께하도록 예수님이 불러내실 때, 그는 사랑의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신부가 예수님께 얘기할 때마다 그를 “내 사랑하는 자(my Beloved)”라고 부릅니다.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얘기할 때는 그를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the One she loves)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가서에서 신부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의 애정을 드러내시려 “나의 사랑(My love)”이라 부르시고, 신부의 아름다움에 “어여쁜 자(fair one)”라고 부르십니다. “나의 사랑(My love)”이라는 호칭은 아가서에서 22번 사용되었습니다. “(나의)사랑하는 자(Beloved)”라는 호칭도 22번 사용되어졌습니다.
IV. 안전과 보호의 벽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 2:9b)
A. 예수님은 서 계신 것으로, 혹은 행동을 취할 태세로 그려져 있습니다. 보통 성경에서 예수님은 안식으로 앉아계시며, 그의 원수를 발등상 삼은(시110:1) 승리로 앉아계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 주님은 그를 받기 위해 일어나 서셨습니다(행 7:55). 그가 일어나 설 때, 그 때가 바로 권능의 일들이 막 일어나려 할 때인 것입니다.
B. 예수님은 벽 뒤에 서서 술람미 여인이 방해받지 않은 채 앉아 있는 집 안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서 두드리며 서 계신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계3:20).
C. 그녀는 정확하게 “우리” 벽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깨우실 때까지 잔칫상에서 방해받지 않고 머물러 있도록 성령이 위탁하신 것 안에서 이끌려 왔었기에(아2:7) 이는 그녀의 벽이 아니라 그들의 벽인 것입니다.
D. 예수님은 그녀에게 사랑을 구하고자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계십니다. 더 깊은 자신과의 동역 관계로 그녀를 이끌어 가고자 뚫어지게 바라보십니다.
V. 안전지대로부터 불려 나와서 예수님과의 깊은 동반자 관계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0)
A. 예수님은 술람미 여인과의 깊은 동반자 관계로 들어가려 하십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의 안락과 안전으로부터 떠나 이 타락한 세상의 산들을 정복하려 함께 가자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부가 열방을 순종으로 이끄시는 일에 자신과 함께 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B. 예수님은 모든 믿음과 순종의 산을 오를 것을 도전하고 계십니다. 이 높은 지대는 어려운 과제들, 그리고 안전과 안락감을 뒤흔드는 관계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신부는 위기와 산의 높음을 좋아하지 않고 다만 나무 그늘 아래서 예수님과 사과를 먹으며 앉아 있기만을 원합니다(아2:3).
C. 신부는 믿음으로 살 때의 위기상황들과 영적전쟁의 격렬한 전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존 윔버(John Wimber)는 믿음이 “위기 R I S K”로 발음된다고 말했습니다. 믿음(하나님 안에서의 확신)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D. 안락함을 벗어나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안전한가?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100% 순종한다면 잃어버리고 놓치는 삶이 되는 것인가? 예수님과 물 위에 있는 것 대신에, 예수님 없이 배 안에 있는 것이 육신으로는 더 안전하게 보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야 하는, 가장 실질적인 기초가 되는 진리입니다.
E. 그녀가 예수님과의 성숙한 동반자 관계를 경험하려 한다면 일어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안락함 속에서의 기독교 신앙”으로도 여전히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깊은 동반자 관계로 살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가서 2:8-10에서는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우릴 일깨우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을 묘사하는 7가지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오시고, 뛰어 오르시며, 뛰어 넘으시고, 일어서시며, 바라보시고, 주시하시며, 말씀하시는 것 등입니다.
VI. 풍성히 열매 맺음에 대한 예언적 징조들
A. 예수님은 술람미 여인에게 추수(풍성히 열매 맺음)의 때인 것을 계시하심으로 격려하십니다.
11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12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13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13)
B. 그는 추수의 계절이 멀지 않은 것을 계시하는 시간적 징조들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녀가 온전히 신뢰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빨리 배워야만 하는 때인 것입니다.
C. 주님은 과거 겨울 때에 우리에게 신실하셨음을 상기시키십니다. 겨울은 차가운 비로 어둡습니다. 이는 거의 밖으로 자라나오는 것이 없는 어려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해내게 될 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주님은 우리 위의 그의 깃발이 사랑임을 증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여정에서 그가 어떻게 간섭해오셨고, 또 어떻게 신실하셨는지 상기시키십니다. 예수님은 “겨울도 지나고, 차가운 비도 그쳤는데, 너의 마음은 여전히 내 속에 생생히 살아있구나” 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을 기억하도록 도우십니다(아1:4). 이는 아가서의 주된 내용들 중 하나입니다.
D. 만약 예수님이 과거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에게 신실하셨다면, 그는 미래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산을 오를 때 그가 우릴 잊어버리실 것이라는 말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벽 뒤에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E. 예수님은 또한 곧 다가 올 추수에 대한 예언적인 징조를 강조하심으로 미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대추수의 초기 단계를 보며 격려를 받습니다. 이는 추수의 충만한 때가 곧 올 것이라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초기 단계를 보며 긴급히 준비되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우린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F. 예수님은 추수가 예비 되었음을 강조하시어 사도들을 격려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부흥들 후, 3년 안에 예루살렘의 부흥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예수님께 순종하고 완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데 매우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5)
G. 예수님은 추수의 징조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포도 추수가 곧 있음을 나타내주는 꽃들이 가지에 피어나고 있습니다. “부흥의 꽃들”이 열방 전반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H. 반구(호도애라는 새;turtledove)의 소리는 이스라엘에서 추수의 시기에 들려옵니다. 무화과나무의 푸른 열매는 곧 다 익어 성숙한 무화과 열매가 됩니다. 어린 부드러운 포도열매의 향기는 추수의 때가 됐음을 나타내줍니다.
I. 추수의 때를 연상케 하는 ‘노래할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큰 부흥이 임박해있습니다. 기도의 집들이 전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것, 또 군중들이 스타디움에 모여 노래함으로 종일 예배하는 것(국제 기도의 날 Global Day of Prayer, 더 콜 The Call, 등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노래는 이미 시작되어 왔습니다.
J. 예수님은 여인을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아름다운)자야” 라고 부르시며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자신을 거절할 것을 아시지만 그녀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할 때(아1:7-8) 그랬던 것과 같이 여인은 여전히 예수님께 아름답습니다. 우린 우리가 사랑 받고 있으며 그의 눈에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때, 더욱 더 예수님께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그는 무자비한 심판자의 목소리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아름다운)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 2:11-13)
VII.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부드러우신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다
바위 틈(clefts) 낭떠러지(cliff)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sweet)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lovely) (아 2:14)
A. 우리가 두려움으로 분투하고 갈등할 때조차, 주님은 부드러운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시며 그분을 향한 여인의 진실을 확증해 주십니다. 비둘기는 순결과 충성됨을 말해줍니다. 성령은 순결한 비둘기로 그려집니다. 예수님은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그녀 안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가서 2:17에서 그녀가 타협할 것을 아셨음에도, 그분은 여전히 그녀를 “나의 비둘기야”라고 부르셨고, 교활한 뱀이라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B. 우리는 갈라진 틈새(clefts), 그리고 낭떠러지(cliff) 이 두 장소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안전함을 발견합니다. 바위 틈은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신뢰함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우리의 연약함 중에도 하나님 앞에서 확신으로 서있게 됩니다.
C. 예수님은 모세의 시대에 영적인 반석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가 세워진 반석이십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4)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D. 하나님은 반석의 갈라진 틈(산속의 열린 공간)에 모세를 숨기셔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죽임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모세)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출 33:20-22)
E. 반석의 갈라진 틈에 숨기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모형입니다. 반석의 갈라진 틈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받은 옆구리 상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반석의 갈라진 틈, 즉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 안에 숨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합니다.
F.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예수님의 부활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마지막에 하나님께 올라갈 비밀의 장소입니다. 낭떠러지는 야곱의 사다리(창28:12-17)와 같이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서, 올라가도록 되어있습니다.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계단의 은밀한 곳”(KJV) 또는 “가파르고 좁은 길의 은밀한 곳”(NAS)으로 번역되어집니다.
G.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물러서지 않고 반석의 갈라진 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 즉 부활의 신비스러운 장소에 서서 당신을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확신으로 서있게 됩니다.
H. 예수님은 우리 얼굴을 보기 원하시며,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기도와 예배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십니다. 이 과정 중에 우리가 위선자라는 두려움 없이 예수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죄로 분투하고 있을 때 자신의 목소리가 하나님께 혐오스럽고, 그 얼굴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죄로 그에게서 달아나는 대신, 확신으로 그에게 달려오길 원하십니다.
내가 네 얼굴(face)을 보게 하라 네 소리(voice)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sweet)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lovely) (아 2:14)
I.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유혹의 때에 기도하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언하시길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하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두려움과 약한 육신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Watch and pray) 마음에는 원이로되(The spirit indeed is willing)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 26:34,41)
J. 예수님은 그날 밤에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셨음에도, 그의 원하는 마음(his willing spirit)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에게 기도하여라. 나는 너의 목소리 듣기를 원한다. 나는 너를 돕기 원한다.”
K. 주님은 반응하는 마음을 즐거워하십니다. 그는 우리가 성숙하기 전에도 우리로 즐거워하십니다. 예수님이 술람미 여인을 어여쁜 자(아름다운 자)라 부르실 때 그녀는 여전히 나무아래서, 벽 뒤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며 순종하고자 하는 진실한 갈망을 보십니다. 그는 우리의 미성숙한 사랑이 이 여인의 사랑과 같이 성숙해 갈 것을 아십니다(아4:7).
VIII. 타협으로부터 구원하시도록 기도함
A. 여인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자, 그 음성을 듣고자 하는 예수님의 간곡한 권고에 응답해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신 삶에서 타협이라는 작은 여우들을 잡아달라고 예수님의 도움을 간구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 2:15)
B. 여우는 야밤을 틈 타 포도원을 망치는 교활한 동물입니다. 이는 대낮에 공격할 수 있는 강하고 대담한 사자가 아닙니다. 작고, 빠르며, 교활해서 잡기가 힘듭니다.
C. 우리 마음의 포도원에 있는 이 “작은 여우”는 두려움, 죄 된 생각들, 태도, 말들과 적은 부분이라도 지속적으로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것들 같은 우리의 작은 타협들을 말합니다. 이는 말씀을 거역한 것에서가 아니라, “일어나는 것”(to arise)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에서 온 것입니다. (아2:13)
D. 우리의 포도나무는 우리가 갖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여린 포도는 여인의 삶에서의 미성숙함을 말해줍니다. 여인은 아가서 1장6절과는 대조적으로 지금은 자신의 포도원을 지키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우가 그녀의 열매 맺는 삶을 허물고 있습니다.
E. 여인은 하나님 안에서 더 깊이 들어가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애타고 병이 나있기에(아2:5), 자신을 격려하고 마음을 새롭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했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게 뒷걸음질 치도록 하는 이 작은 부분의 심각성을 여인은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F.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원하는 것은 단지 수치스런 죄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포도원이 성숙한 열매로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종 되고 겸손한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정결치 않은 생각과 태도, 불건전한 여러 사건, 기사들에 대한 발언들이 바로 주님과의 친밀함을 허무는 작은 여우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락함에서 나오도록 부르고 계시지만, 작은 여우들이 그녀의 포도원을 허물고 있는 것입니다.
G."우리를 위하여 여우를 잡아 주세요"라고 여인은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스스로는 여우를 잡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 삶 속에 이 작은 여우들(자신의 타협)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지속적인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우릴 돕고자 하십니다.
IX. 그녀는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예수님께 표현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아 2:16)
A. 여인은 자신의 영적인 정체성을 명확히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연인으로써 어떠한 자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연인이 되는 것을 포기치 않으려 할 때, 또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려 할 때 우리는 분투합니다. 우리 얼굴은 하나님께 어떤 경우에도 끊임없이 아름다울 것이며, 예배하는 우리 목소리가 그 분 귀에 거슬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B. 여인은 예수님을 그녀의 사랑하는 자,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로 바라봅니다. "나는 그의 것입니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 마음의 주인이심이 결국은 그녀의 삶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은 여인이 비틀거리며 걷는 중에도 표현됩니다. 여인은 마음의 갈등 때문에 주님께 버려졌다고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희망 없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그녀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나의 것이며 나 또한 당신 것임을 제가 압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녀는 성숙하지 않음에도 진실합니다.
C.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을 먹이시길 여러 번 구합니다(아1:7,12; 2:4,5). 지금은 예수님이 백합화들 가운데 값을 지불해야 하는 장소에서(in a costly place) 그녀를 먹이시고자 합니다. 이는 여인의 순종과 순결의 장소입니다. 백합화는 순결을 말합니다(아2:1,2; 5:3,13; 6:2,3). 그녀는 자신 삶의 목적이 모든 영역에서 백합화의 순결함으로 살며 모든 작은 여우들을 잡는 것임을 인식합니다(아2:1,2).
D. 아가서2:1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에서 백합화가 단수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여인은 주님 안에서의 개인적인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복수로 표현된 백합화들은 예수님을 그녀가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한 무리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회중 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33-34)
X. 고통스러운 타협
A. 여인은 지금 예수님의 명령, 일어나 그와 함께 산에 오르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응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오르기를 거절합니다. 대신, "그녀 없이 돌아 가서 노루같이 산을 뛰어다니라"고 말합니다. 거역이 아닌, 미성숙함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길 거절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아 2:17) 17 Until the day breaks and the shadows flee away, turn, my Beloved, and be like a gazelle or a young stag upon the mountains of Bether. (Song 2:17)
B. 깊은 슬픔으로 예수님이 가셔야만 하고, 2장 8절의 노루같이 되셔야 함을 인정합니다. 아가서의 끝부분에서 여인은 예수님께 다시 노루와 어린 사슴 같으라고 외칩니다(아8:14).
C. 여인은 자신의 마음속 어두운 그늘을 인정합니다. 이는 그녀 삶에서 완전히 빛 가운데 있지 않는 영역들인 것입니다. 새로운 빛이 비추일 때 날이 밝아 옵니다. 어두운 그늘, 즉 그녀 삶의 회색지대가 떠나갈 때인 것입니다.
D. 그녀는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돌아가라고(turn and go), 그래서 새로운 날에 자신에게 새로운 빛을 비춰 달라고 말합니다.
E. 아가서 4:6에서 결국은 순종하여 예수님과 산으로 가기 위해 일어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두려움의 여우를 잡아달라는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라는 동반자로의 값진 헌신으로 예수님과 높은 지대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F. 여인은 그녀의 타협이 자신의 포도원이 허물어지는,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동안(for a season) 돌아 가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뒤로 물러서려 하는 자발적인 결정을 존중하십니다. 우리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자발적인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G. 베데르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분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성경번역은 베데르 대신에 "분리"라고 쓰고 있습니다. 산들은 분리를 가져오는 장애물들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분리의 산"으로 가시면 관계에 분리가 있을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가서 3:1에서 그는 그녀가 회개해 마음을 돌이켜 순종하고자 부르짖을 때까지(아3:2) 그녀를 떠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H. 자신의 연약함이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실패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그를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XI. 성숙의 과정을 알려주는 네 가지 말들
A. 이 노래 전체를 통해, 한 구절이 반복되는 부분이 네 번 나옵니다. 주님은 여인의 삶에 성숙의 과정이 일어나도록 일하시기 때문에, 이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B. 아가서는 여인이 자아 중심적인 데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을 네 가지 말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네 번, 여인은 변화되고 자신의 경험을 재정의합니다. 여인은 단지 자아 중심적인 데서 시작하여 결국 하나님 중심의 성숙함으로 끝나게 됩니다. 아가서 전체를 쭉 보며, 우리는 각 전략적인 장소에서 언급된, 이 네 가지 여인의 말을 통해 그녀의 성숙함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는 그녀의 성숙의 과정을 알려주는 말들입니다. 자아 중심적인 초점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초점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 네 번의 유업에 대한 말들에 나타납니다(아1:14; 2:16; 6:3; 7:10). 시작 단계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만의 즐거움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께 어떤 자인지에 대한 충분한 인식 없이 예수님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2:16과 6:3 그리고 최종적으로 7:10에서 여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예수님에게 자신이 어떤 자인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 위해 순서를 변경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유업입니다.
C. 그녀의 맨 처음의 초점은 오직 자신의 영적인 즐거움에 있습니다. 시작 단계로서 이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예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그녀의 초점은 오직 자신이 사랑 받고 예수님 안에서 유업을 갖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그녀는 자신 안의 예수님의 유업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 (아 1:13-14) My Beloved is to me...(1:13-14)
D. 두 번째로 갖게 된 초점에서는 "그는 나의 것이고, 그는 나에게 속했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 그에게 속했다는 것을 이제 깨닫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지금 새로운 차원의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더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유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함을 이제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단계에서 이것은 두 번째로 중요한 관심일 뿐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 (아 2:16)
My Beloved is mine and I am His.(2:16)
E. 세 번째 맞춘 초점에서는 2:16에서와 같은 단어로 말하지만, 순서를 바꿉니다. 그녀는 "나는 그에게 속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여전히 나의 것임을 계속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속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나의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세 번째 진행은 같은 두 가지 진리를 말하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생각이 먼저이고, 나의 생각이 두 번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 관심의 우선순위를 뒤집은 것입니다. 자신 안의 예수님 유업은 이제 그녀의 마음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예수님 안의 자신의 유업은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으나, 두 번째 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 (아 6:3)
I am my Beloved's and He is mine.(6:3)
F. 네 번째 초점이자 최종적 초점에서 "나는 그에게 속했고, 예수님이 갈망하시는 것에만 내가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이 갈망하시는 것이 바로 나라는 그 사실은, 내가 100% 그의 것이 되고 싶도록 만듭니다. 그는 나를 완전히 소유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사가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그것입니다" 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 7:10)
I am my Beloved's and His desire is toward me. (7:10)
<출처:선두주자커뮤니케션/IHOP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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