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왕상8:13)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때로 신앙생활 중에 이런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때문에 갈등하며 곤란을 느낀다.
예수님께 허락을 구한 사람은 제자였다.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 젊은 제자에게는 중요한 결정에 직면해 있던 상황이었다. 자기 부친이 작고할 때까지 집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자기 스승 예수를 따라가면서 그를 섬기기 위해 그의 가정과 가족을 떠나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생각컨대 그 청년의 부친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얼마나 더 연명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가족 중 어디에 우선권을 두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청년이 기꺼이 제자의 길을 가려는 마음도 아셨다. 그래서 그는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무슨 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급한 더 중요할 수 없다는 교훈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이 교훈은 문자적으로 또 아무에게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사상 장례식은 부활의 소망을 더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엄수했던 것이다.
구약의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전데 부모에게 작별하였다(왕상 19:20,21).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과 이 상황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청년의 남은 가족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죽은 자들인가? 그들은 주 예수를 믿는 신자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아직 영적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오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여전히 죽은 상태였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you were dead)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허물로 죽은(dead)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들의 영적 관계에서 볼 때 그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은 죽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친의 필요를 공급해 주며 최후의 장례에 대한 책임을 지기에 적합한 처지에 있었다.
지금도 우리들의 가족과 주변에는 영적으로 죽은(dead) 사람들이 많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에게 임함으로 그들이 다시 태어나는(born again)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resurrection)이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한 11:25). 그분은 살리는 영이시다. (큐티일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