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2011

유월절의 믿음으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영원히 분리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무슨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피가 그들로 생명을 얻게 했습니다. 만약 어린양의 피가 아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애굽 사람들처럼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실상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과 똑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유월절을 맞으시며 “내가 고난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말씀하십니다. “원하고 원하였다”는 것은 정말로 간절히 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어떤 태도로 유월절 신앙을 간직해야 할까요?

첫째,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이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6절) 즉 열흘에 취하여 십사일까지 간직합니다. 이 나흘의 기간은 어떤 기간일까요? 잡힌 양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양이 왜 죽으며, 이 양이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어떤 혜택이 오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나의 생명이 되고, 이 보혈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 해야 합니다.

둘째,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7절) 묵상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주장을 해야 합니다. 어둠의 권세를 향하여 이 피로 인해 내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주장해야 합니다. 원수는 날마다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이 피를 주장해야 이길 수 있습니다.

셋째, ‘연합하라’고 하십니다.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8∼9절) 먹으라고 하십니다. 먹는다는 것은 어린양이 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입니다. 주장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내 삶 속에 예수의 향기와 흔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넷째, ‘과격한 단절을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그것을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11절) 도망갈 준비를 다 하고서 급히 먹어야 합니다. 애굽과 분리되되 급하게, 과격하게 분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삶과 단절을 선포하되 과격하게 단절해야 합니다. 법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 단절이 일어나야 합니다. 부끄러운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유월절 신앙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서 떠나면 하나님 백성은 맛을 잃어가기 때문입니다. 분주한 이때에 우리가 다시금 유월절 신앙,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이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되어야 하겠습니다.(박지웅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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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2011

두가지 부끄러움

자기 연약함을 모른채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만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참담함만을 아는 자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Blaise Pascal

우리가 범죄하거나 실수를 했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 부끄러움들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도 합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십자가이며 부끄러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25:3) 

♣집중력을 강화하는 법♣

#1. 추상적인 목표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다.
#2. 목표 달성을 위한 마감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기한다.
#3. 상황에 관계없이 늘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4. '잘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의 힘을 활용한다.
#5. 생각과 동시에 입버릇처럼 반복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 간다.

#6.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주 웃는다.
#7.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디어와 힌트가 잘 떠오른다.
#8. 기회가 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9. '이번에 모든 것을 건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놀라운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10. 뚜렷한 테마나 문제의식을 갖고 생활한다.

#11. 집중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휴식을 중간 중간에 취한다.
#12. 하루 종일 일하는 것보다는 며칠에 나누어서 일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13. '이 부분만 한다' 혹은 '이 시간까지만 한다'는 식으로 범위와 시간을 정한다.
#14. 조금 빠른 속도로 걷는다.
#15. 러닝 머신이 아니라 밖에서 걷는다. 사람이나 풍경 등이 풍부한 자극을 준다.

#16. 피곤하면 잠시라도 휴식을 취한다.
#17. 지나친 공복은 금물이다. 뇌는 하루 120그램의 포도당을 필요로 한다.
#18. 콜레스테롤은 집중력에 중요한 요소이다.
#19.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시작함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알린다.
#20. 하체가 튼튼해야 집중력이 생겨난다.

-출처, 나카지마 다카시, <3초간 집중력 단련법>

기도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4: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베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복을 빌고 그 복을 받은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즐겨해야 합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힘이 됨을 알기에 우리도 늘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사도행전 12장을 통해 우리는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일었을 때, 헤롯왕이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베드로와 야고보를 잡아들이고 야고보를 처형했습니다. 아울러 베드로도 처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초대교회 교인들은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5절) 그리고 이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과정은 굉장히 놀라왔습니다.

베드로는 철저한 감시 가운데 갇혀 있었고 심지어 쇠사슬에 묶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역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당시 그리스도인들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대단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이에 격분해서 파수꾼들에게 분풀이하고 죽였습니다.(19절) 그 이후 헤롯은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떠났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였습니다. 어쩌면 당시 초대 교회 교인들은 기도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 앞에서 언제나 힘을 다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기도는 보통이 아닌 일입니다.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 기도를 게을리 하게 될까요? 우선, 기도응답을 받는 특별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 그런 것은 기도응답의 전제가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아울러 기도를 단순한 형식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게을리 합니다. 기도는 형식과 격식을 갖추는 것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가정과 자녀를 축복하고 알고 지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듣고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지쳐서 기도할 수 없을 때 다른 누군가가 우릴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또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언제나 기도하며 나가며, 또한 기도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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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2011

♥힘든 삶에서 항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비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3:17-19/참고:벧후1:3-4))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18: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1:3-4)

주님 함께하시면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상황에 관계없이 항상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깨어있게 하시고 주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

♣ 집중력을 강화하는 법♣

#1. 추상적인 목표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다.
#2. 목표 달성을 위한 마감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기한다.
#3. 상황에 관계없이 늘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한다.
#4. '잘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의 힘을 활용한다.
#5. 생각과 동시에 입버릇처럼 반복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 간다.

#6.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주 웃는다.
#7.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디어와 힌트가 잘 떠오른다.
#8. 기회가 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9. '이번에 모든 것을 건다'는 생각으로 임하면 놀라운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10. 뚜렷한 테마나 문제의식을 갖고 생활한다.

#11. 집중력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휴식을 중간 중간에 취한다.
#12. 하루 종일 일하는 것보다는 며칠에 나누어서 일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13. '이 부분만 한다' 혹은 '이 시간까지만 한다'는 식으로 범위와 시간을 정한다.
#14. 조금 빠른 속도로 걷는다.
#15. 러닝 머신이 아니라 밖에서 걷는다. 사람이나 풍경 등이 풍부한 자극을 준다.

#16. 피곤하면 잠시라도 휴식을 취한다.
#17. 지나친 공복은 금물이다. 뇌는 하루 120그램의 포도당을 필요로 한다.
#18. 콜레스테롤은 집중력에 중요한 요소이다.
#19.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시작함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알린다.
#20. 하체가 튼튼해야 집중력이 생겨난다.

-출처, 나카지마 다카시, <3초간 집중력 단련법>

삶의 길잡이가 되는 말

1. 참된 우정은 건강과 같다.
즉,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우정의 참된 가치를 절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2. 이야기는 말해지는 동안, 결코 사실보다 작아지지 않는다.
이야기는 되풀이하면 커지는 법이다.

3.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4. 슬픔 속의 위안이며, 불행 속의 희망이고, 나약함 속의 힘,
사랑과 자비, 동정과 용서의 뿌리 어머니이다.

5. 숫자를 셀 때 우리는 늘 하나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은 늘 0부터 시작한다.
6. 실력이 떨어지면 남보다 더한 노력으로 이를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7. 가장 중요한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8. 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꿈이 많고...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픈 추억이 많고..
    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순수하고...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이 모든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9. 갈 곳이 있다면 그것은 집이다.
사랑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이다.
둘 다 있으면 그것은 축복이다.
10. 말은 있으나 행동이 없는 자는 잡초가 가득한 정원과 같다

어떻게 말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을까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9:37~38)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을까요? 구원받은 자로서 자기 만족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증거케하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말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말로 다른 지체들을 축복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 공손하게 대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왜 공손하게 대해야 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가치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이렇게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 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공손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비를 베풀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자비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실수할 때 그것을 용납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셋째, 여러분이 동정심을 나타낼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어렵게 만든 사람이라 할 지라도 또,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라도 그 누구에게라도 동정심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넷째, 진실하게 말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합니다.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해야 하는 데 몇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칭찬은 공개적으로, 고쳐주는 것은 개인적으로 해야 합니다.
둘째, 상대가 기분 좋을 때 고쳐주십시오. 기분나쁠 때는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고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 상대방을 살리고 축복하는 것이 됩니다.
셋째, 기대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격려하고 기대치를 가지고 말할 때도 네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독특함을 칭찬하십시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이 세상에 가치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 번째, 도전을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그들의 능력을 격려하십시오. 무엇보다도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주셨습니다. 우리만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축복하며 살아가도록 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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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2011

♣ 아름다운 친구이고 싶습니다 ♣

보고 싶다고 말하면 더 보고 싶어 질까 봐 그저 살짝 미소만 짓습니다. 그리워 한다 한들 마음 뿐이기에 줄 것이 없습니다. 두 마음 함께 함에 감사할 뿐 입니다. 느낌만으로도 만나니 사랑하는 마음에 행복이라 이르내요.

사랑은 꿈과 같고 현실은 삶의 텃밭이라 시공간을 초월 할 수 없으니 당신에게 그저 행복한 미소를 보냅니다. 늘 당신이 있어 내 삶이 향기롭고 늘 새로운 마음이지요.

현실이란 벽에 그저 이슬 처럼 맑은 그리움 하나 품고 살아 아름다운 마음으로 글을 쓰고 기도하며 서로에게 기쁨이고저 그런 무지개 다리 건너는 인연 하나로 한 마음 닿으렵니다. 당신과 소중한 존재로 느끼고 의지하며 존중하고 그리움이 있어도 너무 많이 그리워 아파하는 마음은 아니기를 두손 모읍니다.

그저 소중히 바라 보며 아껴 주는 아름다운 친구이고 싶습니다. 마음에 생각들은 열매로 맺혀져서 당신를 기쁘게 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서만 사랑할수 있기에 그저 조용히 미소 짓습니다 당신 생각에.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는 1% 의 힘

사람들은 관심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만 집중한다. 예를 들면, 부모가 아이에게 쏟는 관심이 아이에겐 지나친 간섭으로 느껴질 수 있고,  사랑하는 연인과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연인에겐 구속으로 느껴질 수 있다. 상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관심이나 자기가 마음 내킬 때만 주는 이기적인 관심, 이런 것들은 모두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은 '차가운 관심' 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와 같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친절과 배려, 사랑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관심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관심은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심은 나의 기준이나 잣대를 버리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1. 그 사람을 존중하라.
2. 먼저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라.
3.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라.
4. '그 사람' 자체에 감사하라.
5. 그 사람을 자세히 관찰하라.
6.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라.
7. 그 사람을 격려하라.

하루에 단 30초만 소중한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 사람을 지켜보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든, 그 사람을 생각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단 30초만 그 사람에게 관심을 쏟아보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의 관심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배려로 표현될 것이며, 그것은 감사의 마음을 넘어 더 큰 감동으로 세상에 확산될 것이다.<하우석의 "뜨거운 관심" 중에서..>

♥가정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

저녁이면 생존경쟁의 전쟁터에서 상처나고 스트레스 받은 지친 모습으로 가정에 돌아옵니다.
가정은 에너지 재생산의 공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종합병원 이어야 합니다.

바깥에서 받은 상처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의사가 되어 서로를 치유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많이 안다는 이유로.....
무심코 던지는 말들로 큰 상처를 만들곤 합니다.
가정은 상처를 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치유가 있어야 됩니다.
나는 오늘 훌륭한 의사의 역활을 했는지되돌아 봅니다.

-좋은글 중에서 -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어찌도 그리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세상의 사람은 너무 많고 내 자신의 재량은 너무나 작기에 그들 반을 만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인연, 혹은 필연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스치는 것이 사람이기에 그 만남이 소중한지를 잊곤 합니다.
그 사람과 자신이 만나게 됨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 사람이 곁에 없다면 생각해 보세요. 쉽지 않은 만남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싶어집니다. 손수 만든 작은 선물을 그에게 주고 싶어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고도 싶어집니다. 또한 그 사람을 위해서 나의 것을 포기하고도 싶어집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어떤 이가 너무나 미워지면 하루 정도 혼자 지내보세요. 자기 방에 콕 들어 앉아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세요. 사람이 큰 잘못을 하는 건 어렵지만 그동안 당신은 그 사람에게 작은 잘못들을 무수히 하고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자세히 알게 되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생각지도 못한 때 건네받게 되는 자그마한 선물에도 생각지도 못한 때 전화벨이 울리고 "네가 생각나서..." 그 한마디에도 그가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때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되면, 그 사람과의 만남을 감사히 여기게 되고
하루하루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 때가 없을 것이며 때론 그 사람을 미워할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눈물 흘릴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세요. 그 사람과 나 자신의 마음이 같아 서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보다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조금만 참고 기다리세요. 그리고 믿어 보세요. 사랑은 이뤄질 때보다 바랄 때가 더 행복하고 이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 전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네요.

12/22/2011

주의 피로 이룬 샘물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마25:21)

데이비드 홉킨스는 그의 연구를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원동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기운이 빠지게 하는 것,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을 쭉 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수치심, 무기력증, 슬픔, 두려움 등이라고 합니다.
홉킨스는 이렇게 힘이 빠질 때에 다시금 회복할 수 있기 위해서 제3자의 도움, 즉 격려와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3자의 에너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영적 자존감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소개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나름의 열등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존감의 회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건강하고 바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한 여인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바로 만났을 때에 어떤 회복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유대로 가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피해서 돌아가는 것과 달리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셨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목적을 가지고 사마리아를 경유하여 지나가기로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여인은 모두가 낮잠을 자거나 쉬는 시간에 홀로 등장하여 물을 길러 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물가에 다른 여자들은 없고 이 사마리아 여자 혼자뿐이었을까요. 매일 쓸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당시 여자들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여자들은 아침저녁으로 물이 차가울 때 물을 길었습니다. 그때 서로 교재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더운 한낮에 혼자 물을 긷기 위해 나왔다는 사실은 그녀가 따돌림을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 하실 때에, 이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느냐고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혈통적 열등감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열등감을 갖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고 그분을 만나갈수록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만날 때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등감이 회복될 때 이 여인에게 나타난 현상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배의 회복입니다.
둘째는 전도의 회복입니다.
예배에 대한 갈망과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여인이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와 보라”고 외치는 회복의 역사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주님을 만날 때에 바로 영생하는 샘물을 마실 때에 이러한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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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2011

믿음으로 말한 사람 아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24:46)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

본문은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기에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받으시는 것과 받지 않는 예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보여준 아벨을 통해 우리의 예배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는 구속사적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예배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예배는 올려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것이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크고 놀라운 복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아벨의 믿음의 예배를 이해하려면 창세기 3장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범죄 후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렸고 8절 말씀처럼 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나뭇잎 치마 대신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에게 의미를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고 아벨은 이 제사야말로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라는 것을 믿고 드린 반면, 가인은 들었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예배했기에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가장 귀한 것으로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받으셨습니다.
아벨의 제물의 특징을 보면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처음의 것을 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처음’은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의 것은 소중한 것이고 마음에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3장에서 처음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의 것은 제물을 드리는 의미를 넘어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느냐가 하나님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에 전심으로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삶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가인 즉, 그들의 삶을 함께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시간은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예배는 예배 시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림으로 하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신자는 율법을 폐기하지 않습니다(롬7:1-13

은혜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은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하며 율법 폐기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율법을 이제 폐기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과거에도 그랬듯 여전히 선하고 거룩합니다.

율법은 몽학 생(갈3:24)이 되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더욱 성령을 의지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합니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실은 죄가 문제였습니다. 계명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였지만, 죄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계명으로 나에게 역사한 것입니다.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죄였지, 결코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폐기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더러운 죄의 세력과 싸워 이기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선한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 합니다(롬7:1-13)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율법에 순종하는 것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생각하여 율법에 속박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결혼의 비유에서 보듯이 신자는 율법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은혜로 재혼한 여인과 같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 재혼했기에 합법적인 것입니다

죽은 남편은 여자에게 아무런 구속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사람이 됨으로 율법의 얽매인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과거 율법의 권세아래 매여 살 때는 열매를 맺기보다 죄의 정욕이 역사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 후에는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삽니다. 겉으로 보면 순종은 같지만 사랑에 의하여 순종하는 곳에는 열매가 맺히고, 두려움에 의하여 순종하는 곳에는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당신은 율법을 어떤 자세로 순종하십니까
은혜 때문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까
참 자유인은 방종하는 자가 아니라 은혜 안에서 율법을 사랑하며 성취하는 사람입니다. 

12/20/2011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

"과거의 위인들에게 가장 잊지 못할 풍요의 자리가 어디였던가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은 `내가 엎드렸던 차가운 바닥' 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모리아의 번제단을 가리키리라.
요셉에게 물어보라. 차가운 감옥을 가리키리라.
모세에게 물어보라. 생사의 고비를 넘긴 나일강을 가리키리라.
룻에게 물어보라. 허리가 아프도록 이삭을 줍던 밭에 자기의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다윗에게 물어보라. 그의 노래는 밤에 지어졌다고 할 것이다.
욥에게 물어보라. 하나님이 폭풍우 가운데서 응답하셨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에게 물어보라. 그는 바다에서 순종을 배웠다고 하리라.
요한에게 물어보라. 그는 밧모섬에 승리의 면류관을 던지리라.
바울에게 물어보라. 그는 자기의 눈을 멀게 한 빛에서 영감을 보았다고
할 것이다.
한 사람 더 예수에게 물어보라. 그 분은 대답하리라.
겟세마네 동산 차가운 땅바닥에서 왕권을 받았노라고,

내 영혼아, 그대도 겟세마네에서 화환을 얻으라.
그 쓴 잔을 마심이 면류관이 되리라.
그대의 외로운 시간이 왕관으로 바뀌리라.
절망스런 날들이 기쁨이 될 것이요.
사막이 변하여 노래하며, 조용한 삼림의 나무들이 손뼉치리라."

- 스코틀랜드의 죠지 마티슨(George Martheson) -

신뢰.믿음의 가치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오늘날 신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나 말고 누구를 믿는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시대 속에 ‘무엇을 신뢰하라’, ‘무엇을 의지하라’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시대적으로 ‘절대 진리는 없다’ 하고, 목회자와 교회 등의 실수로 인해 그분만이 신뢰의 대상이라는 말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실망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는 명예와 부와 많은 것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입니다. 즉,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실망하고 부족함이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쫓아가보면 결국 실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른 무엇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뢰하고 따라가면 그것에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 또는 다른 가치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걸까요?
첫째,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둘째,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닌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너무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너무 하나님을 두렵게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늘 야단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신뢰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만이 항상 진실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항상 영원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원칙들은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도 바뀌거나 변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님의 마음조차도 변하는 이때에 그분 말씀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사람도 부모라면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은 그 부모가 너희를 버릴지라도 버리지 않고 사랑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기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건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자녀 누가 지키겠습니까?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세상 사람들 중 의지할 대상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키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항상 능력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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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2011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34:14)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과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진정으로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길을 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깊이 있게 묵상해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선 내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십자가를 바라보며 거기에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믿음과 함께 십자가를 통해 나 자신의 가치와 영적인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무엇보다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한없는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십자가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게 하며 큰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아울러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천국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귀한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우리가 기독교 교리적으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또한 내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지위가 나를 존귀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의 현재 상태가 어떻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더 나아가 그런 믿음이 커질수록 나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3:10).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알았던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19)고 말합니다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믿음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을 통해 바울이 깨달은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또한 아무리 율법을 온전히 지켜도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율법에 대한 이러한 절망이 바울을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했습니다곧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였습니다그 은혜를 발견했을 때 바울은 용서를 알았고 구원을 보았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의존하기를 포기했습니다이런 점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 삶이 내 뜻과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진정한 감사와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매일 매일순간순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더욱 깊이 묵상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기뻐하고 신뢰함

바울은 불의한 벨릭스 때문에 2년이나 넘게 가이사랴에 억울하게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2년간의 시간이 전혀 의미없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자유롭게 다니며, 왕성하게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새롭게 부임해 온 총독 베스도는 신속한 재판 진행(1절), 로마 총독으로서 합리적인 법 집행 의지(4, 5절) 등으로 바울에게 새로운 희망을 던져 주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베스도 역시 얼마가지 못해 노련하고 약삭빠른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추진함으로 바울의 형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사실 이런 기다림의 상황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의 생명을 살기등등한 유대인들로부터 안전하게 지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소아시아 어느 지역도 바울의 생명을 담보해줄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총독으로 하여금 2년 넘게 바울을 지키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삶의 속도 뿐아니라 안전도 책임져 주셨던 것입니다. 짧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바울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기뻐하고 신뢰함으로 전진하며 돌파할 수 있길 바랍니다.

개인적 유익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함.
바울은 베스도 총독을 향해 자신이 결코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로마시민으로서 로마의 최고 법정인 가이사의 법정에서 공정한 심판을 받게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살기등등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가이사랴에 머물며 지루한 공방을 하는 것보다는 비록 죄수의 몸이고 자유는 없다 할지라도 로마 군인들의 안전한 호송을 받아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 나라에 유익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개인적 유익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고민하는 바울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앞에서 낙심하여 좌절하지 말고, 이 상황 속에서 주님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일에 전력투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상황이 열리게 되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대신에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도 적용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5절).
그 결과 신자는 사망의 주장을 다시는 받지 아니하고, 사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과 연합하여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죽은 자로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죄에 대해 살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던 옛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지체의 용도는 완전히 바뀌었고, 지체의 사용 목적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죄가 왕 노릇 하도록 지체를 내어주었고, 몸의 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지체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왕 노릇 하도록 우리의 지체를 내어드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롬6:1-14) .

일용할 양식   기독대학인회(ESF) 제공

[믿는 자는 지체를 죄에게 주지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온 인류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할 때, 그의 죄도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받기 전의 세상 사람처럼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신자는 아직 세상에 거하면서 완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로 성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죄를 짓는 생활은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죄와 타협하며 적극적으로 죄를 따르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또한 이제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죄짓고자 하는 생각과 끊임 없이 싸워야 하고, 죄 짓고 싶어 하는 지체를 매 순간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않는 생활입니다. 성도는 죄가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에 철저히 불순종해야 합니다.(롬6:1-14)

12/17/2011

다시한번 세워야 할 기독교적 가치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2:16)



2008년 기윤실에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가치는 어떠한가?’에 대한 연구보고서가 나왔습니다. 한국교회 신뢰도를 조사해봤더니 신뢰한다가 18.4%이고, 신뢰하지 않는다가 48.3%였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모습과 비교하면 받은 성적표가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말씀으로 함께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사회의 기독교적 가치기준들이 약해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적 요소로 첫째, 개인주의가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편하게 생각하고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속주의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특히 매체의 영향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삶의 판단 근거로 정보를 어디에서 얻느냐고 물을 때에 대다수의 사람이 TV를 통해 얻는다고 합니다. TV가 흥미는 있을 수 있지만 진정성으로 본다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드라마를 보며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본다면 너무나 허무맹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 지내는 내용, 기독교에 대한 비판 등을 매체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노제, 49제에 대해 별 불편함 없는 것도 그런 것일 겁니다. 


셋째는 상대주의입니다. 상대주의는 나도 옳다면 너도 옳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시각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면 너희들은 너무 독선적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너희들도 다른 종교들처럼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기독교내에서도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들이 약해져가는 내적인 우리의 문제를 살펴보면 첫째는 진리에서 무너져가는 가정입니다. 집안에서 예수님을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그분의 행적을 가르쳐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할 예배시간이 TV시청으로 대치되고, 성경을 읽어야 할 시간이 신문을 읽는 시간으로 대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주일예배를 지키도록 가르치며, 자녀들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며, 저들에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이 세 가지 삶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 없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영향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진정한 신앙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잘못 나아가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시편 11편 3절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고 말씀합니다. 무너져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너진 터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행하지 못하던 것을 다시 행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집안의 신, 가문의 신으로 전락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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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2011

부활

사도행전 22 : 30 ~ 23 : 11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당시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결정한 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패하였고 신학적으로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공회 앞에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부활 
사도 바울은 공회가 신학적인 입장이 서로 다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것을 알고“나는 바리새인이요 또한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의 문제로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고 설교했습니다. 곧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 중에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고 죽은 자의 부활, 천사와 마귀 등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부활의 메시지는 공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으며 급기야 바리새인 편에서의 몇 서기관이 사도 바울의 무죄를 주장하자 더 격렬한 논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천부장은 사도 바울을 격리하여 보호하였습니다. 공회 앞에 섰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결정했던 공회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고 공회를 일순간 혼란에 빠뜨려서 공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위험과 고난에 처했던 사도 바울은 그날 밤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고 로마 복음화를 통한 세계선교라는 비전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전해야 할 변개할 수 없는 기독교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개인의 필요에 대한 약속 : 구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11:7)

둘째 아이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신 이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6:33) 는 말씀은 제게 레마로 다가온 것을 떠나 엄청난 도전의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아이만 제대로 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기도를 드렸고기도대로 응답을 받아 큰 감사를 드리며 살기 원했는데그런 제게 한미은행과의 합병은 한편으로는 도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살겠다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해외로 나가기 전 직장 신우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게 한미은행과의 합병 이후 알게 된 직장선교회 모임은 큰 기쁨이었으며그 예배 모임에 대한 기다림으로 일주일을 지낼 수 있을 만큼의 큰 즐거움이었습니다그 때 까지 살면서 서로 만날 이유도 없고 만날 기회도 없었던 많은 분들을 예수님 안에서 만나고 연결되면서성령께서 레마로 주셨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대한 실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큰 조직과 합쳐졌으니 그 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Daily Bread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이제 막 직장선교회에 참석하여 알게 된 23명에게 111일 처음으로 발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Daily Bread를 발송하면서 성령께서 주신 생각은 한국씨티은행 전체 직원의 10%(십일조)에게 발송하라는 큰 꿈을 주셨습니다당시 직원수가 대략 6,000명 정도였고제 기도 목표는 600명의 직원들한테 Daily Bread를 발송할 수 있도록 복음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처럼”(4:18), 매일 밤 Daily Bread를 발송하면서 600명의 직원이 출근하자 마자 Daily Bread를 읽고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며 기도했습니다.

사람이 하려면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초월한 강권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뜻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어느 새 600명의 독자가 생기게 되었고 더욱 감사한 것은 그 분들이 또 다른 친구나 친지를 소개시켜주셔서 불과 2년이 안되어1,000여명이 넘게 되었고 6년이 되는 지금까지 2,568페이지에 이르는 말씀을 전하게 하셨으니 그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81:10)
하나님은 부지런히 우리의 입을 크게 열라고 하십니다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여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말씀하십니다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분은 예수님 이시지만돌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나사로를 살려서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입고 있던 수의를 풀어주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의 기도로 시작된 Daily Bread가 지금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신데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여 주시고 또 이끌어 주셨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또한 뒤에서 기도로 동역해 주신 많은 분들의 합동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이 사역을 하라고 시키실 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저를 도구삼으셨을 뿐 Daily Bread 문서사역의 작가와 연출자는 모두 성령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하라고 하시는 날 까지 그저 따라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인격적으로 보잘 것 없고 부족하고 모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켜주셔서 만 6년 동안 말씀을 나누게 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와 존귀를 드립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게하여 주소서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 살게하여 주시고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와 축복에 아주 조금이라도 보답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Daily Bread를 받아 읽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마음 문을 여셔서 뿌려진 말씀의 씨앗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소서저들 개인과 저들의 가정과 자녀와 저들이 하는 모든 범사가 주님 안에서 다 형통하게 축복하여 주시고무엇보다도 건강에 건강을 더하셔서 천국가는 그 날 까지 주님을 찬양하며 오직 감사하며 살게하여 주소서.

지난 6년을 한결 같이 지켜주신 성령 하나님 감사드리며예수님 귀하신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아멘


남의 칭찬을 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

1.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 기도하고불행한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 기도한다.

2.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한 소리 또하고, 또하고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3.남의 칭찬을 자주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자기자랑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4.일을 보람으로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의무로 아는 사람은 불행하다.
5.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사람은 행복하고,투덜대는 사람은 불행하다.

6.평생고마웠던 일만 마음에 두는 사람은 행복하고섭섭했던 일만 마음에 담는 사람은 불행하다. 

7.남이 잘되는 것을 축복하고 위로 하는 사람은 행복하고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실패하면 통쾌해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8.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은 행복하고말로 보여주는 사람은 불행하다.

9.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부드러운 사람은 행복하고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가혹한 사람은 불행하다.  

10.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사람은 행복하고불평으로 먹는 사람은 불행하다.

11.마음까지 화장하는 사람은 행복하고얼굴만 화장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12.자신의 잘못을 곧바로 인정하는 사람은 행복하고잘못했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

13.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고개를 숙이고 걷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14.누구에게나 배우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자신이 만물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15.잘된 이유를 찾는 사람은 행복하고안될 이유만 찾는 사람은 불행하다.
16.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17.아는 것이 적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행복하고,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18.해야 할일이 많음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고그것을 불만으로 여기는 사람은 불행하다.

19.겸손과 양보가 몸에 밴사람은 행복하고교만과 거만이 몸에 밴사람은 불행하다.
20.목소리가 힘차고 생기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기어 들어가는 사람은 불행하다.

12/15/2011

그리스도인의 자긍심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1:1~3)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어깨를 펴고 다니고 여유가 넘치고 자신감이 있으며 늘 당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다니거나 좋은 자동차를 타거나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뭔가 드러낼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에 따라 어깨를 펴기도 하고 움츠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에 당당하게 살았던 인물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았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긍심은 어떻게 삶에서 드러나며 어떻게 훈련돼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봅시다.

첫째는 고난이 올 줄 알고도 믿음의 자리를 선택하는 당당함을 가져야 합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 말씀을 보면 다니엘은 그의 위험을 알고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긍심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 속에 고난이 올 줄 알고도, 때로는 눈물이 흐를 수 있어도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삶에 때로는 손해가 오고 때로는 고난이 다가오지만 그래도 결국 일으키시고 살리실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베푸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길 소망합니다.


둘째로 이러한 자긍심은 영적 파레토의 법칙을 따라 살 때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파레토의 법칙은 기업의 20%의 핵심 제품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거나, 카드회사의 20%의 핵심고객이 80%의 매출을 올려준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성도의 20%가 교회의 80%의 사역을 감당한다거나, 한국교회 성도 80%가 20%의 교회에 속해 있다거나, 헌금의 80%는 20%의 성도가 드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파레토의 법칙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파레토의 법칙은 예배에 실패하면 믿음에도 생활에도 실패한다는 말과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 주일과 공예배를 통해 드려지는 예배가 한 주간의 삶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새벽에 기도로 시작하는 그 시간이 그날 하루를 움직입니다. 이런 영적 파레토의 법칙으로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은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삶의 능력에 있다는 의미입니다(고전 4:19∼20).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고, 음악가는 음악으로 말하고, 스승은 제자로 말한다고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그분의 능력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이 속한 곳이 역사와 능력을 가질 때에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임을 기억해야 하고(빌 3:1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며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당당하게 살며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영혼 구원의 기회입니다(행전2:14-21)

피와 불과 연기,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과 같은 자연의 대변동 역시 마지막 시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러한 자연의 대변동들이 의미하는 바는 주의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인자가 오실 때의 징조를 말씀하시면 이미 경고하셨습니다(24:29).

그리고 사도 요한도 계시록에서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을 통해 일관되게 주의 날이 가까울 때에 인간을 포함한 자연 환경에 큰 재난들이 있을 것임을 거듭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경고의 말씀 그대로 지금 자연적 격변과 정치 경제적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안의 시대를 통해 주님께서 구원받는 백성이 더 많아지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궁극적 구원은 오직 주님께만 있음을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아우성치는 수많은 마게도냐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한 사람이라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 힘써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영혼 구원의 비전을 뜨겁게 품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권적으로 그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도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의 충만을 통해 온전하게 세워진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성령 공동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힘든 중에도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하면서 기다리며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함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여쭙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합니다. 하루 중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정해놓고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분주한 척 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과 교제하려는 시간이야말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역사입니다.  

12/14/2011

준엄한 심판

사도행전 22 : 30 ~ 23 : 11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당시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결정한 기관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패하였고 신학적으로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공회 앞에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타의에 의해 공회 앞에 서게 되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결정했던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목하여 보며 “형제들아 오늘날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며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치라고 명한 아나니아를 향하여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며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교회사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부패하고 탐욕으로 가득했으며 폭력적인 자였습니다. 율법은 먼저 시시비비를 가리고 후에 벌을 주어야 했습니다(신 25:1~2).

그런데 그는 사도 바울을 죄도 정하지 않고 먼저 치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자의 후안무치입니다. 아나니아가 제사장인 것을 미처 알지를 못했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부패한 자, 율법을 어긴 자를 향하여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준엄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장애가 되는 35가지

1. 마음이 얽매여 있는 상태.
2. 자기중심적인 마음.
3. 여유가 없다.
4.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어서 생각이 마음을 빼앗을 때.
5. 끝도 없는 자질구레한 용무에 쫓기고 있을 때.

6. 피로, 생활이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7. 초조할 때, 외적 압박을 받을 때.
8. 자제심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마음이 어떤 한계에 와 있을 때.
9. 인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10. 사회적 원인 (물질적 풍요, 편리함,) 능률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때

11.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릴 때.
12. 기도에 대한 지도가 결핍되어 있을 때.
13. 의욕을 잃고 타성적이 되어 있을 때.
14. 현상유지에 머물러 향상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
15. 추상화된 개념 세계에 살고 있을 때, 또는 분석에만 치우쳐 있을 때.

16. 머리로만 기도하여 마음이 메말라 있을 때.
17. 세속적 쾌락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을 때.
18. 그럭저럭 이 정도로 좋을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을 때.
19. 자신이 지쳐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언제나 분주한 기분으로 있을 때.
20. 어떠한 자극에 대하여 만성이 되어  있을 때.

21. 목적의식의 결여.
22. 현실에서 도피해 있을 때.
23. 올바르지 못한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24. 형식주의적인 생활.
25. 과신, 교만, 마음이 둔해 있을 때.

26.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인간관계로 고민하고 있을 때.
27. 기도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지 않을 때.
28. 기도를 할 수 있는 고요함과 개인적인 공간이 없을 때.
29. 기도에서 오는 기쁨을 실감하지 못할 때.
30. 기도에 대한 갈망이 부족할 때.

31. 사람들과의 불화, 비판,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32. 자기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 체험에 눈뜨지 못할 때.
33.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의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때.
34. 마음이 닫혀 있을 때.
35. 기도의 준비가 부족할 때.

- 발췌 / 케노시스 영성원 -

요한의 뒤에 오시는 분의 세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8:34)



세례 요한은 아주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도 분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특징은 첫째, 그의 메시지는 체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둘째,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의 관계도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간증을 보면 늘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 15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 고백인데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선재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먼저 계신 분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 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충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헬라어로 보면 차고 넘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컵에 물을 더 부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는 아무리 퍼내도 고갈되지 않는 샘이 바로 충만의 개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엇이 충만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그분의 능력, 그분의 지혜,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7절에서는 ‘주어졌다’‘왔다’는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주어졌다는 말은 누구누구를 통해 온 것으로 율법은 모세로부터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주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는 온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온 것의 의미는 예수님 자체가 은혜라는 말씀이고, 예수님 자체가 구원이며 우리의 전부라는 설명인 것입니다.


18절은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의 능력에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19절에 나오는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스스로 그려갑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믿을 때에 실족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어야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성경대로 오셔서, 성경대로 사시고, 성경대로 가신 후, 성경대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다시금 예수님에 대해 재확인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내가 믿는 예수님에 대한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는 예수님에 그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

12/13/2011

[나이로 살기보다는 생각으로 살아라]

99℃사랑이 아닌 100℃사랑으로 살아라.
속담에『밥은 봄처럼, 국은 여름처럼, 장은 가을처럼, 술은 겨울처럼』이란 말이 있다. 모든 음식에는 적정 온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에도 온도가 있다. 사랑의 온도는 100℃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99℃에서 멈춰 버린다.

기왕 사랑하려면 사랑이 끓어오르는 그 시간까지 사랑하여라. 계란후라이가 아닌 생명으로 살아라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생명(병아리)으로 부활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 밖에 안 된다. 더군다나 뱀은 그 허물을 벗지 않 으면 죽는다고 하지 않은가? 남이 너를 깨뜨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비참한 일 이다. 관습의 틀을 벗고, 고정관념을 깨뜨려, 매일 새롭게 태어나라.

돼지로 살기보다는 해바라기로 살아라. 돼지는 하늘을 쳐다보지 못한다. 넘어져야 비로소 하늘을 쳐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 해바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흐린 빛도 찾아내 그 쪽을 향하는데 있다.

나이로 살기보다 생각으로 살아라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 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생각의 게으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일이다. 나이로 보다 생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아라 생리적 나이는 어쩔 수 없겠지만, 정신적 나이, 신 체적 나이는 29살에 고정해 살아라.

인상파로 보다 스마일맨으로 살아라. 잘 생긴 사람은 가만있어도 잘 나 보인다. 그 러나 못생긴 사람은 가만있는 것만으로도 인상파로 보이기 십상이다. 너는 '살아 있는 미소'로 누군가에 기쁨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라.<자료:창골산봉서방>  

죽기를 각오함으로...

사도행전 22 : 22 ~ 29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담대하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강력한 반발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돌파하였습니까?

죽기를 각오함으로... 
사도 바울은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음을 언급하며 설교하였습니다. 이방인의 문제를 터치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였습니다. 이방인의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사도직, 소명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누군)가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누구)을 위해 죽기로 각오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목적, 가치관 등을 보여줍니다. 주를 위하여 죽음도 불사하는 헌신이 있었기에 그는 유대인들이 꺼리는 이방인 선교도, 배신자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 동족을 향한 섬김도, 강력한 힘을 가진 로마 군인들에 의한 체포와 구금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닥쳐옵니다. 위기가 없는 곳만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바울처럼 닥쳐오는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찾고 도전하며 돌파합니다.

로마 시민권을 주장함으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했던 천부장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강력하게 반발을 하고 소동을 부리자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사도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포악한 로마 군인들에 의해 고문을 당할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며 위기를 돌파하였습니다. 천부장은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자신의 결정을 인하여 두려워하였습니다. 위기를 당할 때에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드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지혜롭게 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선교의 현장에서 순교를 각오한 과감한 선교도 필요하지만 순교가 아닌 순교적 헌신을 지속적으로 지혜롭게 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교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교회의 선교열기에 찬물을 붓고, 안티기독교의 불길에는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된다면 결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국내외 선교의 현장에는 무모함보다는 비상한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안주의 자리에서 약속의 땅으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90:16)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을 살리고 그 백성을 출애굽 시키며 이끌었던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모세는 무엇이 달랐고, 어떤 믿음을 가져서 그 시대에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첫째, 모세의 믿음을 견고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히11:27절).
우리는 항상 말씀보다는 내가 편한 쪽으로 삶이 움직이게 되고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모세는 편안한 자리에서 단호하게 떠나게 됩니다. 27절은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떠났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단호하게 떠났다는 것입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잡힐 때 그 꼬리를 떼버린 채 달아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떠났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으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말씀을 의지했기에 환경은 좋지 않았지만 떠날 수 있었습니다(출 3:10, 12, 21∼22, 6:8). 우리 역시 단호하게 떠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성령을 통하여 말씀이 들리는 것을 말합니다(요 14:26).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확신 못하는 이유는 무일까요? 첫째는 성경을 너무 안 읽어서이고, 둘째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지 않아서이며, 셋째는 말씀을 암송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단호하게 떠나려고 하면 세상은 타협으로 나옵니다. 사단은 물질에 있어서도 타협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모든 영적 타협의 협상에서 떠났던 것입니다.

둘째, 모세의 믿음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나의 치부나 나의 단점을 아는 사람에게는 두렵고 말이 잘 안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두려움보다 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세처럼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영적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함께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모세와 같이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시 118:8∼9).

셋째, 모세의 믿음은 구원의 길을 순종하면서 받아들인 믿음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때 많은 불평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붙드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4장 13절은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은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후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얼마 동안’ 떠나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험과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동안 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불평하지 않고 순종하며 구원의 길을 모세와 같이 걷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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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011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습니다(롬3:21-31)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 함’ 받을 길은 철저히 봉쇄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할 사형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형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마음씨 좋은 하나님이 아무런 근거 없이 그렇게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벌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고 우리도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서는 것은 우리의 수고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하며, 우리의 열심, 우리의 헌신과 수고는 십자가 뒤에 가려져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죽을 죄인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해 준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상 끝 날까지 사랑하며, 의지하며, 자랑하는 순전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율법이나 할례 같은 어떤 형식이나 행위도 불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27절).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으로서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온 천하에 천명하는 것입니다(29절).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윤리적 기준이 되어 그들로 말미암아 율법이 더욱 굳게 세워져야 합니다(31절). 이제는 믿음 외에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고 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했다면,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영혼에 안연한 평강을 영원히 허락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터진 예수님의 보혈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쇠하지도 않습니다. 그 보혈로 나아가 믿는 자는 누구든지 차별 없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하고, 율법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매일선교소식

12/08/2011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4)



엘리에 비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으로써 그 악명 높은 독일 나치 정권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겪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기록했는데 그 중의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많은 유태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을 교수형에 처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교수대의 밧줄이 내려와 목에 감기자 나이가 많은 노인은 곧바로 숨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은 쉽게 죽지 않고 밧줄에 목이 달린 채 20여분 이상 발버둥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수용소의 유태인들이 여기저기서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하나님은 정녕 우리를 버리셨고 떠나셨단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엘리에 비젤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저 교수대에 매달린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있고, 저 소년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당하고 있다.”
비젤은 이때의 감동을 평생 가슴에 품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십니다. 고통과 눈물, 아픔과 탄식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십니다. 그리고 오셔서 건지시고 복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희망 업그레이드 / 서순석(생명의 삶 2002년 1월3일)>



<믿음은 결단이다/오벧에돔[왕하2:1~25]>

<믿음은 결단이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가 그 아비의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음이라. 아멘! 이 새벽에도 여호람의 삶을 통해 교훈하심을 감사합니다.
악도 행하고 우상도 제하고 하는 모습속에 옳은 믿음에 결단을 하지 못하는 여호람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갈때 믿음에 옳은 결단을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천국에 상급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이 되게 믿음에 옳은 결단을 매 순간 순간 잘 선택하며살아가게 하옵소서.

보이는 세상에 안목에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에 자랑을 버리며 날마다 살아가는 매 삶에 철저하게 믿음에 결단을 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스데반집사님은 순교할때 주님이 보좌에서 일어나 직접 맞이하는 모습을 우리는 늘 기억하며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법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3)



마리아는 너무나 평범했고 천사 앞에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볼 때 너무나 평범해 보이고 과거에 부족한 부분들, 잘못된 모습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충분히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평범했던 마리아,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무엇이 달라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을까요? 천사가 나타나 소녀에게 너는 이 세상을 구원할 예수를 갖게 된다고 말한 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비난에 대한 두려움, 초자연적인 사건이 임했던 것에 대한 두려움,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자기 삶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리아와 같지는 않더라도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려면 어떠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민감해지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인 감성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우리 안에서 참 평안함이 나오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 28절을 보면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무리 크다 해도 기쁨으로 평안함 가운데 감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떠나가시면 두려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민감하며, 하나님의 임재가 민감하게 경험되도록 개발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자신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상황에서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38절)라고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순종의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고 희생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했던 것이며 마리아의 믿음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음을 즐기십시오.
이것은 예배를 즐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직업과 맡겨진 일들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즐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즉 예배를 즐기는 것입니다. 예배를 누릴 줄 알아야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에서 56절까지에 마리아가 즐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장면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시는 것입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54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험에 대한 약관을 읽고 알 때에 든든해지는 것처럼 성경을 읽고 풍성하게 깨달을 때에 우리도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 안에서 평범하지만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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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011

사랑의 형태, 사랑의 구분

사랑의 형태
(1) 아가페(agape,하나님의 사랑)-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사랑
      (요21:15,16;롬5:5;고전13:1-13;골1:8;요일4:7-11)
(2) 스톨게(storge,혈족간의 사랑)- 자기 핏줄만 사랑하는 경향이 있음(엡5:25;딛2:4)
(3) 필레오(pilleo,친구간의 사랑)- 계산적, 타산적 요소가 있음(삼하1:26;욥19:19;애1:2).
(4) 에로스(eros,이성간의 사랑)- 마음에 드는 이성만을 사랑함(아5:8).
(5) 에피튜미아(세상의 사랑)- 세상에 있는 것을 구하는 욕심(딤후3:2-6;요일2:15-17).

사랑의 구분
(1)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신 일에 의해(요3:16), 또는 죄인인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롬5:8),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해진 것입니다.(호2:16,20;요3:16;롬5:8).

(2)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많이 사함받은 자일수록, 많이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눅7:36-50;신6:5;마22:34-40;롬12:1).

(3)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가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이 명해졌습니다. 이 이웃 사랑에는 적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눅6:27;요일4:21;요15:12-17;갈5:13;살전4:9).

이 관계를 잘 나타낸 것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屬性), 성품(性品)

하나님의 속성(屬性)
하나님에게만 유일하게 적용되는 성질을 말한다.
(1) 자존성(시115:3;출3:14)
(2) 불변성(약1:17;히6:17)
(3) 완전성(시17:30,19:7)
(4) 영원성(느9:5;벧후1:11)
(5) 전지성(대상28:9;요2:25)
(6) 전능성(사9:6;고후6:8)

하나님의 성품(性品)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가지는 공유적인 성품들은 구원의 확신과 동시에 하나님을 닮아 가는 성도가 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1) 사랑(요일4:7,8,16;고후13:11)
(2) 거룩함(벧전1:16;레11:44)
(3) 의로움(롬3:26;출9:27)
(4) 진실함(롬15:8;시146:6)
(5) 선하심(눅10:18;시34:8).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잘못된 칭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품을 드러낸 칭호의 사례에도 비교 용어는 없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느8;6)
만군의 하나님(삼하5;10;왕상19:10,14;시80:4,19,84:8;호12:15;암4:13,5:14-16,6:8)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딤전6:13)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엡3:9)
생존하시는 하나님(시42:2)
영생하시는 하나님(창21:33)
영원하신 하나님(신33:27;사40;28;롬16;26)
전능하신 하나님(창28:3,43:14;사9;6,겔10;5),
지존하신 하나님(시78:35,78:56)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14:22)
진리의 하나님(시31;5)

바람직한 칭호를 제안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드러내고자 할 때 : "사랑의 하나님"
2)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을 드러내고자 할 때 :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 참고로 자료(신학적으로 부족한 예시 자료일 뿐입니다).

12/05/2011

그때 갑자기 내 마음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중국에 온지 6년이 되던 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올 수 없는 중국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선교지로 학교 사역에 대한 비전을 품게 하셨다. 나는 우리의 새로운 비전을 잘 나타낼 이름을 짖고 싶었다. 이름을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단미션'(Dawn Mission)이라는 이름을 인도해가셨다.

'Dawn'이란 새벽이라는 뜻이다. 청소년이야말로 미래 하나님나라의 인재(人材)이고,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새롭고 신선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 믿음이 심길 때 그들의 삶에 새벽 여명(黎明) 이 밝아올 것이다. 이런 의미를 담아 나는 우리 청소년 사역을 '단미션'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잠시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거처를 옮겨 단미션 사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꼭 짓겠다고 선포는 했지만,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사람을 찾아다녀 봐도 별 소득이 없었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내고 있던 중, 12월 초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깼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뒤척거리며 하나님께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이게 뭡니까? 저를 망신시키려고 작정하셨습니까"

그때 갑자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네 믿음을 보여라. 믿음을..."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계속 반복해 입술로 되뇌었다. "네 믿음을 보여라. 네 믿음을 보여라."

........대책없이 학교를 짓겠다고 선포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마치 거대한 폭포 사이의 외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그 폭포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가슴을 졸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러다 떨얼질 텐데."

그렇지만 그들은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고 계시므로 나는 폭포 아래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나를 붙잡고 계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실을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보였던 학교를 세우면서 직접 경험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神)인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하나님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다.
<네인생을주님께걸어라중에서...>

하나님, 믿음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뒷걸음질치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힘찬 한걸음을 내디디며 이 땅을 살아가겠습니다.

피흘리기까지 거짓과 싸우세요![엡4:25]

성령의 은혜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행해야 할 실천사항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와 감격뿐 아니라 삶으로 처절하게 성화를 향해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거짓을 버리기 위해 자신부터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9,10)

거룩한 입술로 없는 말을 지어내고 과장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거짓을 말하지 마세요! 왜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은데 사회는 전혀 정직해지지 않을까요?
거짓을 버리라는 진리는 행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요8:44)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거짓은 항상 창권합니다. 살다보면 거짓의 아비가 장악하는 세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거짓된 말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마음이 괴롭고 불편한 게 정상이지 않습니까?
죄 앞에서 피흘리기까지 싸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

거짓을 버리기 위해 공동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엡4:25)

선량하고 아름다운 섬김으로 주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적극적인 모습이 나타나길 원합니다.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슥8:16)

정직하게 살려는 몸부림으로 내 이웃에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역에서 누릴 수 있는 향기가 나누어지길 원합니다.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왕상3:6)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부터라도 정직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12/04/2011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람[엡4:13-16]

예수 믿게 된 것은 신앙의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하나 주어졌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의 삶'을 사는 영적인 성장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무엇이 성숙한 사람이냐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14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엡4:14)
성령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함을 내려놓고 전체를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성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성숙한 성도일까요?

유횩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람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잘 속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미숙할수록 더욱 잘 속습니다. 주의를 요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어린 아이처럼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을 사시고 모든 초점이 그분에게만 맞춰지길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을 든든히 세우사"(행20:32)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성경 말씀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또한 강단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목회자를 신뢰하는 관계로 성장하게를 원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약4:31)

왜 겨자씨에 천국을 비유했을까요?
우리의 과거가 보잘 것 없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기 작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라는 그 가능성을 보신 것입니다.
우리는 작게 시작했지만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향해,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모든 면에서 성숙하기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고상한 목표를 가진 사람.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만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 포만감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빌3:12)

이 세상의 법칙은 높은 목표를 삼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놀라운 영적인 법칙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 삼을 때, 그 과정 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기도가 깊어 질수록...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상처를 들고 주님앞에 기도하다보면 점점 절실하게 와 닿는것은 주님이 받으신 상처를 보게 됩니다. 극심한 고독을 가지고 주님앞에 내놓고 기도한다 보면 주님도 이 땅위에 사는동안 고독 하셨음을 보게됩니다.
살면서 받은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리며 슬픔에 젖어 주님앞에 기도 하다보면 주님의 슬픔을 만나게됩니다.

기도의 무릎으로 나아가기 전에는 자신의 어떠함을 붙잡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러나 기도로 더 깊이 주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자신의 기분 보다는 주님의 어떠함을 만지고 위로받고 치유받고 회복 되는것을 느낍니다. 점점 기도가 깊어지면 이제는 주님으로 충만한 영혼이 됩니다.

그에게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환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찬 비바람이 휘몰아치는것 같다가도 조용한 바다위를 걸으시는 주님만 보입니다.

기도 없는 사람은 자기가 움직이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으로 움직입니다.
예수로 말하고 예수로 생각하고 예수를 표현하게 됩니다.

자기의 기쁨은 없어지고 자기의 슬픔도 없어지며 자기의 원한도 없어지고 자기의 행복도 없이 오직 예수의 상처, 예수의 소원, 예수의 심장, 예수의 슬픔으로 예수님을 가득하게 채움 받아 이 세상을 능력있게 살게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글에서]

위대한 화가 빈센트 고흐 이야기

네덜란드 출신인 어떤 사람이 런던에서 그림을 파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전도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생애를 드리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헌신하였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전도도 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사역했던 교회에서는 그의 서투른 설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비판을 가했다.
비판적인 영성으로 충만했던 이 교회는 이 젊은이를 세워주지 못했다.
그는 결국 거기서 좌절하고 다른 사람의 권유에 따라 다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거의 신앙을 잃어버릴 뻔한 위기였지만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그 사람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Gogh, Vincent van)이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가 그에 대해 이런 흥미로운 기록을 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열정과 창의력을 보면 그가 만약 전도자로 헌신했더라도 세계에서 위대한 설교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인류는 위대한 화가를 얻었지만 위대한 설교가는 잃었다."

믿음으로 건넌 사람과 믿음 없이 죽은 사람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눅13:18~19)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앞날이 보이지 않는 이 시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답을 보여줍니다.

첫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는 궁지에 몰리고 힘겹고 어려울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누가 어려움에 처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기 때문에 불평하던 그들에게 오히려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13절) 모세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뛰어나고 출중하던 자들도 쓰임 받지 못했지만, 노인이었던 모세, 건장한 사울과 비교되던 막둥이 다윗 등 그들은 연약하고 부족해 보였지만 말씀에 붙들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기억하다는 말이 250번이나 나오고, 그중 70회 정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보는 말씀은 로고스이지만 그 말씀이 내 삶에 들어와 나의 말씀이 되는 레마가 되어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고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좋지 않은 기억이 가장 오래간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은 믿음을 행동으로 옮길 때 일어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믿습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믿음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5∼16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차근차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꺼번에 만들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약속을 따라 행동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요즘같이 막히고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고 나아가는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