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유대인 학살 사건의 끔찍함이 드러났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이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수백년간 존재했던 미움과 학대의 절정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으며, 더우기 기독신학마저 이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학살 사건의 끔찍함이 드러났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났다. 이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수백년간 존재했던 미움과 학대의 절정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으며, 더우기 기독신학마저 이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중세이후로 독일 여러 도시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처참히 살해되어 온것에 대해 기독교인이요 독일인으로서 나는 침통해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마리아 자매회의 설립자 바질레아 슈링크 수녀는 그의 책 "내 백성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기 때문이다 (슥2:8)"라고 기록하고 있다.
1. 어떻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는가
초대성도들은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예수님 안에서 가로막고 있는 담이 허물어져 하나가 되었으며 한분 목자 아래 하나의 양떼들이었다. 그러나 점차 기독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자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의 숫자는 적어졌고, 점차 비기독교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이 삐뚤어져, 같은 하나님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으로, 심지어는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율법과 선지자들, 우리주 예수님을 받은 셈이니 겸손한 사랑으로 유대인들을 대해야 했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나무의 가지이며, 나무의 뿌리가 되는 유대인들이 우리를 보전하는 것이지, 접붙인바 된 우리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닌즉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 겸손한 형제애로부터 이탈하여 자기영광을 구하며, 이스라엘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들을 빼앗고 이스라엘을 구속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1.1 기독교신학과 이스라엘의 고유권리
초대교회에서 최초로 우월감이 고개를 들어 유대인들의 고유권리를 박탈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특히 130년경 시리아에서 바나바서가 발견되고 많은 교회에서 이것을 신약성경에 포함시기키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 서신서는 온통 적유대적 논쟁으로 가득차있으며, 유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전면부인하고, 구약을 오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그림자로 보며,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약속을 기독교인들과의 약속으로 해석, 유대인들은 영원히 이 약속을 잃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동일 또는 유사한 주장들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70-107년)의 편지들에서도 발견되는데, 교회가 새이스라엘이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콘스탄틴 대제는 심지어 이스라엘 땅이 더이상 유대족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에 속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거기에서 이미 15, 18세기에 무섭게 번지고 오늘날에까지도 많은 피해를 주고 있는 "상속권박탈론"의 싹이 틔인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70년)과 바콕바 봉기(132-135년) 이후 유대인의 신앙은 쇠하지 않고 도리어 힘과 영향이 넘치게 되었다.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경쟁적 관계에 서게 되었으며, 교회는 유대인교를 경계하게 되었다.
전세를 역전하기 위하여 기독교 교리는 비유대적 예수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아브라함의 믿음, 심지어는 아담에게 주어진 약속을 왜곡시켜 교회가 이스라엘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으며, 실제로 "영원한 이스라엘" (Tertullian)이라는 희안한 증거를 내놓기 시작했다. 이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라는 것은 수백년이 흐른 뒤 제3 제국에서 보여주었다.
초기 기독교에서 유대인들은 이미 "살신죄"를 쓰고 있었다. 마태복음 20:18-19 그리고 사도행전 4:26-28절에서 이미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만이 그 책임을 지며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너희는 공의로우신 주님에 대한 미움에 있어서 패역의 극치에 이르렀고 그를 죽였도다" (순교자 Justin, 100-165년). Hippolyt 과 Origenes 등 3세기 기독교 신학은 이를 심도있게 다루었으며 4세기의 기독교 사상도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반" 기독교 신자들이 계속 유대인들과 접촉을 갖고 심지어 유대인회당예배에도 참석하는 반면, 교회지도자들은 자기 신자들을 잃을 것에 대한 염려로 온갖 언어로 그들을 폭행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조장시켰다.
Augustinus (354-430년)는 이중 자세를 취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바울의 입장에 동의하는 한편, 배신자 유다가 유대민족의 거울이라는 당시 교회지도자들의 의견에도 동조했다. 그의 "반 유대 논문"에서 그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불법과 우리의 정의를 위한 증인"으로서만 살 가치가 있다, 그들은 가인과 같이 이마에 표를 달고 있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되며, 그들이 우리 가운데 살도록 하되 고난 받고 천시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고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해야한다는 이론은 후에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고, 결국 학살에 이르게까지 하였다.
안디옥의 기독교회를 헬레니즘의 사회종교적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Chrysostomos (344-407년)은 유대인들에 대한 극단적 언어구사를 하는 달변가로 등장하였다. 유대인들의 운명은 "살신자"의 결과라는 확신으로 개발한 그의 신학은 극단적 결론을 이끈다. "이 범죄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향상도 없으며, 용서도, 변명도 없다. 하나님은 너희를 미워하신다"
유대인 역사가 Heinrich Graetz는 "유대인을 미워하는 이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후에 왕들과 폭도들, 관리, 승려, 십자군, 목자들에게 유대인들을 향해 무장을 하도록 했고 고문도구들을 발명하거나, 화형용 장작더미들을 모으게 했다라고 기술한다. 유대인들을 핍박하거나 고문 또는 죽이는 자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자로 여겼다.
1.2 돕는자들을 돕는 국가
4세기 Konstantin 대제하에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자, 교회는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회당들은 제제를 당하시 시작했다. Justinian I. (483-565) 대제 하에서는 그동안 유대인들의 종교생활과 시민권을 보호하고 있던 많은 법들이 폐지되어, 소수민족 유대인들은 최하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7세기 비 잔틴 대제 Heraklius 는 정치적 이류로 유대인들에게 강제세례를 도입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단일성을 도모하고자 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를 흉내내기 시작했으며 그후 몇 세기동안 대혼돈의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백성에 대한 기독교의 죄
2. 중세시대
중세시대에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인해 반유대 기독교 국가에 끔찍한 결과들이 초래하게 되었다.
2.1 십자군
1096년 십자군 전쟁의 발발과 함께 유럽의 유대인들에 있어서 전무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십자군 설교자들은 각 나라에서 "성전"을 일으킬 것과 "하나님의 적"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것을 선동했다. 독일에서는 특히 라인란트 지역에서 일어났다. 기사, 승려, 농부들이 도적떼와 같이 일어나 살인, 강도, 강제세례 등을 일삼으며 유대소수민족을 덮쳤다. 수많은 십자군들이 그 땅을 떠나기 전 적어도 한사람의 유대인을 칼로 베어 죽여 그 피로 제사드리는 것을 자랑삼았다. 유대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이며, 면죄부의 효력이 있다고 믿었다.
1096년 5월-7월 십자군이 Speyer, Worms, Mainz, Koeln, Trier 등을 지나가는 동안만 12000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독일과 북부프랑스의 유대인 인구중에서 첫 십자군 행진간 1/4 내지 1/3 이 살해되었다.
1099년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들을 격렬하게 학살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과 복수의 단행자들이라고 자랑했다. 그들은 칼을 모면한 모든 유대인들을 회당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산채로 태워죽였다. 살인과 강도질을 마친 후 그들은 얼굴과 손을 씻은 후 옷을 깨끗이 다리고 맨발로 피바다를 지나 무덤교회를 향했다. 눈물과 찬송 속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운 그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2.2 영원한 종살이의 저주
첫 2회의 십자군행진 동안 독일내 유대인들이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을시 당초 보호를 약속했던 것과 달리 "왕정 노비"들로 만들었으며, 이 일종의 특권을 위해 그들은 거금의 돈을 바쳐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왕정 노비들은 국가수입에 있어서 큰 출처가 됨이 알려졌으며, 주인의 소유물로서 매매 및 대여되어 빚 값는 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점차 흔히 있는 일이 되어버렸으며, 이웃 나라들에도 이것이 관습화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못막은 죄로 영원한 종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옛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왕정노비제도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유대인 격하의 또 한가지 면은 대부분의 직업에서 유대인들이 격리되고, 수공업조합이 기독교인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로써 유대인들은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남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에게 경멸받던 대금업자 같은 직업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금업자로서 유대인들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오히려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이 되었다. 심지어 성당, 교회들이 유대인들의 돈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이 경제이익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이 가진 돈이 다 떨어졌다싶으면 주인에게서 쫓겨나고, 경제적 위기상황이 오면 재차 다시 불러들이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대금업자로서 유대인들은 서민들에게서도 미움을 받았다. 예를 들어 흉작후 농민들의 빚이 커지면 커질수록 유대인들은 위험에 처했다. 표방적으로 내새웠던 종교적 열심 뒤에는 그러한 단순한 물질적 동기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대학살 뒤에는 늘 "고리대금업자" 집들에 보관되어있는 채무서류 제거작업이 뒤따랐다. <...중략...> 유대인들이 장소를 이동하고자 할 때는 해당 기독교영주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보호를 요청해야했다. <...중략...> 농지나 포도원밭들은 유대인들이 구입할 수 없었는데, 아무도 그들의 소유권을 보장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자놀이를 하는 대금업밖에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미움을 샀던 것이다.
2.3 모욕과 수치
Bernhard von Clairvaux (1090-1153) 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반대했으나, 그들이 하나님 대신 악마를 아버지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그도 요한복음 8:44 말씀을 앞뒤문맥에서 떼어내어 모든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킨 당시 신학자들과 뜻을 같이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3세기경 Cyprian에게서도 유사한 이론을 발견하며, 루터도 유대인들을 "살아있는 악마"라고 지칭했다. 수백년 후 Julius Streicher는 이 이론을 이어받아 악마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민족을 소멸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4 속죄양
수많은 비인간적 대우 외에도 유대인들은 악의가 가득한 책임이 전가되었다. 세상의 모든 재난과 재해에 대해 그들은 책임을 져야했다. 우물독성, 성찬병모독, 살인의식 등에 대한 유대인들의 혐의는 널리 퍼져있었다. 당치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없이 그들에게 책임을 씌우는 일들이 점점 빈번해졌다. 심지어는 1021년 성 금요일에 발생했던 지진과 그에 따른 폭풍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책임을 져야했으며, 교황 Benedict VIII.는 이에 유대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1348년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돌았을 때에도 늘 그랬듯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멸하기 위해서 우물에 독을 탔다는 주장이다. 프랑스에서 이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며, 스위스, 벨기에, 스페인, 폴란드, 오스트리아에 들어왔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독일 외에 그 어떤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더 철저하고 처참하게 제거된 곳은 없다. Karl IV. 대제가 자기의 왕궁노비들은 머리카락도 건들지 말라는 금지령을 낸 것도 소용없었다.
Augustinus (354-430년)는 이중 자세를 취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바울의 입장에 동의하는 한편, 배신자 유다가 유대민족의 거울이라는 당시 교회지도자들의 의견에도 동조했다. 그의 "반 유대 논문"에서 그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불법과 우리의 정의를 위한 증인"으로서만 살 가치가 있다, 그들은 가인과 같이 이마에 표를 달고 있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되며, 그들이 우리 가운데 살도록 하되 고난 받고 천시당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고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해야한다는 이론은 후에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고, 결국 학살에 이르게까지 하였다.
안디옥의 기독교회를 헬레니즘의 사회종교적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Chrysostomos (344-407년)은 유대인들에 대한 극단적 언어구사를 하는 달변가로 등장하였다. 유대인들의 운명은 "살신자"의 결과라는 확신으로 개발한 그의 신학은 극단적 결론을 이끈다. "이 범죄로 말미암아 너희들에게 있어서 아무런 향상도 없으며, 용서도, 변명도 없다. 하나님은 너희를 미워하신다"
유대인 역사가 Heinrich Graetz는 "유대인을 미워하는 이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후에 왕들과 폭도들, 관리, 승려, 십자군, 목자들에게 유대인들을 향해 무장을 하도록 했고 고문도구들을 발명하거나, 화형용 장작더미들을 모으게 했다라고 기술한다. 유대인들을 핍박하거나 고문 또는 죽이는 자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자로 여겼다.
1.2 돕는자들을 돕는 국가
4세기 Konstantin 대제하에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되자, 교회는 입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회당들은 제제를 당하시 시작했다. Justinian I. (483-565) 대제 하에서는 그동안 유대인들의 종교생활과 시민권을 보호하고 있던 많은 법들이 폐지되어, 소수민족 유대인들은 최하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7세기 비 잔틴 대제 Heraklius 는 정치적 이류로 유대인들에게 강제세례를 도입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단일성을 도모하고자 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를 흉내내기 시작했으며 그후 몇 세기동안 대혼돈의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백성에 대한 기독교의 죄
2. 중세시대
중세시대에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으로 인해 반유대 기독교 국가에 끔찍한 결과들이 초래하게 되었다.
2.1 십자군
1096년 십자군 전쟁의 발발과 함께 유럽의 유대인들에 있어서 전무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십자군 설교자들은 각 나라에서 "성전"을 일으킬 것과 "하나님의 적" 유대인들을 몰살시킬 것을 선동했다. 독일에서는 특히 라인란트 지역에서 일어났다. 기사, 승려, 농부들이 도적떼와 같이 일어나 살인, 강도, 강제세례 등을 일삼으며 유대소수민족을 덮쳤다. 수많은 십자군들이 그 땅을 떠나기 전 적어도 한사람의 유대인을 칼로 베어 죽여 그 피로 제사드리는 것을 자랑삼았다. 유대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이며, 면죄부의 효력이 있다고 믿었다.
1096년 5월-7월 십자군이 Speyer, Worms, Mainz, Koeln, Trier 등을 지나가는 동안만 12000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독일과 북부프랑스의 유대인 인구중에서 첫 십자군 행진간 1/4 내지 1/3 이 살해되었다.
1099년에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들을 격렬하게 학살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과 복수의 단행자들이라고 자랑했다. 그들은 칼을 모면한 모든 유대인들을 회당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산채로 태워죽였다. 살인과 강도질을 마친 후 그들은 얼굴과 손을 씻은 후 옷을 깨끗이 다리고 맨발로 피바다를 지나 무덤교회를 향했다. 눈물과 찬송 속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운 그들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2.2 영원한 종살이의 저주
첫 2회의 십자군행진 동안 독일내 유대인들이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을시 당초 보호를 약속했던 것과 달리 "왕정 노비"들로 만들었으며, 이 일종의 특권을 위해 그들은 거금의 돈을 바쳐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왕정 노비들은 국가수입에 있어서 큰 출처가 됨이 알려졌으며, 주인의 소유물로서 매매 및 대여되어 빚 값는 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점차 흔히 있는 일이 되어버렸으며, 이웃 나라들에도 이것이 관습화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못막은 죄로 영원한 종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옛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왕정노비제도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했다.
유대인 격하의 또 한가지 면은 대부분의 직업에서 유대인들이 격리되고, 수공업조합이 기독교인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로써 유대인들은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남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에게 경멸받던 대금업자 같은 직업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금업자로서 유대인들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오히려 없어서는 안될 존재들이 되었다. 심지어 성당, 교회들이 유대인들의 돈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이 경제이익과 맞물려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이 가진 돈이 다 떨어졌다싶으면 주인에게서 쫓겨나고, 경제적 위기상황이 오면 재차 다시 불러들이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대금업자로서 유대인들은 서민들에게서도 미움을 받았다. 예를 들어 흉작후 농민들의 빚이 커지면 커질수록 유대인들은 위험에 처했다. 표방적으로 내새웠던 종교적 열심 뒤에는 그러한 단순한 물질적 동기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대학살 뒤에는 늘 "고리대금업자" 집들에 보관되어있는 채무서류 제거작업이 뒤따랐다. <...중략...> 유대인들이 장소를 이동하고자 할 때는 해당 기독교영주들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보호를 요청해야했다. <...중략...> 농지나 포도원밭들은 유대인들이 구입할 수 없었는데, 아무도 그들의 소유권을 보장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자놀이를 하는 대금업밖에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미움을 샀던 것이다.
2.3 모욕과 수치
Bernhard von Clairvaux (1090-1153) 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반대했으나, 그들이 하나님 대신 악마를 아버지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그도 요한복음 8:44 말씀을 앞뒤문맥에서 떼어내어 모든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적용시킨 당시 신학자들과 뜻을 같이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3세기경 Cyprian에게서도 유사한 이론을 발견하며, 루터도 유대인들을 "살아있는 악마"라고 지칭했다. 수백년 후 Julius Streicher는 이 이론을 이어받아 악마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민족을 소멸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2.4 속죄양
수많은 비인간적 대우 외에도 유대인들은 악의가 가득한 책임이 전가되었다. 세상의 모든 재난과 재해에 대해 그들은 책임을 져야했다. 우물독성, 성찬병모독, 살인의식 등에 대한 유대인들의 혐의는 널리 퍼져있었다. 당치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없이 그들에게 책임을 씌우는 일들이 점점 빈번해졌다. 심지어는 1021년 성 금요일에 발생했던 지진과 그에 따른 폭풍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책임을 져야했으며, 교황 Benedict VIII.는 이에 유대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1348년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돌았을 때에도 늘 그랬듯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멸하기 위해서 우물에 독을 탔다는 주장이다. 프랑스에서 이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며, 스위스, 벨기에, 스페인, 폴란드, 오스트리아에 들어왔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독일 외에 그 어떤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더 철저하고 처참하게 제거된 곳은 없다. Karl IV. 대제가 자기의 왕궁노비들은 머리카락도 건들지 말라는 금지령을 낸 것도 소용없었다.
Worms에서는 3월 1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7월 24일 유대인 공동체 스스로가 자기 집들에 불을 질렀다. 마인츠에서는 유대인들이 무장 저항했다.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자 포위된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모두 스스로를 "번제"로 드렸다. 불꽃과 연기속에서 그들의 애가가 들려왔다. 8월 24일 한날에 6000명이 숨을 거두었으며, 그날에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던 쾰른의 유대인 공동체도 이땅에서 사라졌다.
독일 전역에 걸쳐 350개 이상의 유대인 공동체들에 대해 잔인한 형태의 살상이 이루어졌다. 60개의 큰 공동체들, 150개의 작은 공동체들이 완전 소멸되었다. 생존자들은 동쪽으로 피했다. 중세의 독일 유태교는 사라지고만 것이다. 그 끔찍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어디에도 쓰레기더미를 남겨두지 않았다.
2.5 살인의식
이교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해괴한 살인의식의 거짓말이 유대인에게 씌워졌다. 그들은 특히 부활절전에 기독교 어린아이들을 죽여 그 피를 그들의 종교의식에 사용한다는 주장이다. 1171년 프랑스 Blois 에서는 이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 전체가 나무로 된 탑 안에 갖혀서 화형당했다.
이 소위 피의 누명은 영국과 프랑스를 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전 유럽에 퍼졌고, 어떤 최고권력도 이를 멈출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의문사가 발생할 경우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자력적 가해, 고통, 살상, 약탈 등이 가장 가까이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에게 가해졌다. 기독교인의 시체를 몰래 유대인들의 가옥에 두어 그 집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고자 하는 시도들도 적지 않았다.
Erfurt, Kolmar, Krems, Magdeburg 및 Weissenburg, Paris, Bern, Wuerzburg 과 Posen, Prag, Trient, Boppard, Budweis 등 수많은 지역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현혹과 거짓 신앙의 제물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전 유럽지역에 소위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된 기독교 어린이들을 기리는 문화가 생겼는데, "Simon von Trient" 또는 "das Anderl von Rinn" 등은 오늘날 우리 세기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1880-1954년에는 이 살인의식의 거짓말이 동부유럽의 천주교와 동방정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하게 퍼졌다. 나치신문인 "Der Stuermer"는 독일 어린이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랍비들의 모습을 커리커쳐로 싣기를 반복했다.
2.6 성찬병모독
유대인들에 대한 끔찍한 모함들이 아직도 적다고 여겨진다는 듯이 13세기말엽 새로운 모함이 등장했다. 유대인들이 성찬식에 쓰인 떡을 훔치거나 구입하여 예수님에 대한 미움으로 칼로 찍거나 절구로 찧음으로써 그리스도 처형을 수없이 반복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양의 성찬병을 그렇게 모독하면 거기서 놀라운 치료의 힘을 가진 피가 나온다는 설이다.
이러한 성찬병모독에 대한 유언비어는 1298년 남부독일에서 무시무시한 유대인대학살을 야기시켰다. Roettingen에서는 Rindfleisch라는 귀족출신의 사람이 성찬병모독을 복수하라는 천명을 받았다고 자차하며,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일단의 무리와 함께 그 도시의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프랑켄, 바이언 및 오스트리아 지역을 돌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다. 셀수없는 유대인들이 Rindfleisch의 무리를 피하기 위해 자결했다. 1298년 봄부터 가을까지 이 잔인한 대학살에 의해 140개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희생당했으며, 1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
Prag에서는 1389년 유대인 어린이들이 놀다가 성복을 입은 성직자에게 모래를 던진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응징으로 3000명의 유대인들이 사형을 당했다.
2.7 수치의 표식
1215년 Innozenz III. 교황에 의해 설립된 제4 라터란협의회는 민수기 15:37-41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타민족과 구별되는 특별한 유형의 옷을 입어야함을 결정했다. - 이는 아랍인들, 그리고 후에 이교도, 창녀, 문둥병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옷에 표식을 달아야했다 - 나치시대의 노란별보다 이미 수백년 전에. 그 수치스런 유대인표식은 그 색과 모양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렇게 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이 수치의 표식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기독교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모든 종류의 학대에 노출되게 되었다.
2.8 강제세례
세례냐 죽음이냐, 세례냐 추방이냐 - 중세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이 선택 앞에 서게 되었다. 1391년 Sevilla의 교황 대변인 Ferdinand Martinez는 백성들을 자극하여 유대인을 탄압케 했다. 5만명의 유대인들이 죽음을 선택했으며 수십만명의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가운데는 랍비들도 많았다. 강제세례는 그러나 자체적으로 큰 문제를 가져왔다. 한 부류는 개인적 이득을 위해 신앙을 바꾼 것이고, 다른 한부류는 어쩔수없이 신앙을 바꾸었으나 계속하여 비밀리에 자신들의 옛신앙을 고수한 것이다. 스페인사람들은 이 두 부류를 모두 "돼지들"라고 불렀다.
2.9 인종차별
스페인에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강제세례로 개종한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도 급증하였다. 결국 유대인들은 그 유전물, 달리 표현하여 "나쁜 피"가 그 근본적 문제라는 사고가 조성되었다. 때문에 세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스페인의 인종차별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나치의 아리아조항과 뉴른베르크의 "인종차별법"으로 가는 길은 먼길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이로써 공공생활과 독일시민권에서 배제되게 되었다.
2.10 스페인 종교재판
1480년 스페인의 왕 Ferdinand과 왕비 Isabella는 법정을 열고 개종유대인들의 교회에서 비밀리에 유대신앙을 실천하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무더기 체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스페인 종교재판은 결코 종교적 동기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왕가가 유대인들에게 진 고액의 빚과 더 관련이 있다. 1481년 첫 희생자들이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되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이 종교재판을 통해 3만명의 개종유대인들이 불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시대의 끔찍한 행위들은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확산되었다.
2.11 무고향
시간이 흐를수록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삼았던 모든 나라들에서 추방됨으로써 무고향의 처지가 되었다. 1290년 유대인들은 영국을 떠나야했다. 1만6천명의 유대인들이 프랑스와 벨기에로 피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된 피난길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쓰러졌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또다시 추방되었다. 1492년 Ferdinand왕과 Isabella 왕비는 소위 "진정한 기독교 왕국을 이루고자" 모든 유대인들을 스페인에서 쫓아냈다. 30만명의 유대인들중 다수가 포르투갈을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돈을 내고 몇개월 머물 수 있었다. 그후 그들은 Johann II. (1481-1495)에 의해서 노예가 되었다. 그 후계자에 의해 유대인들은 노예에서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후에 폭력적으로 강제세례를 받아야 했다.
2.12 카니발
유대인들을 수치스럽게 괴롭히는 것은 종종 카니발의 최고봉이었다. 중세 로마에서는 매년 유대공동체중 최적자를 발가벗겨 못들이 박혀있는 통 속에 넣고 Testaccio 산 아래로 굴러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같은 신앙의 동료의 순교를 지켜보도록 강요당했다. 후에 반대혁명 시 로마의 유대인들은 특별히 그 행사를 위해 미리 살을 찌우게 되고, "배신자들이 당하는 것"처럼 군중들에게서 진흙덩어리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얼음같은 추위와 빗속에서 카니발 거리를 발가벗고 달려야했다. 강제 설교도 있었으며, 설교중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때렸다.
2.13 종교개혁
Martin Luther (1483-1546)는 처음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믿음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유대인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다. 정말 그는 유대인들을 "주 안에서 사촌이요 형제들"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을 때 그는 완전히 방향을 전환했다.
"의심치 말라, 너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마귀 다음으로 그 누구도 유대인보다 더 쓰고 폭력적인 적은 없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정녕 거짓말장이들이요 피흘리는 개들이다... 그들은 독사들이요, 살인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1543년)란 자신의 논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 버림받고 저주받은 유대백성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여러분들에게 나의 충심어린 충고를 하고자 한다:
1. 그들의 회당과 학교들을 불지르고, 타지않는 것은 흙에 뭍어서, 돌하나도 부스러기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라.
2. 그들의 집들을 열고들어가 파괴하라.
3. 하나님이 없고 거짓과 저주와 맹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모든 기도집들과 탈무드들을 걷어치워라.
4. 랍비들을 사형과 사지절단의 형벌로 위협하여 가르치치 못하게 하라.
5. 그들에게 여행을 금지시키라. 그들은 주인도, 관청직원도, 상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에만 있어야 한다.
6. 모든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금지령을 내려라.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신하가 아니며, 그들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7. 모든 유대 소년 소녀들의 손에는 도리깨와 도끼, 삽, 실톳대와 실바퀴들이 들려져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모든 자식들이 그렇게 해야하는 것 처럼, 그들이 그렇게 이마에 땀을 흘려 자신의 먹을 것을 벌도록 하라.
왜냐하면 부드럽게 해주면 악하게만 되고 엄격히 해야만 향상되는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그들을 제거하라!"
그의 임종 직전 설교에서 그는 독일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내쫓을 것을 강조했다.
수백년 후 제 3제국에서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선동은 문자 그대로 인용되었다.
2.14 유대인 거주지역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 교황들은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반대개혁시, 특히 Paul IV (1555-1559) 교황 하에서는 급작스런 전환이 있었다. 유대인 거주지역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서였다. 협소하고 비인간적 환경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전 유럽에서 유대인 삶의 특징이 되었다.
3. 현대시대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전반에 깊숙히 뿌리내려, 일반시민들조차도 출신기독교전통이나 정치노선에 관계없이 반유대적이 되었다. 유대인들을 향한 "살신자"라는 비난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1921년 가족과 함께 키에프에서 폴란드로 탈출한 한 어린 소년은 당시 사람들이 가르켜주었던 폴란드 속어를 후에 기억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다"라는 말이었다.
3.1 전쟁터로 던져짐
한때 폴란드는 독일거주 유대인들이 십자군전쟁이나 흑사병 유행시 등 되풀이되는 유대인대학살 때마다 피신했던 피난처였다. 그들이 피신하여 비교적 조용히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1648년 부활절을 기하여 그동안 억압받던 그리스정교 우크레인인들이 폴란드 카톨릭에 대해 봉기를 들면서 끝이 나게 되었다. 폴란드에서 지주요 거상이었던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당하여, 우크레인 카사크군들의 잔인한 분노에 가차없이 노출되었다.
독일 전역에 걸쳐 350개 이상의 유대인 공동체들에 대해 잔인한 형태의 살상이 이루어졌다. 60개의 큰 공동체들, 150개의 작은 공동체들이 완전 소멸되었다. 생존자들은 동쪽으로 피했다. 중세의 독일 유태교는 사라지고만 것이다. 그 끔찍한 학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어디에도 쓰레기더미를 남겨두지 않았다.
2.5 살인의식
이교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해괴한 살인의식의 거짓말이 유대인에게 씌워졌다. 그들은 특히 부활절전에 기독교 어린아이들을 죽여 그 피를 그들의 종교의식에 사용한다는 주장이다. 1171년 프랑스 Blois 에서는 이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 전체가 나무로 된 탑 안에 갖혀서 화형당했다.
이 소위 피의 누명은 영국과 프랑스를 기점으로 하여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전 유럽에 퍼졌고, 어떤 최고권력도 이를 멈출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의문사가 발생할 경우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자력적 가해, 고통, 살상, 약탈 등이 가장 가까이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에게 가해졌다. 기독교인의 시체를 몰래 유대인들의 가옥에 두어 그 집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고자 하는 시도들도 적지 않았다.
Erfurt, Kolmar, Krems, Magdeburg 및 Weissenburg, Paris, Bern, Wuerzburg 과 Posen, Prag, Trient, Boppard, Budweis 등 수많은 지역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현혹과 거짓 신앙의 제물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전 유럽지역에 소위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된 기독교 어린이들을 기리는 문화가 생겼는데, "Simon von Trient" 또는 "das Anderl von Rinn" 등은 오늘날 우리 세기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1880-1954년에는 이 살인의식의 거짓말이 동부유럽의 천주교와 동방정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하게 퍼졌다. 나치신문인 "Der Stuermer"는 독일 어린이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랍비들의 모습을 커리커쳐로 싣기를 반복했다.
2.6 성찬병모독
유대인들에 대한 끔찍한 모함들이 아직도 적다고 여겨진다는 듯이 13세기말엽 새로운 모함이 등장했다. 유대인들이 성찬식에 쓰인 떡을 훔치거나 구입하여 예수님에 대한 미움으로 칼로 찍거나 절구로 찧음으로써 그리스도 처형을 수없이 반복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양의 성찬병을 그렇게 모독하면 거기서 놀라운 치료의 힘을 가진 피가 나온다는 설이다.
이러한 성찬병모독에 대한 유언비어는 1298년 남부독일에서 무시무시한 유대인대학살을 야기시켰다. Roettingen에서는 Rindfleisch라는 귀족출신의 사람이 성찬병모독을 복수하라는 천명을 받았다고 자차하며,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일단의 무리와 함께 그 도시의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하고, 프랑켄, 바이언 및 오스트리아 지역을 돌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다. 셀수없는 유대인들이 Rindfleisch의 무리를 피하기 위해 자결했다. 1298년 봄부터 가을까지 이 잔인한 대학살에 의해 140개의 유대인 공동체들이 희생당했으며, 1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다.
Prag에서는 1389년 유대인 어린이들이 놀다가 성복을 입은 성직자에게 모래를 던진 일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응징으로 3000명의 유대인들이 사형을 당했다.
2.7 수치의 표식
1215년 Innozenz III. 교황에 의해 설립된 제4 라터란협의회는 민수기 15:37-41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타민족과 구별되는 특별한 유형의 옷을 입어야함을 결정했다. - 이는 아랍인들, 그리고 후에 이교도, 창녀, 문둥병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옷에 표식을 달아야했다 - 나치시대의 노란별보다 이미 수백년 전에. 그 수치스런 유대인표식은 그 색과 모양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렇게 하여 탄생하게 되었다. 이 수치의 표식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기독교 사회에서 고립되었고 모든 종류의 학대에 노출되게 되었다.
2.8 강제세례
세례냐 죽음이냐, 세례냐 추방이냐 - 중세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이 선택 앞에 서게 되었다. 1391년 Sevilla의 교황 대변인 Ferdinand Martinez는 백성들을 자극하여 유대인을 탄압케 했다. 5만명의 유대인들이 죽음을 선택했으며 수십만명의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가운데는 랍비들도 많았다. 강제세례는 그러나 자체적으로 큰 문제를 가져왔다. 한 부류는 개인적 이득을 위해 신앙을 바꾼 것이고, 다른 한부류는 어쩔수없이 신앙을 바꾸었으나 계속하여 비밀리에 자신들의 옛신앙을 고수한 것이다. 스페인사람들은 이 두 부류를 모두 "돼지들"라고 불렀다.
2.9 인종차별
스페인에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강제세례로 개종한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도 급증하였다. 결국 유대인들은 그 유전물, 달리 표현하여 "나쁜 피"가 그 근본적 문제라는 사고가 조성되었다. 때문에 세례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스페인의 인종차별주의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나치의 아리아조항과 뉴른베르크의 "인종차별법"으로 가는 길은 먼길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이로써 공공생활과 독일시민권에서 배제되게 되었다.
2.10 스페인 종교재판
1480년 스페인의 왕 Ferdinand과 왕비 Isabella는 법정을 열고 개종유대인들의 교회에서 비밀리에 유대신앙을 실천하는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무더기 체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스페인 종교재판은 결코 종교적 동기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왕가가 유대인들에게 진 고액의 빚과 더 관련이 있다. 1481년 첫 희생자들이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되었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이 종교재판을 통해 3만명의 개종유대인들이 불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시대의 끔찍한 행위들은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확산되었다.
2.11 무고향
시간이 흐를수록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삼았던 모든 나라들에서 추방됨으로써 무고향의 처지가 되었다. 1290년 유대인들은 영국을 떠나야했다. 1만6천명의 유대인들이 프랑스와 벨기에로 피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된 피난길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쓰러졌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또다시 추방되었다. 1492년 Ferdinand왕과 Isabella 왕비는 소위 "진정한 기독교 왕국을 이루고자" 모든 유대인들을 스페인에서 쫓아냈다. 30만명의 유대인들중 다수가 포르투갈을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돈을 내고 몇개월 머물 수 있었다. 그후 그들은 Johann II. (1481-1495)에 의해서 노예가 되었다. 그 후계자에 의해 유대인들은 노예에서 해방되기는 하였으나 후에 폭력적으로 강제세례를 받아야 했다.
2.12 카니발
유대인들을 수치스럽게 괴롭히는 것은 종종 카니발의 최고봉이었다. 중세 로마에서는 매년 유대공동체중 최적자를 발가벗겨 못들이 박혀있는 통 속에 넣고 Testaccio 산 아래로 굴러 떨어뜨려 죽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같은 신앙의 동료의 순교를 지켜보도록 강요당했다. 후에 반대혁명 시 로마의 유대인들은 특별히 그 행사를 위해 미리 살을 찌우게 되고, "배신자들이 당하는 것"처럼 군중들에게서 진흙덩어리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얼음같은 추위와 빗속에서 카니발 거리를 발가벗고 달려야했다. 강제 설교도 있었으며, 설교중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때렸다.
2.13 종교개혁
Martin Luther (1483-1546)는 처음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믿음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을 통해 유대인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다. 정말 그는 유대인들을 "주 안에서 사촌이요 형제들"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을 때 그는 완전히 방향을 전환했다.
"의심치 말라, 너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마귀 다음으로 그 누구도 유대인보다 더 쓰고 폭력적인 적은 없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정녕 거짓말장이들이요 피흘리는 개들이다... 그들은 독사들이요, 살인자들이요 마귀의 자식들이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1543년)란 자신의 논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 버림받고 저주받은 유대백성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여러분들에게 나의 충심어린 충고를 하고자 한다:
1. 그들의 회당과 학교들을 불지르고, 타지않는 것은 흙에 뭍어서, 돌하나도 부스러기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라.
2. 그들의 집들을 열고들어가 파괴하라.
3. 하나님이 없고 거짓과 저주와 맹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들의 모든 기도집들과 탈무드들을 걷어치워라.
4. 랍비들을 사형과 사지절단의 형벌로 위협하여 가르치치 못하게 하라.
5. 그들에게 여행을 금지시키라. 그들은 주인도, 관청직원도, 상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에만 있어야 한다.
6. 모든 고리대금업자들에게 금지령을 내려라.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신하가 아니며, 그들이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7. 모든 유대 소년 소녀들의 손에는 도리깨와 도끼, 삽, 실톳대와 실바퀴들이 들려져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모든 자식들이 그렇게 해야하는 것 처럼, 그들이 그렇게 이마에 땀을 흘려 자신의 먹을 것을 벌도록 하라.
왜냐하면 부드럽게 해주면 악하게만 되고 엄격히 해야만 향상되는 그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그들을 제거하라!"
그의 임종 직전 설교에서 그는 독일에서 모든 유대인들을 내쫓을 것을 강조했다.
수백년 후 제 3제국에서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선동은 문자 그대로 인용되었다.
2.14 유대인 거주지역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 교황들은 비교적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반대개혁시, 특히 Paul IV (1555-1559) 교황 하에서는 급작스런 전환이 있었다. 유대인 거주지역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서였다. 협소하고 비인간적 환경의 유대인 거주지역은 전 유럽에서 유대인 삶의 특징이 되었다.
3. 현대시대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전반에 깊숙히 뿌리내려, 일반시민들조차도 출신기독교전통이나 정치노선에 관계없이 반유대적이 되었다. 유대인들을 향한 "살신자"라는 비난은 점점 심해져만 갔다. 1921년 가족과 함께 키에프에서 폴란드로 탈출한 한 어린 소년은 당시 사람들이 가르켜주었던 폴란드 속어를 후에 기억했는데,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다"라는 말이었다.
3.1 전쟁터로 던져짐
한때 폴란드는 독일거주 유대인들이 십자군전쟁이나 흑사병 유행시 등 되풀이되는 유대인대학살 때마다 피신했던 피난처였다. 그들이 피신하여 비교적 조용히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1648년 부활절을 기하여 그동안 억압받던 그리스정교 우크레인인들이 폴란드 카톨릭에 대해 봉기를 들면서 끝이 나게 되었다. 폴란드에서 지주요 거상이었던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당하여, 우크레인 카사크군들의 잔인한 분노에 가차없이 노출되었다.
한 목격자의 증언:
어떤 사람은 피부를 벗겨 그 살덩이를 개들에게 던져주었고, 어떤 사람은 심한 상처를 입혀 길거리에 버렸으며, 어떤 사람들은 산채로 매장하였다. 갓난아이들을 엄마 품에 안긴채로 칼로 찔려 죽였으며, 하숫가를 정비하는 용으로 유대 어린이들이 무더기로 물에 던져졌다.
이보다 더 끔찍한 형태의 가혹행위는 여기에 도저히 언급할 수가 없다.
1655-1658년 스웨덴의 침공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전쟁터에서 이리저리 치이게 되었다. 러시아, 카사크, 스웨덴군들이 차례로 이들을 덮쳤으며, 후에 이들이 모두 철수했을 때에는 폴란드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했는데, 유대인들이 폴란드의 적군들 편에 섰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떤 사람은 피부를 벗겨 그 살덩이를 개들에게 던져주었고, 어떤 사람은 심한 상처를 입혀 길거리에 버렸으며, 어떤 사람들은 산채로 매장하였다. 갓난아이들을 엄마 품에 안긴채로 칼로 찔려 죽였으며, 하숫가를 정비하는 용으로 유대 어린이들이 무더기로 물에 던져졌다.
이보다 더 끔찍한 형태의 가혹행위는 여기에 도저히 언급할 수가 없다.
1655-1658년 스웨덴의 침공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전쟁터에서 이리저리 치이게 되었다. 러시아, 카사크, 스웨덴군들이 차례로 이들을 덮쳤으며, 후에 이들이 모두 철수했을 때에는 폴란드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했는데, 유대인들이 폴란드의 적군들 편에 섰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648-1658 년간에는 폴란드에서 10-50만명의 유대인들이 살해되었는데,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역사 이래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700개의 유대사회가 몰살당했으며, 피난민들이 무리를 지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피신했다.
러시아 백군파와 적군파 간의 시민전쟁 때 유대인들은 양쪽 모두에게 공격을 당했는데, 백군파는 혁명분자들이란 이유로, 적군파는 시민들의 억압자라는 이유에서였다.
3.2 해방
18세기말-19세기초에 유대인들의 해방이란 차원에서 그들에게 주어졌전 동등권은 모든 곳에서 인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 반한 반응으로서 독일에서는 반유대적 소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19년 한 소책자 저자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학살, 거세, 사창가로 넘기기 등을 제안하기까지 이르렀다. 친카톨릭파도 아니었던 유대인 역사가 Heinrich Graetz는 "개신교 교리와 독일철학은 교황 Innocenz III.와 Paul IV.가 이미 오래전 교회법령을 통해 시행했던 반유대 견책들을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3 Dreyfus 사건
1894년 파리의 전쟁재판에서 유대인 장교 Alfred Dreyfus의 간첩혐의에 대한 재판이 있었는데, 이로써 유럽에서 최초로 유대인들에게 동등권을 보장했었던 이 유럽의 문명국에서 반유대적 폭동이 일어났다.
독일을 위해 첩보활동을 했다고 거짓 고소된 Dreyfus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강등되었으며 종신징역을 선고 받았다. 세상이 떠들썩해졌으며,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1906년에 이르러서야 Dreyfus가 교화되었고, 유대인들에 대한 강한 반감이 남게 되었다. 나치와 함께 일했던 Vichy 정부가 나온 것은 그에 대한 결과이다.
3.4 동부의 억압
18세기말 폴란드 분단과 함께 러시아는 세계최대 규모의 유대인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Katharina II.는 유대인들의 영역을 새로 획득한 주, 오늘날 정착지구라 불리우는 곳에 한정시켰다. 동시에 비유대 외국인들을 중앙러시아로 보내어 그곳에 정착시켰다.
Nikolaus I. (1825-55) 때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12-25세의 유대 청소년들은 병역으로 징용되어 엄청 먼곳으로 이송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각종 고문기구와 욕설들을 만들어내어 그들을 괴롭혔다.
당시 러시아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핍박을 많이 받은 나라는 루마니아이다. 약 20만명의 유대인들이 마치 중세의 최악의 시대처럼 고난을 당했다.
3.5 대학살
Zar Alexander III. 치하에서 1881년 부활절을 기해 첫번째의 대학살이 일어나 100개가 넘는 유대인 공동체들을 몰살시켰다. 짜르의 반유대적 고문관은 유대인문제를 자기식으로 해결할 것을 제안했는데, 3분의 1은 추방시키고, 3분의 일은 죽이고, 3분의 1은 사라져야한다 (즉, 개종시켜야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대학살과 그로 인한 민족대이동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를 죽인자로 보는 Zar Nikolaus II. (1894-1917) 때에도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가증스런 집단전소살인과 유대인구의 급감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는 세게2차대전 이후에도 계속하여 유대인 대학살이 지속되었다.
3.6 시온성 박사들의 기록 사건
이 반유대적 선전물은 1905년 짜르 치하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유대인들이 전세계를 반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물이었다. 세계1차대전 이후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20세기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1921년 그것이 가짜였음이 밝혀졌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영향력이 큰 공업업체인 Henry Ford 사의 추진하에 제3판이 미국 전역에 뿌려졌다.
1922년 열광적 극우파 두명이 Weimarer 공화국의 유대인 외무부장관 Walther Rathenau이 "시온성 박사들"중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살해했다. 이 "시온성 박사들의 기록 사건"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시기는 독일 나치때였다.
3.7 나치시대
나치가 반기독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에 의해 비로소 유대인들의 집단전소살인이 가능케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리스도가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 혈통이라고 선전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중세 카톨릭의 반유대적 법령들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 모델을 찾았으며, 마틴 루터의 독설적인 반유대적 문서들을 읽고 유포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유일한 나라, 카톨릭과 개신교가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집단전소살인이 발발되었다는 것은 깨우쳐주는 바가 크다. 이 교회전통 양쪽 모두에게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이 잉태된 것이었다.
교회와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공공연하게 나치와 동업 하였다. 교회지도부들은 나치의 유대인들에 대한 비인간적 법률에 전적으로 찬동하며, 부분적으로 직접 루터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제출하였다. 1936년 독일교인들 일부가 개인적으로 히틀러에게 유대인 학대를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들은 "웬 불평이냐? 나는 단지 너희들이 지난 수세기 동안 가르쳐온 것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일축당했다.
루터의 455번째 생일이 되는 바로 그날 밤에 (1938년 11월 9/10일) 독일내 유대인회당들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가정화의 밤"으로 역사에 남게된 이날 밤 나치들은 치밀한 계획과 대규모 행동작전을 통해 오래전 루터가 제안했던 것들을 이행한 것이다. 몇몇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도와주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천주교에서도 개신교에서도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3.8 세계 2차대전
나치 스스로가 보기에도 그 권력의 절정에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들이 공개되었을 당시, 유대인 편에 선 사람들의 수는 부끄러울 정도로 극소수였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홀로 남겨졌다. 대부분 나라들이 공식적으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반유대주의는 그 댓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 Ulm에서 있었던 전범재판에서 당시 리투아니아 목사였던 사람에게 '왜 당시 그 끔찍한 총살행위들을 보면서도 침묵했었냐'는 질문에 그는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한 말이 유대인들에게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끔찍한 사실은 이 성경구절이 그러한 차가운 감정들을 변호하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이와 유사한 사고방식들을 다른 나라들의 기독교인들도 표방했다.
로마교황의 사절 한 사람은, 죄없는 수많은 유대 어린이들이 피를 흘리니 슬로바키아에서 아우스비츠로 이송되는 것을 중지시켜달라는 요청에 대해 한치의 요동도 없이 대답했다: "이 세상에 죄없는 유대 어린이의 피란 없다. 유대인들의 피는 모두 죄로 가득하다. 너희들은 죽어야 한다. 그것이 너희가 스스로 진 죄(예수 십자가형)에 대한 형벌이다"
제3제국의 최악의 유대핍박자라 할 수 있는 Julius Streicher는 뉴른베르크의 국제 재판소에서 말하길: "만약 이 책이 함께 기소된다면 마틴 루터 박사가 오늘 나 대신 이 피고석에 앉아야 한다. 이 책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서 마틴 루터 박사는 유대인들이 독사의 자식들이고, 우리는 그들의 회당들을 불태워야 하며, 유대인들을 몰살시켜야한다고 썼다. 바로 그것을 우리가 한 것이다."
스위스는 국경을 차단했다. 카나다와 미국은 이민심사법을 강화하여 많은 유대인들의 이민길을 막았다. 영국정부는 1917년 Balfour 성명서를 통해 수락했던 조항, 즉 유대인들에게 당시 팔레스틴 위임지구에 국가를 세울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했다. 이로써 제3제국 또는 그 직후 고국의 땅으로 피난하고자 했던 수천명의 유대인들 앞에 문이 굳게 잠겨있기만 했다.
이 맥락에서 Struma의 비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대인들로 꽉찬 배가 팔레스틴 땅에 정박하는 것을 영국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는 방향을 바꾸어야 했고 1942년 겨울 흑해에서 수중어뢰를 맞게 되었다. 배에 탄 피난민 총 769명 중 단 한명만이 살아남았다.
3.9 무감각증과 수동적 태도
거의 모든 나라들이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에 보여준 무감각증과 수동적 태도는 히틀러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계획적으로 유대인들을 집단살인할 수 있었던 것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38년 7월 Roosevelt 대통령이 프랑스 Evian-les-Bains에 피난민대책회의를 소집하여 유럽지역 유대인들의 앞날에 대해 의논하고자 했다.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회의에 참여한 30개국 중 덴마크와 네덜란드만이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뿐, 나머지 모든 나라들은 수많은 조건들을 내세워, 그 어떤 피난민도 그것을 만족시킬 수 없게 하였다. 나치 간첩은 히틀러에게 기별을 보냈다: "유대인들 갖고 맘대로 하십시요. 아무도 그들을 가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4개월 후 무시무시한 핍박이 시작되어 6백만명 유대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4. 회개의 촉구
홀로커스트 이후 우리 독일민족에 천천히 생각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아주 중요한 첫걸음은 1980년 라인란트 지역 복음주의교회들의 공동성명서로서 "우리는 홀로커스트에 대한 독일 기독교의 공동책임과 죄를 깊이 고백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이다.
1980년 "형제들의 모임 교회(Barmen III)" 연합에 있었던 복음주의 교회 투표회에서는 "우리는 자신의 신실치 않았음과 범죄했음을 겸손하게 시인한다. 교회사에 있어서 기독교는 단한번도 이스라엘을 선택된 백성으로 제대로 인정해준적이 없고, 유대인들에 대해 우리 교회가 적개심을 품어 온 것에 대해 창피와 후회, 회개 이외의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다."라고 천명하였다.
유대교에 대한 독일복음주의교회(EKD)의 두번째 연구(1991년)에서는 교회사에 있어서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해 끊임없이 이어온 논쟁과 비평, 비하"를 지적하였으며, "죄악을 가능한 최대한 상세히 기술하고 언급하는 것은 죄의 고백이 형식적인 것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로 돌이키고 새롭게 태어나는 힘을 주도록 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카톨릭교회사에 있어서는 1965년 제2차 바티칸 협의회에서 있었던 "Nostra aetate" 성명이 초석이 된다. "모든 증오의 발산, 박해, 반유대주의의 표현들"에 있어서 교회는 한탄한다고 하였으며, 교황 Johannes Paul II.는 "반유대주의는 전혀 정당하지 않으며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라고표명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 입장표명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회개로의 촉구는 우리 개개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하나님 백성에게 저지른 우리의 잘못에 있어서 개인적 회개가 없는 것과 교회의 내적 침체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저지른 잘못을 하나님과 유대인들 앞에 고백하지 않는한 진정한 영적 부흥은 없을 것이다."
카톨릭 사제이자 역사가인 Edward H. Flannery는 기독교인들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함께 고통하시는 비극이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수많은 손들에 의해 또다시 그의 민족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셈인 것이다. 반유대주의의 죄는 많은 죄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긍극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부인, 기독교적 소망의 포기, 기독교적 사랑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역사상 가장 심하게 핍박받은 백성은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요 16:2-4)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신 바로 그 백성이라는 이 사실이야말로 기독교의 타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 과업을 수행해야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교회에서 아무 동맹국도 보호자도 찾지 못하고, 교회에서 도리어 광신적인 압제자요 중상모략자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이 사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추문이 아닌가. 이는 반드시 회개가 이루어져야할 역사인 것이다."
동일한 영으로 Basilea 자매는 기록한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편에 서서 그의 백성을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사랑과 긍휼의 눈길로 본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린 한 민족 전체가 얼마나 비참하게 멸시와 조롱, 추방을 당하고 질병과 고통으로 가득하여 오랜 세월을 지내왔는지, 우리는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