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세상은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은 신적인 목적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한 진정한 창조적 표현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필요하다.
온전히 드려진 심령은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감동(지문)을 쉽게 받아들이므로 감수성이 예민하다. 주님은 그런 종류의 부드러운 땅에는 전 세계적인 변화로 성장할 하나님 왕국의 관점을 심으신다.
통찰력과 능력을 부여하는 본질인 말씀은 모든 사회와 문화에 적용되는 해결책을 제공한다.
모든 인류의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 영역과 시간, 온전함에 있어 제한이 없다.
말씀 공부는 그 역사적 배경과 그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는 것을 초월하게 하고, 때로는 그 문맥과 인간 저자가 쓴 의도를 뛰어넘게 해주어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이 들을 때가 왔다 그분의 말씀이 다시금 우리의 경험 안에서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류가 없으며,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을 믿는다.
그것은 비교할 존재가 없으며, 더할 것이나 뺄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저자들에게 감동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66권의 어떤 책이 포함되도록 할 것인지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으로 임하셨다. 성경 말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그와 동일한 권위를 가진 새로운 계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지혜라든지, 하나님, 또는 천사로부터 직접 계시되었다고 여겨지는 책이나 통찰력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모든 지혜의 재판관으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듣는 모든 것은 성경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과 일치해야 한다. 이러한 강력한 확신 안에서, 하나님 말씀의 생명과 영향력을 빼앗아버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교회의 기준과 전통이 있다.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아 왔다.
성령보다 성경을 더 가치 있게 보는 것은 우상 숭배이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경이 아니라 성령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지만, 그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은 그분의 책보다 크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의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것을 성령님께서 계시해 주시도록 의지해야 하는데, 이는 성령님 없이는 성경은 닫힌 책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령님께 의지하는 일이 성경공부하기 전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일어나야 한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분과의 교제가 계속 지속되며,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성령님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이시다. (요3:8참조)
성령님은 천국의 능력이시며, 조종될 수 없고, 우리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자신의 신비를 진정으로 굶주린 자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분은 천국에서 너무나 가치 있게 여겨지며 경고와 함께 오신다.
성부와 성자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성령께 죄를 범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영원한 결과가 있다.
성령님은 덜 중요시 여김을 받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과 말씀에 대한 접근에서 저의 제외되어 있다.
생각 없는 몇몇의 광신도들처럼 될까 하는 두려움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훌륭한 보물- 성령- 교제하는 것을 막고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며, 성령께서는 우리 유업의 계약금인 것이다 (엡1:13-14 참조)
몇몇의 사람은 성령님께서 자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시지 않으므로 우리가 그분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 성부와 성자 모두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실 것이 많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나님은 찬양받고, 사모받고, 자랑거리가 되시며, 교제해야 할 분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성경 말씀에 대한 많은 신자들의 이러한 접근은 그 거룩한 글들을 쓰도록 감동을 주신 성령님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와 그분의 관계를 재검해 보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가 현재 아는 것으로는 갈 수 있을 만큼 갔다.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교리는 성령의 기름에 의해 신축성 있는 포도주 부대가 되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경직되어 있거나 움직일 수 없다면 그분의 말씀을 더욱 열어 보이시는 하나님의 습관에 내어드려질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에 더하시기를 즐겨 하신다.
지나치게 경직됨은 계속되는 계시의 무게 아래 교리의 포도주 부대를 터져 버리게 할 것이다.
그 결과는 교회가 주변 세상에 대해 관계 없고 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신학적 관점을 선호해 그 주변에 기념비를 세우고 반대파의 중요한 관점에 귀머거리가 되거나 적대적이 되는것은 쉬운 일이다.
성령님께서는 마음 가운데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가 자연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것들에 관해서. 그것이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고 특정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오류는, 성경의 일부분을 편리하게 제외하는 어떤 특정한 교리적 성향을 둘러싸고 기념비를 세워서 우리 스스로를 그 신학적 관점 안에서 안정감 있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영적인 아버지들보다 교리를 둘러싸고 모이는 우리의 경향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전자는 교단을 만들게 되고, 후자는 어떤운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교리들도 성령의 영감 아래 확대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어렵게 느끼는 것은 확대가 아니다.
그것은 언뜻 보아서 우리가 배운 것과 모순된다고 여겨지는 어떤 것에 대해 그분이 말씀하실 때인 것이다. 엄격한 교리에 대한 열망은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정도와 정비례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실제로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 배경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계시를 끌어 안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남은 생애 동안 한 가지 성경구절로써 나를 먹이시고도 남을 만한 큰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대로 깊다. 나는 어린 아이와 같이 알아 듣는 것을 익혀야 한다.
이는 내가 무경험자처럼 남지 않는다면 내가 아는 바가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어떤 부분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흔히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열어 보이시는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닫히게 하는 원인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끌어당기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인 것이다. (마 11:25 참조)
우리가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책을 그들이 소요했던 성령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길 때 우리는 그들과 같은 열매를 맺기 힘들다.
<빌 존슨의 '하나님과 꿈 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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