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2010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6 -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속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브리서 9:24).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하는 것처럼 하려면 예수님도 일년에 한 번씩 자주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나타나셨습니다(히브리서 9:,26).

그리고 우리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이 성경 말씀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내 죄도 사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거룩하신 보좌 앞에 항상 주 여호와께 나의 죄사하시기를 쉬지 않고 비시네”(찬송가).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은 죄 값을 갚았다는 그 사실을 보증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저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정 아무개 박 아무개, 누구누구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었습니다. 이 피를 보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됐다”고하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제사(祭司)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브리서 7:24,25).

누구를 힘입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힘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완전하게 속량해 주신 그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자기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갑니까?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빈 손 들고 앞에 나가 십자가를 붙드네”(찬송가). 아무런 의()가 없는 자이지만 오직 도와주심만 바라고 빈 손 들고 비참한 죄인 그대로 나아갑니다.

그 공로를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내 열심, 내 정성, 내 의로운 어떤 행위를 의지하고 나갔다가는 당장 저주받아 죽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앞에 살아 계십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保人) 높은 계시니라”(욥기 16:19).

가령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한 10억 정도의 많은 빚을 졌다고 합시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 시에는 사업 실패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자는 눈 덩이처럼 불어나는데 한 푼의 돈도 갚을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죽을 수도 없어 밤낮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잘 아는 어떤 돈 많고 마음 좋은 분이 “아이구, 저 사람이 빚 때문에 저렇게 고민해서 되겠느냐. 잘못하다가는 죽게 생겼다. 나라도 대신 갚아 줘야지” 하고 나를 위해 그 빚을 다 갚았습니다. 원금은 물론이고 이자까지 다 갚았습니다.

빚을 다 갚아 주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내게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럼 나는 빚 때문에 고민합니까, 고민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고민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빚은 다 갚아 줬는데, 그 증인이 죽고 없습니다. 증인도 없고 또한 아무 증거도 없으니, 빚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빚쟁이가 그것을 알고 다시 내게 와서 빚 달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는지, 아니면 단순히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죽으신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할아버지에게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죽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그야 자기 죄 때문에 죽었겠지”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셨다는 증거입니다내 빚을 대신 갚아준 분이 내게 와서 “자, 당신 빚은 다 갚았습니다. 영수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확인해 주고, 또한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빚쟁이가 아무리 악질이라도 나에게 또 갚아달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증인으로 살아 계시고, 영수증도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이 성경이 바로 그 영수증입니다. 구약은 죄를 사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셨다는 약속입니다. 이 성경에다 예수의 피로써 도장을 치신 것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찬송가). 받은 증거가 바로 성경입니다. 또한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욥기 19:25)는 말씀처럼,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속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신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하나 알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塗抹:지워 없앰)하는 자니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 우리 죄를 도말하셨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인간을 위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다음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이 모두 다 지옥 가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길렀는데 그 자식들이 전부 잘못되거나 죽는다면, 그 당사자인 자식들은 물론이거니와 먼저 부모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뿐 아니라 부모 자신을  위해서도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잘되면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지옥에 가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선 내 자신이 구원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지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탕자(蕩子)가 아버지를 떠나 잃어져 있으면 그것이 아버지의 근심이고 슬픔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므로 그 구원이 너무나 완전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만일 시계를 산다면, 시계에 대한 값을 확실히 지불하고 소유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재가 났을 때 자기의 자녀는 필사적으로 건지려고 하는 이유는 자녀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잘 하면 천국에 갈 것 같고 조금만 잘못하면 지옥에 갈 것 같은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100%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救贖)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2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가 빽빽한 구름 같이 막혀 있었습니다. 죄는 사람끼리 지어도 죄인들이 범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죄가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도말은 지워서 없애버렸다는 뜻입니다. 또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했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해 주신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믿는 것이 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당까지는 돌아오는데 하나님께로는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항상 죄의식이 있고, 그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어느 집 아들이 ‘나도 돈 좀 써 보자’ 하고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 천만 원을 가져갔다고 합시다. ‘이 괘씸한 놈, 오기만 해봐라’ 하고 기다리는데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부모는 돈 때문에 걱정합니까 아니면 아들 때문에 걱정합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아들이 지은 죄는 부모의 마음에서 봄눈 녹듯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놈아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라’는 심정으로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0 0 , 아버지가 네 죄를 다 용서했으니 안심하고 돌아오너라. 네가 돌아오지 않아서 네 어머니께서 병이 났다’ 이런 광고 흔히들 보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고 아버지께 돌아가면 받아줍니까, 받아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느 부모의 사랑보다도 더 큽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다 용서했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일보에 광고를 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신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 말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에게 돌아오라 하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니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22~24)고 하셨습니다. 그 탕자는 우리이고 아버지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옷을 죄인에게 입히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죄를 보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너는 내 아들이라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발에 신을 신긴다는 것은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지 마라는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는 것은 죄 많은 아들 때문에 죄 없는 송아지가 죽은 것은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죄 없는 주님께서 죽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잃어졌고 죽어 있었는데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살아난 것, 다시 얻은 것을 이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 외에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이루신 공로만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다 용서하였으니 돌아오라는 광고를 보고서도 자신의 죄만 생각하여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미 지은 죄가 크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겠습니까? 돌아가지 않는 죄가 훨씬 더 큽니다. 이미 지은 죄는 용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버린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사람들의 죄만 사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까지도 다 사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아니요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 1 2:2).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지옥 갈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옥 갈 죄가 새로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8).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그 죄 때문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형선고가 이미 내려져 있는 것이고 죽음 건너편에서 집행된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하셔서 이루신 그 크신 은혜를 믿지 않는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머물러 있으며 머지않아 그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5~8).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윗도 이미 멀리서 보고 말했습니다. 그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찬송하리로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1:3,4). 할렐루야!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5 - 유월절 양

애굽의 장자를 죽이던 밤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신 것이 출애굽기 12장에 나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동지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는다며 여기저기 뿌리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것이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던 것에서 유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게 피를 바르고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날 애굽 전역 집집마다, 왕의 아들부터 종의 아들까지 장자는 모두 죽임을 당했으므로 집집마다 초상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밖에는 피를 발랐고, 안에서는 양고기를 불에 구워 먹고 즐기며 안전하게 보냈습니다. 옷을 입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양고기를 먹으며 날만 새면 지긋지긋한 애굽을 떠난다는 기쁨으로 심판의 밤을 보냈습니다. 앞뒷집에서 비명 소리가 나면서 애굽 전역이 장자를 잃은 통곡 소리로 덮였습니다. 장자 없는 집은 없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죽음의 형벌이 내리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밖에다 피를 발랐기 때문입니다. ‘피를 발랐어도 혹시 죽을지도 모르지 않느냐?’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피를 바른 집의 장자는 모두 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때에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12:13).

피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피를 발랐으면 죽음의 심판은 넘어가고, 그렇지 않았으면 집에 심판이 내렸습니다. 피도 하나님이 보시고 심판도 하나님이 내리셨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그들에게 안정과 확신을 주었고, 또한 그들에게 내리는 심판을 막아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의 장자를 대신해서 양이 먼저 죽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유월절 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린도전서 5:7).

유월(逾越)이란 말은 영어로는 ‘패스 오버’(pass over), ‘넘어서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양이 흘려 죽음으로 심판이 집을 넘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의 유래입니다. 이스라엘 장자 대신 () 죽임을 당했듯이, 인류에게 쏟아질 저주와 심판을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임을 당함으로써 예수님이 유월절 양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도 유월절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 죽으실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하시거든 ()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심판의 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모든 죄의 저주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옛날 대역죄인에게 값으로 사약(死藥) 내려졌듯, 예수님 앞에도 인류의 죄에 따른 저주를 가득 채운 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형벌의 잔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은 너무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므로 고통을 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잔을 받지 않고 지나가면 우리가 잔을 마시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잔이 내게서 지나갈 없거든 아버지의 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복음 26:42)라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뜻을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저주의 잔을 마시고 죽으심으로 심판이 우리에게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 대신 죽음으로써 집의 장자에게 내린 죽음이 넘어 지나간 것처럼,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를 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착한 행실도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십니다. “내가 피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 유월절에 죽은 어린 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년 번씩 이스라엘 민족이 년간 지은 죄를 하나님께 사함 받는 날이 있었습니다. 날을 대속죄일(大贖罪日)이라고 합니다. 대속죄일에는 염소 마리를 끌어다가 제비를 뽑습니다. 마리에게는 죄를 지워 광야 무인지경에 내다 버리는데 그러면 거기서 맹수에게 잡혀 먹히든지 굶어죽든지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지고 광야로 내몰리는 어린 염소를 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 없는 염소가 우리 죄를 지고가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마리는 죄를 짊어 지워 정사각형 놋제단에서 죽여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레위기 16:810,1822). 그리고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드리는 성막(聖幕)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드리는 성막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식양을 정해 주셨습니다. 성막 문을 들어가면 <그림>처럼 놋제단이 있는데 놋제단은 동물을 죽여서 번제를 드리는 곳입니다. 물두멍을 지나면 임시건물 같은 장막(tent) 있는데, 들어가면서 쪽이 성소이고 휘장으로 분리된 쪽이 지성소입니다. 지성소(至聖所)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염소의 피는 땅에 쏟되 얼마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를 거쳐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성소 안에는 떡을 진열해 놓는 떡상과 일곱 촛대, 그리고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있습니다. 휘장(두꺼운 커튼) 통과하면 지성소가 나오는데, 안에는 언약궤(법궤) 있습니다. 언약궤 속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 만나,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고, 언약궤 위는 속죄소(贖罪所: 히브리어로 ‘카파르’ ‘덮는다’라는 뜻임)인데 위에다 피를 뿌림으로써 죄를 사함 받는 곳입니다. 속죄소는 다른 말로 시은좌(施恩座), 은혜를 베푸는 곳인데, 시은좌 위로 그룹의 천사가 내려다보는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법궤 속죄소에 피를 일곱 뿌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값을 대신하여 번제단 위에서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속죄제 결제를 받는 셈입니다. 백성들은 성막 밖에서 종일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대제사장의 목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을 기록한 판결흉패가 걸려 있고, 가장자리에는 금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만일 지성소에 없이 들어갔다가는 대제사장은 죽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지성소에 들어가서 살아서 피를 뿌리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대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마치고 나면, 이후에 짓는 죄에 대해서는 이듬해 대속죄일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일년에 번씩 드렸던 대속죄제(大贖罪祭)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 것의 모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는 염소는 세례 요한이 증거한 것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요한복음 1:29)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염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년 동안 지은 죄를 지고 갔지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번에 영원히 지고 것입니다. 제단의 정사각형은 동서남북 세상을 말하고, 제단 위에서 죽은 염소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피를 땅에 쏟고 또한 그릇에 담아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은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히브리서 1:3) 앉으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말씀에서 성소는 지성소를 말합니다(영어성경: the Most Holy Place). 매년 번씩 짐승의 피로써 대제사장이 땅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갔던 ,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히브리서 9:23) 염소를 잡아 정결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히브리서 9:23) 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제사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드려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4 –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누가복음 18 9절에서 1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라는 아주 대조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는 인상부터 받지만, 실제 바리새인들은 육신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에 아무리 교회에 열심하는 사람들도 예전 바리새인들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주일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바쳤으며,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내용처럼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 같은 짓은 하지 않고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아주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도 길게 하고, 구제 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반면에 세리(稅吏) 동족들에게서 부정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일부는 착복하고 일부는 바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세리와 창녀는 하나 같이 죄인의 대명사였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비록 죄는 많이 지었지만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손을 들어 올리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기도합니다. 자세부터가 엄숙하고 경건하며, 납니다. 성전 쪽에 나가 손을 벌리고 앞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이것저것 자기의 의로운 일들을 열거하며 ‘이렇게 의롭게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많은 세리와 비교한다면, 누가 봐도 그가 훨씬 의롭습니다. 누가 사람의 기도하는 광경을 봤다면, 아마 “맞아, 맞아!”하며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모르고 있는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의롭게, 율법을 지키며 선하게 살고자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 ()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나은 의가 어떤 것입니까? 바리새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면 살인하지 않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미워한 자는 살인한 자요, 마음으로 음욕(淫慾)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 행위로 드러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마음에도 아무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의로워야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은 ()인데, 의는 인간이 없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 20 말씀은 인간의 힘으로는 없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는 사람이 보기에는 의롭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더러운 같습니다(이사야 64:6). 부끄러움과 수치를 전혀 가릴 없는 더러운 옷을 걸치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는 사람이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세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8:13)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달리 저만큼 떨어져서 감히 얼굴도 들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다만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리, 약자들의 돈을 중간에서 떼어먹고 나쁜 짓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지만, 무슨 무슨 지었다고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만큼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덩어리, 죄인이라고 하면서 애통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많은 세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없는, 가당치도 않은 말씀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 많은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로움을 자처하는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 어떤 인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칭의(稱義)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확실하게 알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 주심을 의지하고 나갔을 ,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의가 그것입니다. 세리와 같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죄를 사해 주시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달리 길이 없다는 마음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하나님)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61:10).   

아담과 하와가 ‘벗었다’고 자백했을 하나님께서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입혀주신 옷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10)라고 했을 ,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흘려 죽여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비참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자백하며 자비를 구할 ,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를 위해 죽고 피로 너를 샀다. 내가 너를 ‘의롭다’고했으니 안심해라”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 우리의 죄를 가릴 “구원의 옷”을 그냥 거져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세리는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나왔고,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와 공로를 의지하고 나왔습니다. 바리새인처럼 가인은 자기가 흘리고 정성들여 스스로 마련한 것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것이 맞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있겠다라는 생각은 얼핏 그럴 보입니다.

그러나, 가지 우리가 알아야 것이 있습니다. 저주받은 인간이 저주받은 땅에서 흘려 얻은 것은 저주받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나 필요한 것이지,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네가 의로운들그가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뿐이니라”(욥기 35:7,8). 저주받은 죄인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것 역시 저주받은 것입니다. 가인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고 나간 사람의 대표입니다. 바리새인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세리처럼, 아벨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용서, 자비를 의지하고 나간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면 자기는 사는 것이고, 만일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는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을 받아들일 없었던 것은 가인의 제단에는 희생제물 피는 없고 순전히 자기 공로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공로뿐이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있는 길을 준비하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림이 없으면 우리의 죄사()함도 없습니다. 사함이 없으면 구원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사함이 없다면 인간은 정죄를 받을 , 어떠한 공로를 세워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값인 죽음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 동안 종노릇하다가 해방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장자(長子)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장자를 죽이셨을까요? 장자란 상속자이고, 애굽의 장자란 세상의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심은 땅에 어떤 행복과 소망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땅에는 소망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땅은 우리가 마음 붙일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은 영원한 하늘과 , 영원한 생명인데 인간이 스스로 천해져서 짐승처럼 것입니다. 스스로 천해져서 오로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 육신적인 것만 추구하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죄입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줄로 알지만 비교적 착하게 살아도 땅엣 것만 요구하고 땅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섭리와 목적을 위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부모는 자식에게 온갖 좋은 것을 주려고 준비해 놓았는데 자식이 부모를 떠나 구걸하러 다닌다면,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배신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을 인간이 스스로 짐승처럼 되는 것이 멸망 받을 죄입니다. 성경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편 49:20) 라고 했습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