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2010

가인의 길과 아벨의 길 6 -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속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죽고 부활하시어)...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브리서 9:24).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하는 것처럼 하려면 예수님도 일년에 한 번씩 자주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나타나셨습니다(히브리서 9:,26).

그리고 우리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이 성경 말씀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내 죄도 사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代贖)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거룩하신 보좌 앞에 항상 주 여호와께 나의 죄사하시기를 쉬지 않고 비시네”(찬송가).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것은 죄 값을 갚았다는 그 사실을 보증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저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정 아무개 박 아무개, 누구누구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었습니다. 이 피를 보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됐다”고하십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제사(祭司)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브리서 7:24,25).

누구를 힘입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힘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완전하게 속량해 주신 그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자기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갑니까?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빈 손 들고 앞에 나가 십자가를 붙드네”(찬송가). 아무런 의()가 없는 자이지만 오직 도와주심만 바라고 빈 손 들고 비참한 죄인 그대로 나아갑니다.

그 공로를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내 열심, 내 정성, 내 의로운 어떤 행위를 의지하고 나갔다가는 당장 저주받아 죽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 앞에 살아 계십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保人) 높은 계시니라”(욥기 16:19).

가령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한 10억 정도의 많은 빚을 졌다고 합시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 시에는 사업 실패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자는 눈 덩이처럼 불어나는데 한 푼의 돈도 갚을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죽을 수도 없어 밤낮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잘 아는 어떤 돈 많고 마음 좋은 분이 “아이구, 저 사람이 빚 때문에 저렇게 고민해서 되겠느냐. 잘못하다가는 죽게 생겼다. 나라도 대신 갚아 줘야지” 하고 나를 위해 그 빚을 다 갚았습니다. 원금은 물론이고 이자까지 다 갚았습니다.

빚을 다 갚아 주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내게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합시다. 그럼 나는 빚 때문에 고민합니까, 고민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고민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빚은 다 갚아 줬는데, 그 증인이 죽고 없습니다. 증인도 없고 또한 아무 증거도 없으니, 빚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빚쟁이가 그것을 알고 다시 내게 와서 빚 달라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는지, 아니면 단순히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죽으신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할아버지에게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죽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그야 자기 죄 때문에 죽었겠지”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셨다는 증거입니다내 빚을 대신 갚아준 분이 내게 와서 “자, 당신 빚은 다 갚았습니다. 영수증 여기 있습니다”라고 확인해 주고, 또한 건강하게 살아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빚쟁이가 아무리 악질이라도 나에게 또 갚아달라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증인으로 살아 계시고, 영수증도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이 성경이 바로 그 영수증입니다. 구약은 죄를 사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셨다는 약속입니다. 이 성경에다 예수의 피로써 도장을 치신 것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찬송가). 받은 증거가 바로 성경입니다. 또한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욥기 19:25)는 말씀처럼,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속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신 일과 관련하여 우리가 하나 알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塗抹:지워 없앰)하는 자니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 우리 죄를 도말하셨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인간을 위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다음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이 모두 다 지옥 가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길렀는데 그 자식들이 전부 잘못되거나 죽는다면, 그 당사자인 자식들은 물론이거니와 먼저 부모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뿐 아니라 부모 자신을  위해서도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잘되면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지옥에 가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선 내 자신이 구원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지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탕자(蕩子)가 아버지를 떠나 잃어져 있으면 그것이 아버지의 근심이고 슬픔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므로 그 구원이 너무나 완전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만일 시계를 산다면, 시계에 대한 값을 확실히 지불하고 소유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재가 났을 때 자기의 자녀는 필사적으로 건지려고 하는 이유는 자녀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잘 하면 천국에 갈 것 같고 조금만 잘못하면 지옥에 갈 것 같은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100%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救贖)하였음이니라”(이사야 44:2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가 빽빽한 구름 같이 막혀 있었습니다. 죄는 사람끼리 지어도 죄인들이 범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죄가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도말은 지워서 없애버렸다는 뜻입니다. 또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했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해 주신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믿는 것이 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당까지는 돌아오는데 하나님께로는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항상 죄의식이 있고, 그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어느 집 아들이 ‘나도 돈 좀 써 보자’ 하고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 천만 원을 가져갔다고 합시다. ‘이 괘씸한 놈, 오기만 해봐라’ 하고 기다리는데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부모는 돈 때문에 걱정합니까 아니면 아들 때문에 걱정합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아들이 지은 죄는 부모의 마음에서 봄눈 녹듯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놈아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라’는 심정으로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0 0 , 아버지가 네 죄를 다 용서했으니 안심하고 돌아오너라. 네가 돌아오지 않아서 네 어머니께서 병이 났다’ 이런 광고 흔히들 보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고 아버지께 돌아가면 받아줍니까, 받아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느 부모의 사랑보다도 더 큽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다 용서했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일보에 광고를 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신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 말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에게 돌아오라 하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니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누가복음 15:22~24)고 하셨습니다. 그 탕자는 우리이고 아버지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옷을 죄인에게 입히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죄를 보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너는 내 아들이라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발에 신을 신긴다는 것은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지 마라는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는 것은 죄 많은 아들 때문에 죄 없는 송아지가 죽은 것은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죄 없는 주님께서 죽으신 것을 가리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 영적으로 잃어졌고 죽어 있었는데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살아난 것, 다시 얻은 것을 이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 외에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이루신 공로만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다 용서하였으니 돌아오라는 광고를 보고서도 자신의 죄만 생각하여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미 지은 죄가 크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겠습니까? 돌아가지 않는 죄가 훨씬 더 큽니다. 이미 지은 죄는 용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버린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사람들의 죄만 사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까지도 다 사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아니요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 1 2:2).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지옥 갈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옥 갈 죄가 새로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18).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그 죄 때문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형선고가 이미 내려져 있는 것이고 죽음 건너편에서 집행된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하셔서 이루신 그 크신 은혜를 믿지 않는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머물러 있으며 머지않아 그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5~8).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윗도 이미 멀리서 보고 말했습니다. 그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찬송하리로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1:3,4). 할렐루야!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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