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2010

제10강 영적인 위기와 함께 시작되는 신부의 여정 (아1:5-11)

I. 신부의 여정이 시작됨 : 은혜의 역설 : “검지만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마음이) 검으나 (하나님에게) 아름다우니(사랑스러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 ( 1:5-6)

A. 신부의 영적인 여정은 그녀의 2가지 믿음의 고백( 1:5)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진실한 신자에게 공통적입니다. 나는 이것을 “은혜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녀의 죄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의 죄를 보게 할 뿐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실하지만 아직 약한 신자들을 지칭합니다.

B. 우리는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조차 하나님에게 아름답습니다첫 번째, 우리의 사랑스러움은 의의 선물입니다(고후 5:17-21). 두 번째, 거듭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영 안에서 하나님에게 “예!(Yes!)”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대한 우리 마음의 모든 움직임은, 자원하는 영이라고 부르는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51:12;  26:41). 세 번째, 우리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감정들과 열망들은, 그분이 우리를 향하여 어떻게 느끼는가를 결정합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분의 눈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르게 사물을 보십니다(삼상 16:7; 55:7-9). 네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영원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이라는 부르심의 렌즈를 통하여 보십니다.

C.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승리의 3단계를 이해해야 합니다첫 번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우리의 진정한 의도는 우리의 승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두 번째, 우리는 아직 지속적인 투쟁을 하는 가운데 부분적인 돌파를 갖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는 승리하시만, 우리 삶의 특별한 영역 안에서 아직도 우리의 육신과 아직은 지속되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5:16-17). 세 번째, 욕망의 변화를 갖는 근본적인 돌파가 있습니다( 6:14-23).

II. 신부의 영적 위기 : 거절과 수치
내가 햇볕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응시하지) 말 것은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마음)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예수님)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 1:6-7)

A. 그녀는 아가서 1:6-7절에서 영적인 위기와 관련된 5가지 압력을 묘사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패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수치스럽게 느낍니다. 그녀의 성난 형제들에 의해 거절 당합니다; 다른 포도원을 지키도록 요구되어서 과도하게 일하였습니다; 그녀의 포도원(마음)을 예수님을 위한 새로운 사랑을 가지고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예수님을 섬기는 일에서 멀어졌습니다.

B. 그녀는 그녀의 형제들을 “어머니의 아들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아가서 전반에 걸쳐(1, 6, 3:4; 11; 8:2,5) 어머니는 교회를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교회라는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다른 사람들은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새 예루살렘을 “어머니”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4:19, 26; 살전 2:6-7).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12:46-50).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로 말해집니다. 교회의 기초이신 예수님은 한 여인의 씨로부터 태어나셨습니다 ( 3:15). 속량된 이스라엘은 사람의 아들로서 예수님을 출산한 “어머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2:5).

C. 아들들은 젊음이 넘치는 그녀의 열심에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인 젊은 신자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왜 그들이 화가 났을까요?
첫째, 열심 있는 신자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한 신자들(단순하고 빈번하게 진정한 영적 열심을 율법주의로 빈번하게 오해하는)에게 정죄 받게 됩니다둘째, 훈련되지 않은 열심과 열심 있는 신자들의 교만은 종종 영적으로 무딘 지도자들을 화나게 합니다. 우리의 열심은 지혜와 겸손의 계절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새로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는 자들로 불려지는 방법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자만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높이고 그들이 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헌신을 표현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D. 그녀의 열심을 이용해 다른 포도원들(복수형)에서 그녀에게 많은 책임들을 부과함으로서, 그녀가 과도하게 일하게 하는 성난 아들들로부터 그녀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영적으로 탈진되었습니다. 탈진은 열심히 일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멍에로부터 오는데, 그것은 사역 안에서 성령과 함께 연결되지 않고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인해 지나치게 많은 책임을 떠맡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탈진에 이르게 됩니다.

E. 그녀는 다른 포도원들을 지켰으나 그녀 자신의 포도원(혹은 마음)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녀가 가장 많이 원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녀의 포도원이나 그녀의 마음의 정원은, 영적인 냉냉함, , 수치심의 잡초들로 숨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 자신의 포도원을 돌보는 것은 그녀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성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노하여 포도원지기로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마음)을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 1:6)

F. 그녀는 멀리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에 고통을 느낍니다. 우리가 성령께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섬길 때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녀는 멀리서 목자를 섬기는, 얼굴을 가린 여인 같이 느낍니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 1:7)

  1. 고대의 사람들은 친근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에 베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왜 내가 길 바닥에서 일하면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당신과 가까이 있지 못하나요?” 이 두 가지 초점들은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로부터 멀리서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2. 그녀는 그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분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의 달콤함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의 말씀의 입맞춤과 주님과의 침실 경험을 그리워합니다.

III. 예수님을 더욱 얻기를 열망하는 그녀의 부르짖음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예수님)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 1:6-7)
 
A. 위기 중에 그녀는 간절한 기도로 부르짖습니다. 그녀는 말씀의 입맞춤과 침실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녀는 위대한 목자의 충고를 요구하며 “당신이 어디에서 당신의 양떼들을 먹이시는지 나에게 말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랑스럽다는 확신을 갖는다면, 우리가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요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녀는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당신이여, 나에게 말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한 사랑에 그녀가 실패했음을 압니다. 연약한 사랑이 거짓된 사랑은 아닙니다. 그녀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실한 연인입니다. 그녀는 원수가 그녀에게 믿게 하는 것과 같이, 가망성 없는 위선자가 아닙니다. 그녀는 심지어 그녀의 위기와 영적인 단조로움 중에서도 자신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2. 그녀는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위선자이기 때문에 나에게 말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나는 내가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것을 압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 내가 당신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부르짖을 때와 같습니다.

B. 그녀는 예수님과 만나기에 간절했습니다. 사역적 활동과 심지어 승진도 충분한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당신의 양떼를 먹이시는 곳을 알기 원합니다. 이것은 “나를 이끌어 주세요”라는 그녀의 기도의 하나의 표현입니다.

C. 정오에 대낮의 햇볕 속에서, 배가 부를 때, 양들은 누워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위해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낮의 햇볕이나 이러한 삶의 압력들 중에서 우리가 쉬기를 원하십니다. 양들은 배부를 때 정오에 누워 있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워 있게 하시며... ( 23:2)

D. 그녀는 목자의 언어로 그녀의 기도를 드립니다. “낮의 햇빛의 압력 아래서 당신이 나를 어디서 만족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양들이 정오에 쉬는 것처럼, 그녀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만족스럽게 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먹이고 있지만, 이제 나는 당신이 저를 먹이시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나의 영의 부르짖음을 만족케 하시는 곳은 어디인가요?

E.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포기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무미건조한 삶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자신을 가망성 없는 위선자처럼 기록해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신이 이전과 같이 나를 먹여주세요. 나는 얼굴을 가린 여인입니다. 나는 멀리서 당신을 섬깁니다. 나의 포도원은 잡초가 무성합니다.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나는 실패했고 사람들은 내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기 원합니다”라고 부르짖을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녀는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그녀를 다시금 타오르게 할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불을 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부르짖습니다.

IV.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응답 : 7가지 본질적인 진술
여인 중에 어여쁜(너무 아름다운)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 1:8)

A. 예수님은 그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고( 1:7), 인격적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1:8-11). 주님은 그녀가 그분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 7가지 진술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그녀가 그분의 눈에 아름답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고, 그 다음에 3가지 응답(1:8b,c,d)을 주셨고, 그런 다음 3가지 확증(1:9-11)을 주셨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감사로 반응합니다( 1:12). 거룩한 열정의 신학의 필수적인 부분이 예수님의 응답에서 발견되어집니다. 이것은 신부의 여정에서 예수님이 그녀에게 주시는 첫 번째 계시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놀라운 모사(상담자)”나 목자로서, 연약함 안에서 어떻게 전진해 가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조언을 주시는 분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B. 그분은 신부를 “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라고 부르십니다. "어여쁘다"(fair)는 단어는 대부분의 다른 성경번역(NAS/NIV)에서는 “아름답다”(beauti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너의 동산에 잡초들이 있고 너는 나를 멀리서 섬기고 있으나 나는 나를 사랑하는 네 마음의 부르짖음을 보고 있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분 안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그녀의 마음을 열렬히 구하고 있습니다.

C. 예수님은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그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우리는 책망을 기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원이 지켜지지 못하였음과 우리가 멀리서 그분을 섬기는 것, 그러나 우리는 그분에게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거나 실패할 때에도 우리를 아름답다고 말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난 아들들에게는 아름답지 못할 것입니다만 우리는 그분에게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경멸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분에게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분은 그녀의 수치와 거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D. 예수님은 그녀를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여인들이나 예수님을 경멸하는 잘못된 종교의 빛입니다. 그분은 그녀를 성숙한 사도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 이 땅의 5-6십억의 사람들의 빛 안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고 의의 선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E. 1:4e에서 신부는 딸들에게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함 중에도 그녀를 어떻게 보시는지 말씀하시면서, 그녀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부르시면서 “너무 아름답다”라고 하시고, 위기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F. 어디서 그분이 양떼를 치시는지 그리고 어디서 하나님과의 친밀감 가운데 우리를 채우시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3가지 대답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아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3가지 가장 강력한 유혹에 대한 응답과 같이 3가지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아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 1:8)

1. 몸에로의 삶에 헌신 (8c) : 불경건한 격리에 대한 거절
2. 섬기는 사역에로 헌신 (8d) : 불경건한 게으름에 대한 거절
3. 영적 권위에 헌신 (8e) : 불경건한 독립에 대한 거절

G. 이끄시는 것(drawing)은 친밀감(intimacy)이기 때문에 단수(singular)입니다. 달려가는 것(running)은 사역이기 때문에 복수(plural)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립이나 게으름 또는 독립의 영을 가지고 사역하면서 달려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H. 첫 번째, 불경건한 고립을 거절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의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1:8c). 그분은 그녀에게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오라고 또는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양떼의 발자취’는 모든 양들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장소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이 걸어가는 곳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교제 가운데로 돌아오라. 너를 판단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성난 아들들에게 과도하게 반응 하지 말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너무 고립되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갈망이 아니라, 거절, 쓴 뿌리, 수치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고립되어 자신을 파괴하기를 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 10:25)

I. 두 번째, 불경건한 게으름을 거절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1:8d).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어린 양 떼를 먹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내 주신 어린 양 떼 즉 어린 이들을 먹여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일 때, 그분 자신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J. 세 번째, 불경건한 독립성을 거절함으로써 영적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진정한 목자의 장막 옆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아래 두신 목자(지도자)들에게 열린 영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불법의 영이 번성하고 있습니다( 24:12). 하나님은 현재 당신 위에 두셨거나 앞으로 두실 모든 지도자들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지도자와 관계하면서 예수님을 깊은 방식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지도자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다루시며 우리 마음에 정리되지 못한 것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워두신 불완전한 지도자의 잘못을 볼 때, 우리는 가르침을 잘 받는 영으로 그들의 장막에 거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순복은 겸손과 관련되며, 권위에 대해 열린 영을 갖는 것입니다.

K. 요약 : 예수님의 3가지 대답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3가지 주된 유혹을 다루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자신의 죄로 인해 수치를 느낀다거나 성난 아들들에 의해 부당하게 대우받고 거절 당할 때, 고립과 쓴 뿌리의 유혹입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기심과 두려움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자를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잘 만날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영적 권위에 저항하려는 유혹입니다.

V. 그녀의 진실함이 주님에 의해서 확인되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 1:9-11)

A. 1:9-10에서 그분은 그녀가 지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됨과 자원하는 영의 사랑스러움을 재확인 하시는 3가지 것으로 그녀를 비교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아 1:11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첫 번째 일은 그녀를 “내 사랑”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녀의 마음에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마음에 사랑을 가지고 다시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B. 의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그녀의 진실되고 강한 열망을 보십니다. 그녀는 바로의 병거 안에 있는 준마와 같습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 1:9)

  1. 준마는 말입니다. 말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의 안에서 그녀의 힘을 말합니다. 바로의 병거는 세상에서 가장 잘 훈련되고 준비된 말입니다. 그분은 그녀의 힘을 그렇게 비유하십니다.

  2. 바로의 병거는 세상에서 가장 잘 준비되고 강력한 전쟁 말입니다. 이집트의 말은 당시 전 세계에 그렇게 알려졌습니다. 바로는 세상에서 최고로 훈련되고 준비된 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병거를 끌기 위해 이집트의 모든 말들 가운데 최고를 선택했습니다. 바로에게는 자신의 마구간에 수천의 말들이 있었고 자신의 병거를 끄는 것은 그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은 바로의 말들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만 한 여유가 있었던 소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C. 우리의 감정은 그분에게 매력적입니다. 그분은 성령님으로 우리의 감정을 만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감정적인 차원을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그녀의 헌신으로 만지십니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 1:10)

  1. 뺨은 아가서 가운데 감정을 의미합니다. 뺨은 분노, 기쁨 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뺨을 볼 때, 우리는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는지 혹은 분노나 슬픔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은 빰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2. 장신구(땋은 머리털로 번역됨)는 그 대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예술가의 좋은 손 재주에 의해 창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려고 일하고 계신 예술가이십니다( 61:3). 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음욕과 분노를 보시지만, 우리 안에 그분을 향해 자라가는 열정 또한 보십니다. 하나님은 “너의 감정은 사랑스럽구나. 내가 네 안에 솜씨 좋게 일하면서 나의 아들에게 “예!”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D. 하나님은 그녀가 그분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과 예수님께 순종하려는 단호한 그녀의 의지를 보십니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 1:10-11)

  1. 목은 상징적으로 의지를 나타냅니다. 성경은 목이 곧은 사람들 즉 강퍅하고 반항적인 사람들에 대해 말합니다. 목은 또한 거룩한 순종을 말하기도 합니다. 목은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어느 길로 갈 것인지 선택하면서 머리를 돌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왕이 다른 나라를 이겼다면, 정복한 장군은 순복을 나타내기 위해 패배한 나라의 왕이 목을 밟습니다.

  2. 금 사슬은 왕적인 권위를 말합니다. 오직 왕만이 금 사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왕 곁에서 금 사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금 사슬은 왕권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진귀하고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왕의 상징이 새겨진 금 사슬은 오직 왕자만이 도시를 거닐면서 걸칠 수 있었습니다.

VI. 그분이 시작하신 것을 마치기 위한 주님의 약속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에 은을 박아 만들리라 ( 1:11)

A. 금으로 만든 장신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금과 그녀의 성품은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불로 연단된 성도를 뜻합니다( 3:1-4). 은이 박히는 것은 속량을 뜻합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속량을 전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준비된 것입니다.

B. “우리가 만들리라”라는 것은 그녀 안에서 그분의 일을 마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당신은 나를 어디서 먹이실 것인가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온전히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은으로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넘어지는 부분에 승리를 약속하셨고, 우리가 다른 이들의 속량에 관여하는 자들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출처: 카페선두주자/마이크 비클>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