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장의 이야기는 서구의 교회 안에서 가장 큰 근심거리이다. 널리 퍼져 있는 불신앙의 문제. 그것은 오랫동안 지혜로 가장해 행세했고, 그것이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이 밝혀져야만 한다. 믿음 없음은 삶에 있어서 보수주의라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 자신을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과 제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공급을 삼으며, 다른 이들이 넘어져 버린 그 극단적인 것들에 넘어지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종교적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믿음 없는 생각이 그분의 권능과 영광안에서 예수님을 결코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보았다고 하는 것을 마치 성경이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하기라고 하듯 하나님께서 진짜 하신다는 걸 증명하기 원한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어떤 찬양을 드리기 전에 의사의 진단과 엑스레이 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았던 사람이 걷게 되고, 우울증에 빠졌던 사람이 기뻐하며, 귀가 멀었던 사람이 귀가 열려 찬양하지만, 그래도 방관자들이 이것들이 정말 기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원한다는 것은 슬픈 사실이다. 나는 사기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속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는 것은 속임수로부터 보호하려는 지혜라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없음이 표시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불신앙이 오랫동안 지배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만든다”(고전13:7). 하나님의 사랑과 좀더 깊이 만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경계함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성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리고,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하는 것” (갈5:6)을 볼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데서 나온다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의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불신앙을 상당히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속 보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기적에 노출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도와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무언가 보여 달라는 것은 하나님은 향한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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