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6)
탕자의 비유에서 외면적으로 볼 때 맏아들은 효성스런 아들이요, 성실한 사람이요, 부지런한 사람이요, 의분에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는 그와 같이 착한 맏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부요함을 누리지 못했을까요?
첫째로, 그는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랑과 신뢰의 관계로 보지 않고 아버지는 명을 내리고 자식은 그 명을 받아 지키는 율법적인 관계로만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율법적 관계는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앞에 자기를 내세웠고, 피와 살을 나눈 동생이 죽을 뻔하다가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불법적으로 죄를 지었음을 내세워 환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율법적으로 죄 지은 일이 없다면서 위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자와 위선자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게 된 의인을 찾지 아니하시고 죄인임을 고백하여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맏아들은 부요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토록 부요하고 풍성한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염소 새끼 한마리도 아버지께 받을 수 없다는 맏아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명령만 내리시는 존재요, 염소새끼 한마리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메말랐고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기대를 저버린 인생은 절망뿐입니다. 한 가정에서도 부부가 내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서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면 사랑이 식어지고 잘잘못만 따지는 율법적인 관계가 되어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맙니다.
젊은 사람이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다면 탕남탕녀가 되고 맙니다. 청소년들이 장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불량 청소년들이 됩니다. 한 교회가 발전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불량 청소년들이 됩니다. 한 교회가 발전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그 교회는 그때로부터 파멸되고 맙니다. 한 민족이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면 망하고 맙니다.
기대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풀어 놓을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우리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대가 없는 신앙이 열매 없는 나무와 같다면 기대있는 신앙은 사시사철 푸르고 열매가 주렁주렁한 강변에 심기운 나무와 같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누가복음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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