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2010

진정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가?

창세기 6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무엇이 은혜이며 여호와께 입은 은혜는 과연 어떤 것인가? 우리들이 믿음을 갖기 시작하면 은혜를 받았다 하거나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진정 은혜가 무엇인지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베노아흐 마차이 헨 베에이네이 예흐봐”(`hw"hygt; ynEy[eB. !xe ac'm' x;nOwgt;)라는 히브리 문장에서는 다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노아라는 이름은 단순히 안식이라고 가르쳐 왔는데 하나님의 생명으로 울타리를 치게 하는 존재가 바로 노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노아는 이 땅에 최초로 배를 즉, 방주를 만든 인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노아(x;nO)는 이름 속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울타리를 치게 하는 존재로 방주를 만든 기술자이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사명을 갖고 사역을 감당한 존재다. “마차이”(ac'm)라는 단어는 도달하다, 배워서 책임 있는 사역을 감당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데 노아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철저하게 배웠으며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사명과 사역을 감당한 존재다.

 “헨”(!xe)이란 단어는 은혜라고 해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은혜보다는 남과 달리 생활 속에서 무엇이 나아지거나 달라지면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언행이 옛날과 달리 변화하게 되면 은혜로운 현상이라고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녀의 성적이 올라가거나 남편의 직장에서 진급이나 월급이 나아지게 되면 은혜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아파트를 구입하게 되거나 부동산의 가격이 올라가게 되어 은혜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느 재난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짐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위와 같은 내용을 은혜로 여길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와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게 된 것을 은혜로 말하지 않을 위인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단순히 내 생활에 변화에만 초점을 맞춰서 표현하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은혜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베이네이”(ynEy[eB.)라는 단어는 ‘눈의 쌍, 마음에 들다. 닮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문장을 서로 연결해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도달하여 책임 있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닮음”이란 단어는 누구의 모습을 흉내 내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어느 아이가 그 부모를 닮거나 그의 친 가족 중에 누구를 닮은 모습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혈통이나 유전에 의한 생명의 전통 속에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부모나 친척들의 혈통에 의해 빼 닮아서 나오지만 그들의 생명들이 다양성에 의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다양성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이 달라 보이더라도 한 줄기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사상과 생명의 고유성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신학이 다르고 교리가 다르며 전통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일까?

말씀 속에 숨겨진 원형과 본질은 일맥상통하여 있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주장하고 있는 신학사상들과 교리의 차이점이 생긴 원인이 무엇인가? 분명히 말씀의 원형과 본질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과 의지를 담은 사상을 덧칠하여 엉뚱한 방향을 흘러가게 한 신학과 교리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인간들이 조작한 기독교의 하나님과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데 여기서 분별해야만 된다. 이것이 영분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에 의한 은혜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고 있는지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다.

과연 성경의 하나님께서 쳐 주신 울타리 안에 내가 있는지 기독교 하나님께서 쳐 주신 울타리 안에 내가 있는지부터 인식하지 못하면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기관에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성경의 하나님에게 속해서 내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우고 익히며 그의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도달해 있는지 발견해야 한다.

내가 지금 현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현재 누구와 함께 어디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면 나의 앞길은 암흑 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으로 인한 법으로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성령보다는 자신의 이성과 생각과 판단과 의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성령의 도움 없이 목회해라”는 말이 목사에게 심한 모욕감을 주는 표현을 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목회하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혼적인 목회를 감당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목회하다가 심한 병에 걸리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나기도 하여 엄청난 딜레마에 빠져 고통 가운데 있는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

진정 은혜로운 목회를 할 수 없는가? 또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가? 본인도 이런 깊은 내용을 알기 전까지 얼마나 혼적인 설교와 목회를 해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는 착각 속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것이 마귀사탄의 전략임을 모르고 살아왔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그 은혜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이상한 교리에 빠져 거듭나고 계속 거듭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는 은혜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 요한복음 1 16절에 은혜 위에 은혜더라는 말씀이 은혜 더하기 은혜, 은혜 곱하기 은혜라는 계산만 하고 풀기 때문이다.

은혜를 한 번만 옳게 받으면 은혜가 무수한 은혜가 계속 내게 임한다는 놀라운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본인이 원어성경을 처음 접하면서 일주일 만에 깨달았지만 그 은혜를 체험하여 장성한 분량에 도달했다고 느껴진 것이 20년 이상이나 걸렸다. 아직도 너무나 미흡하며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하는데도 글을 쓰고 가르치고 있다.

본인에게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질문하면 한 번도 다 못 읽었다고 하면 어떻게 성경을 다 읽지도 그리고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현재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들 중에 성경 전체를 다 알고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이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을 깨달은 것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 뿐이다. 최근 산본에 있는 목사님을 만나 뵙고 들은 얘기가 자신이 겨우 거듭나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군부대에서 자신에게 군종을 맡기는 바람에 맡게 되었다고 한다. 성경도 찾지 못하고 기도 한 줄도 하지 못한다고 말했더니 군목이 올 때마다 성경 찾는 법, 기도하는 법을 배워서 군종생활을 감당했다고 한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군종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독실한 유교 집안이라 목사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간증을 들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그 어느 누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편에서 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노아처럼 하나님께서 쳐 주신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져 가는 닮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살아가면서 완전히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보좌에 주님과 함께 앉아 있는 것이 바로 도달했다는 의미다.

비록 한 명을 놓고 목회하는 분이나 수천 명 수만 명을 앉혀 놓고 목회하는 분과 비교하지 마라. 초라한 목회와 신앙생활, 화려한 목회와 신앙생활,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것이다. 얼마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생명에 도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깨닫게 하고 있는지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루아침에 닮아지는 것이 아니다. 배 속에 아기가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닮아진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자라가면서 12번이나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몸이 되어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감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원형과 본질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닮아가는 은혜를 늘 항상 체험하기를 바란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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