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2010

제4강 성령의 사역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삼상 16:23절입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지금 예배회복의 필수성을 살피는 중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과 친밀함을 중심으로 예배회복의 필요를 보았어요. 오늘은 성령의 사역의 관점에서 예배회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전인적인 치유사역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은 한 마디로 줄이면 전인적인 치유사역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성령사역도 전인적인 치유사역입니다.

1)성령사역의 모델
예수님께서 하신 성령사역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구절이 마8:1-4절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친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 사역으로 말합니다. 마5-7장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의 핵심을 말합니다. 우리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메시지를 전파하시되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도록 전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뿐아니라 우리가 전파할 메시지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마8-9장은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8:1-4절 맨 처음부분에서 문둥병자를 고친 사건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의 모델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8:1-4절입니다.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당시에 문둥병자를 총체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병든자였습니다. 우선 문둥병자는 육체적으로 몸이 썩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는 음성환자들만 있지요. 실제로 진행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록도 같은 데를 가보면 제가 환자인지 그분들이 환자인지 잘 모르겠어요. 문둥병은 살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소록도를 가보면 95% 이상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이 새벽3시부터 나와서 기도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병자인지 우리가 병자인지 모르겠어요. 이처럼 문둥병은 살이 썩어가는 병입니다.

사회적으로도 병든 사람입니다.
문등병자는 이스라엘의 진 안에서 살지 못합니다. 따로 격리 되어 삽니다. 벤허 영화를 보면 거리로 나오면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그러지요. 오늘날로 말하면 에이즈 걸린 사람취급 당했어요. 레위기 민수기를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레13:45절입니다.“45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처럼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어요.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많았겠어요.

영적으로도 병들었어요.
우리가 그러지요. 우리가 아무리 육신적으로 병들어도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부은 바 되면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당시 문둥병 환자는 예배드리로 나갈 수 없었어요. 심지어 문둥병 환자에게 손을 댄 자로 부정하게 되어 예배에 나가지 못했어요.

육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병들어요.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본문에 보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수많은 환자들이 나았다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자기와 같은 사람도 고쳐주실까 하는데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직접 손을 대서 고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셨어요. 그러자 그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을 기록하면서 이 사건을 왜 가장 먼저 기록하셨을까요? 이 사건이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의 모델입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은 정인적인 치유사역입니다 

오늘날 어떤 목회자들 어떤 성도들은 성령사역을 거부하고 반대하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반대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2)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과거에도 성경을 읽다보면 간헐적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희미했는데 오늘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이 더 확실하게 보였어요. 저는 우리 지체들도 이 부분을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기를 바래요. 이부분을 확실하게 볼 수 있다면 성령사역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게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은 정인적인 치유사역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의 더 나아가 구속사역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사역은 소위 예수님을 통해서 전파되는 말씀을 위한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사역 자체가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역 혹은 구속사역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이 부분을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 구절을 봅시다. 누가복음 4장 16-21절입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의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의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첫 번째 사건은 아니지만 이 사건을 첫 번째로 보고합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사역을 보는 하나의 패러다임 모델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읽었습니다. 이사야서 6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2절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응하여졌다고 말씀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함으로써 누가복음이 이해하는 예수님의 사역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40-66장) 것은 전체주제가 회복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두해두고 쓰여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회복될 것을 예언합니다. 회복에 대해서 말하면서 더욱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 후반부를 제5의 복음서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사복음서가 없더라도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이사야 후반부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53장을 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같은 경우도 에디오피아 국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읽던 성경이 이사야서인데 그 말씀을 기초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사야 후반부는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핵심적으로 말합니다. 그중에서 한 부분이 이사야 61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 후반부의 구속의 약속을 성취하는 분으로 말합니다. 그 구속의 성취의 핵심적인 일은 당연히 십자가 지는 일이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구속의 사역의 핵심이 무엇이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될 뿐아니라 여기보면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자는 다시 보게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사역이 전인적인 치유사역인데 이 성령사역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해서 이사야 후반부에 약속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의 사역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역을 성령을 통해서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보면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사역은 전인적인 치유사역으로서 단순히 말씀선포를 위한 부수적인 사역이 아니라 예수님이 감당하신 구속사역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구속은 이처럼 전인적인 치유를 포함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는 병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그저 우리의 영혼이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 뿐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가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아세요. 이처럼 성령사역은 예수님이 사역 혹은 예수님이 구속사역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만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도 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마11장을 보세요. 1절 이하를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는 사건입니다. 요한이 가지고 있던 이해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들을 때 이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요한은 예수님을 말세지말의 심판자로 오시는 메시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선포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들으니까 자기가 이해했던 메시야 이해와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듣고 사람들을 보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제자들에게 답변합니다. 11장 4절 이하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듣고 본 것을 전하라고 합니다. 듣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고요. 보는 것은 전인적인 치유사역입니다. 성령사역의 일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요한에게 예수님은 말세지말에 심판자로 오시는 메시야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위해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후반부에 나오는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종 메시야에 대해서 말하면서 핵심적인 부분이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전인적인 치유사역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역 혹은 구속사역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에 대해서 말하는 단어만 보아도 확인됩니다. 원래 우리를 구원하다는 단어는 소조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단어를 똑같은 단어인 소로를 사용합니다. 

마9장에 혈루증 앓은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21절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함이라고 하는데 이 구원은 영혼구원이 아니라 치유를 말합니다. 22절에서도 구원은 치유입니다.

마가복음 5장 23절 회당장의 딸을 고칩니다.“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그로 구원을 받아 즉 치유를 말합니다.

마가복음 10장 51절입니다.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백부장의 하인 누가복음 7장 33절입니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17장 19절입니다. 열문둥병자.“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처럼 성경 여러 곳에서 치유를 우리 영혼구원을 말할 때 사용하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어요. 왜?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 전인적인 치유사역은 예수님이 하신 핵심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하나님이 포도나무 교회에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것 하나가 은사를 불일듯하라는 것입니다. 왜? 은사가 불일듯해야하는 이유는 이 일이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더 큰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은사를 계급장으로 여기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주위에 소위 병든자들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관계적으로 병든자들을 치유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생명 가운데로 돌아도록 하기 위해서 그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더욱 불일듯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병든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
저는 설교준비하면서 이런 것이 보여져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바리새인의 제자인가? 잘 이해가 안되지요. 듣고 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인지 바리새인의 제자인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바리새인의 제자쪽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 우리가 감당할 성령사역과 관련해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자세는 예수님은 병든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마9장 9-13절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하나님 나라의 성령사역에 대해서 말하는 마8-9장 그 사이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너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죄인들이라고 하는데 죄인들이 누구죠?
영어성경은 따옴표가 붙어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죄인취급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의 규칙을 외부적으로 지키는데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613가지의 율법을 정하고 철저하게 지켰어요.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 못하는 일반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취급했어요. 그래서 그들과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귀신들린 사람과 같았어요. 인간쓰레기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들과 전혀 가까이 가지 않았어요. 이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안목이 있었어요. 리더를 분별하는 안목이 있었어요. 세리들의 리더급은 마태를 분별할 줄 알았아요. 그래서 마태가 많은 세리들을 초청하고 예수님도 초청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집에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대적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제가 아까 우리가 바리새인의 제자에 더 가까운가?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에 더 가까운가? 물었지요.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아무런 문제없는 사람과만 어울리기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 살만하고 인품도 괜찮고 함께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심지어 교회성장학자들 중에서도 교회가 성장하려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야 한답니다. 의사는 의사끼리 교수는 교수끼리 서민은 서민끼리. 그래야 부담도 없고 그래야 성장한다고 합니다. 교회 소그룹에서도. 소위 끼리끼리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들 소위 전통이나 당시 종교사회의 이해에 맞게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것과 맞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자신들과 분리시켰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피해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어요.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병든자를 위해 오셨다고 합니다. 설교하는 저도 찔리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병든자는 단순히 육신적인 병든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세리들은 육신적으로 병든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사는 삶, 죄와 세상의 억압 가운데 있는 사람,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관계적으로 사회적으로 귀신의 억압 가운데 있는 사람 등등 총제적으로 병든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교회의 머리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 하면서 실제의 삶은 바리새인과 똑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과 함께하라는 말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교제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제자는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병든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교회에 아버지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 중 하나가 총력전도입니다. 

여러분이 남아프리카 프레토라는 도시의 뒷골목의 흑인 아이에게 책임이 없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관계의 동심원 안에 두신 사람들에 대한 책임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병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우리의 관계의 동심원안에 있는 병든자들을 위해서 우리가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교로만 듣지 마세요. 그것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가서 예수님처럼 말씀을 전하고 성령사역을 감당하시되 물론 그렇게 하려면 먼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말씀을 전하고 성령사역을 하되 전문적인 어부의 자세로 감당하세요.

무슨 말입니까? 제가 낚시를 좋아하는데, 취미생활하는 것처럼 하면 굶어죽지요.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셨을 때는 물론 하나님이 하셔야 하지만 안되면 안되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애통해하며 고민하며 나갈 때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병든자를 위해서 오셨어요. 의원으로. 주님이 하신 일은 그 병든자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회복의 사역을 하셨어요.

2.긍휼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성령사역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긍휼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성령사역 중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 중 하나가 긍휼입니다. 긍휼은 성령사역에 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1)전인적인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 혹은 전인적인 치유사역 배후에는 긍휼이 있었어요. 오늘 문둥병자를 고친 사건을 보았는데, 마가복음에서는 1장에서 기록합니다. 41절을 보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서 손을 내미사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오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마14장 14절입니다.“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마15:35절입니다.“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이 기적을 배푸신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신 배후에는 긍휼이 있었어요. 소위 병든자들을 위한 긍휼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18장 일만단란트 빚진자를 용서하시는 비유가 나옵니다. 불쌍히 여겨서 탐강했습니다.여리고성에서 눈먼자를 고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24장 34절입니다.“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군대귀신 들린자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막5장 19절입니다.“19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 나인성 과부의 일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상여를 세우시고 살리십니다.

이처럼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전인적인 치유사역 배후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 민망히 여기다 긍휼이 여기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스플랑크리조마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몸의 신체의 부분들을 사용합니다. 스플랑크리조마이라는 말은 명사 스플랑크노라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 여자의 자궁을 말합니다. 남자의 창자를 말하기도 하고요. 여자가 배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 가지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 배후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2)이웃을 향한 가장 큰 긍휼 중 하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한 전인치유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오냐면, 아까 세리 집에 들어갔을 때, 병든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나는 인애(긍휼)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거기 긍휼은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웃을 향한 긍휼의 가장 핵심적인 것중 하나는 성령사역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한 회복입니다.

아까 제가 바리새인들의 제자인가 예수님의 제자인가를 보라고 했지요. 바리새인들은 외부적인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데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는 이 긍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도 없었고 그 사랑을 토대로 한 이웃을 향한 긍휼도 없었어요.

마23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들을 채소까지 다 십일조를 드렸어요.

제가 지난번에 포항에 집회를 갔다 왔는데 포항시금치가 유명한데 많이 주셨어요. 저희 어머니가 가서 한 단을 샀는데 그것의 반도 안되는데 비싸더래요. 아마 그분이 이것을 볼 것인데 감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금치를 재배한다면 단으로 따져 십일조를 드렸고 남은 것도 하나한 세서 십일조를 드렸어요 그처럼 철저하게 드렸어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긍휼이 없었어요. 병든자를 향한 긍휼이 없었어요. 

제가 지난번에도 하이디 베이커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 자주 오시더라고요. 한국목사님들과 성도들에게 많이 알려졌어요. 많은 분들은 그분의 사역을 보고 그런 것 같아요. 그분을 통해서 교회 수가 몇 천개가 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만 해도 몇 명이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수없이 일어났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현장에 가서 기름부음을 받으면 자신에게도 기름부음이 임해서 교회가 성장할 것으로 생각해서 그러는데. 핵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들은 MP3를 보면 그분이 홍콩에서 사역하다가 모잠비크로 하나님이 보냈어요. 사용하던 건물도 다른 사람을 주라고 해서 그대로 주었어요. 그런데 가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시킨 것은 그냥 고아들과 앉아있으라고 했답니다. 부모들에게 버려지고 먹을 것도 없는 아이들. 병든자를 위해서 오신 분이니까요. 그래서 같이 앉아 있었답니다. 그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으로.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일하셔서 그 수많은 고아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지금 말하는 일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핵심이 긍휼입니다. 핵심이 기적이 아닙니다. 핵심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병든자를 위해서 오신 주님의 제자로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주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할례의 문제를 놓고 유대그리스도인과 이방그리스도인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고넬료에게 보냈는지 이야기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었는데 우리와 우리 조상들도 지지 못할 짐을 그들에게 지우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나눈 다음에 야고보가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한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성령의 역사도 우리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행한 능력에 초점을 둡니다. 베드로가 대단한 사람이니까 우리가 베드로처럼 하면 대단한 능력이 나타나겠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나가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취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그 엄청난 사건은 베드로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서 자기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기에 긍휼도 있고 하나님이 주도권도 있고 엄청난 성령의 역사도 있어요. 이와같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병든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아 됩니다. 바리새인의 제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3)긍휼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합니다. 문둥병자 사건이 있지요. 예수님이 손을 대시며 치유하셨어요. 말씀하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어요. 당시에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이 종교적인 전통으로 금했어요. 물론 성경에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기록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레위기 11장 40절에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했고 레위기 13장 46절을 보면 문둥병자는 부정하다고 말했어요. 여기서 유추해서 당시에 문둥병자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져서 만지지 말게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어요.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그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놀라운 회복이 있었겠어요. 긍휼의 한 표현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잘 나옵니다. 서기관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잘난체 하지요. 선생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쉐마를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웃은 누구입니까? 하고 서기관이 묻지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었다고 합니다. 나는 다 했습니다는 투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듭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있었어요. 거기를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피해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이해가 됩니다. 그 당시 이해로 죽은 시체를 만지만 부정하게 됩니다. 부정하게 되지 않기 위해서 피해간 것은 한편으로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바리새인의 문제와 같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내려갔다는 것을 보면 이들도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시제를 만져도 정결의 기간을 지나면 되는 것입니다. 당장 제사지는데 문제가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외부적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긍휼이 없었어요. 이것이 문제였어요. 당시에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긍휼이 없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없으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었어요.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지나갔어요. 상처를 치유하며 여관에 맡깁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이렇게 묻습니다. 당당하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던 서기관에게 36절에서,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누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섬기데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그를 보고 불쌍이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웃을 향한 긍휼이 있었습니다. 긍휼의 한 가지 표현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카센타 하나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겨야 합니다. 저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자세로 카센타를 하는 분을 만나면 성도들을 다 소개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찾기가 힘들어요. 예수 믿는 사람중에서도. 다 자기 입장에서 섬겨요. 자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상대방들은.

성령사역을 함에 있어서 긍휼이 토대가 되어야 하는데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긍휼의 한 가지 표현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4)긍휼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입니다. 의식도 본질을 담는 수단이며 그릇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본질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부분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긍휼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3장 23절을 보면,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똑같은 말씀이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의 대신에 공의라는 말을 쓰고 긍휼이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애 헷세드라는 말로 사랑입니다.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되어야 이웃에 대한 사랑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과 이웃을 향한 긍휼이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마9장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한 이웃을 향한 긍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긍휼을 토대로한 성령의 사역 전인적인 치유를 말하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긍휼을 원하는데 제사를 원하지 않는데 너희는 그것이 없다 너희는 그 뜻을 알라고 하신 내용을 보면, 긍휼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에 긍휼을 토대로 한 성령사역이 신앙의 본질에 해당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중요합니다. 그처럼 핵심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오늘 설교를 다 마치는데 우리가 살펴보는대로 전인적인 치유사역이 어떻게 예수님이 감당하신 구속사역의 한 핵심이요 신앙의 본질의 한 핵심적인 부붕인 것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오신 목적 자체가 병든자를 위해 의사로 오신 것을 안다면, 포도나무 교회에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반복적으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씀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3.성령의 사역과 예배
이렇게 성령의 사역이 핵심인데, 이 성령의 사역을 위해 예배회복이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회복되어야 성령이 자유롭게 운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유롭게 운행하셔야 이런 전인적인 치유사역, 성령사역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귀신들려 억압당할 때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기를 연주할 때 귀신이 떠난 것처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회복될 때, 그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더 자유롭게 운행하사 우리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역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예배가 회복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성령사역과 예배회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대로 성령사역이 전인적인 치유사역으로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핵심이요 신앙의 본질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종교적인 몇 가지 의식을 지키는 것에 치중했지만 사랑도 긍휼도 없는 신앙의 본질도 없는 모양 뿐인 삶에서 벗어나서 진실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병든자를 위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해서 그들이 구원받고 치유받고 회복되어져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과 은혜가 회복되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나가서 섬기고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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