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장 6절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앞으로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하나하나 살펴볼 것입니다. 이것은 가짜 예배입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성대한 예배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예배입니다. 이런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토대에서 왜 잘못되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2주 동안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약소이 우리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반대로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핵심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펴봄으로 우리 자신을 비추어봅시다. 전환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전환하고 돌이키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부 예배 때 설교하고 기도하는 중에 고후10장에 보면 견고한 진이 나오는데 견고한 진은 우리 사고체계에 있어요. 그래서 이 견고한 진은 우리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우리 삶이 그리스도께 복종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이런 혼돈이 가득한 것을 보이셨어요. 이 혼돈이 견고한 진으로 작용해서 실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리 삶이 하나님께 복종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우리는 안일함과 높아진 생각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이셨어요.
오늘 2부 예배를 하며 광고하면서 설교하면서 2부 예배도 예외가 아님을 볼 수 있어요. 오늘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전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1.사단의 타락과 자기중심적이 삶
자기중심적인 삶의 가장 원조는 사단입니다. 이사야 14:12-15절을 보수주의 학자들은 천사장 루시퍼의 타락으로 사단이 된 이야기라고 믿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가장 훌륭한 피조물 중에 하나였습니다. 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루시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습니다. 결과는 음부의 맨 밑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피조물 중에 아무도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루시퍼가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더 이상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사는 것을 버리고 자기가 자기 하나님 되기를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하나님 되는 것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타락의 핵심은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우리 인간중에 아무도 창조주 하나님처럼 될 수 없습니다. 결과는 음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단이 하나님께로부터 끌어내리자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걸작품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을 미혹하여 넘어지게 시험합니다.
2.인류의 타락과 자기중심적인 삶
이런 부분을 살펴보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이 얼마나 무섭과 타락의 핵심인가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이 아담을 시험할 때 어떻게 시험합니까? 네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지 마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야 네가 네 하나님이 돼 하나님처럼 되라는 말이야라는 것입니다.
창3:1-6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은 사단을 말합니다. 동산중앙에 있는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말합니다. 선악과를 말합니다. 우리가 사단의 거짓말을 진정한 진리로 믿고 받아들이는 한 우리의 삶은 사단의 견고한 진에 속아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삶을 도적질당합니다. 그래서 사단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입니다. 사단의 가장 큰 무기는 거짓말입니다. 사단은 거짓말하는 자의 아비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사단은 안죽어 그럽니다. 이 거짓말을 받아들이니까 여자가 나무를 보니까 다르게 보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따먹었습니다.
여기보면, 인류타락에 대한 기록인데요. 사단이 하나님처럼 되라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2주전에 살펴보았는데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살도록 다시 말해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뭐라고 합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말은 그저 열매 하나 따먹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서 벗어나서 네 스스로 하나님 되라는 말입니다. 루시퍼가 타락한 것과 똑같은 성격으로 인류를 미혹합니다. 그리고 아담과하와는 그 유혹에 넘어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사는 것을 버리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하나님되기를 선택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타락의 본질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자기중심적이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3.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사단의 타락이나 인간의 타락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중심적이 삶은 타락의 본질이요 죄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모든 죄의 본질이며 원조입니다. 사53장을 보면,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고난의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 사53장입니다. 6절에서 인류의 타락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특징을 살펴보았지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반대로 자기중심적인 삶은 자기 자원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보면 인류의 타락을 한 마디로 우리는 각기 그릇 행하여 자기 길로 갔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엡2:1-3절을 보면 바울은 불신자들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불신자들의 삶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 없는 불신자의 삶을 죄와 허물 가운데 죽은 삶이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있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있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를 용서받고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불신자들의 삶의 특징을 세 가지고 말합니다. 하나는 이 세상풍속을 따른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른다. 타락한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산다고 표현합니다. 타락한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바로 자기중심적이 삶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볼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풍속대로 따르고 타락한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이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이때 자기는 알건 모르건 인정하건 안하건 사단을 따르는 삶입니다. 여러분 불신자들중에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은 바로 사단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처럼 타락의 본질이 자기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종교 중에 의식과 헌신이 있다 해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것은 하나님 없는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이사야 시대만 해도 수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안식일뿐아니라 각종 절기와 월삯을 드렸습니다. 가장 살지고 좋은 수많은 짐승의 희생을 드렸고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실 예배만 해도 오늘날 성도들보다 잘 드렸으면 드렸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헌신과 희생과 예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향해 소돔의 백성들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1장 4절을 보면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여호와를 만홀이 여겨 멀리 물러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의식이 많을지라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것이 철저하게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아무리 빼놓지 않고 나와 예배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헌신해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우리는 철저하게 타락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4.자기중심적인 삶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 가운데 넘치는 하나님의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지키심 하나님의 임재 기도응답 필요 채우심 하나하나의 실제적이 하나님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생명인데, 이런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곧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우리에게 종교적직 모양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교적인 화려함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예배만 해도 우리 가운데 화려한 예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제와 생명들은 걷힙니다. 성경적인 이론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교리들은 다 믿을 수 있습니다. 다 고백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그 실제적이 역사들은 다 걷힙니다. 종교적인 모양과 외부적인 의식과 교리만 남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창3장 7-19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간이 없어서 성경은 안읽고 내용만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끊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고통이 아닙니다. 지옥의 본질은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단절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창3:8-9절을 보면,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채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오늘날도 자기중심적인 삶에서는 어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하나님의 임재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아무리 종교적으로 헌신하고 아무리 많이 예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재와 임재는 함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명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했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간격이 생겼습니다. 저들이 벗은 줄로 알고 부끄러워 가렸습니다. 가장 가까워야할 부부 사이에도 간격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 사이에는 온전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자 가장 가까운 사이에 간격이 생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오늘날 우리 포도나무 교회도 갈등하는 가정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을 무시하지 않고 마음에 품고 기도합니다. 하나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포도나무 교회는 한 가정만 무너졌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도왔는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분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삶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 한 사람과만이라도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지라도 상대방이 여러분을 배척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가운데는 상대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관계가 무너져 있다면 하나님과 여러분의관계가 무너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계에서도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정서적으로 병들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10절입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사실 마음의 상처들과 병은 자기중심적인 삶의 결과입니다. 치유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전환입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 가지 치유의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병들었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12-13절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환경이 저주받았습니다.16-19절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육신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19-23절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진정한 안식과 평강이 거두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있습니다.
마11:28-20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느 시대건 이사야 시대건 예레미야 시대건 하나님백성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할 때 거기에는 진정한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잔락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탕자의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서 떠났지요.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기를 거절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생명이 고갈되었습니다. 돼지밥을 먹고자 했지만 그것도 고하지 못할 정도로 그만큼 철저하게 생명이 고갈된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회복되는 것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하나님이 생명이 없습니다.
여러분 꿩이 매가 뜨면 머리만 쳐막고 있답니다. 우수운 일이지오. 몸통은 다 드러나 있는데. 이 말하니까 여러분 웃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경우가 많아요. 직면하려 하지 않아요. 적당히 넘어가려고 해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4.자기중심적인 삶과 세상과 사단
엡2:1-3절에 나오는 불신자들의 삶의 특징을 살펴보았어요. 세 가지가 삼위일체처럼 함께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과 세상과 사단은 항상 같이 갑니다.
1)자기중심적인 삶과 세상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더라도 자기중심적이 삶을 살면 안믿는 세상에서 잘받아 들여집니다.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잇기 때문입니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서로 호환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한 하나님과 세상은 하나님중심적인 가치관과 세상적인 가치관은 빛과 어둠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과 세상이 다른 것처럼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과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어떠합니까?
2)자기중심적인 삶과 사단
자기중심적인 삶과 사단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배후에는 항상 사단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의 원조가 사단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시험할 때도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시험했습니다.
마16:1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지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나.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기뻐하십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22절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NIV입니다. 예수님을 한쪽에 따로 세우고 꾸짖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 속에 사단이 들어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말 배후에 사단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단의 준 감동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알았건 몰랐던 자기가 사단에게 쓰임받기를 원했던 안했던 배후에 사단이 있고 사단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다시말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그럽니다. 그러니까 자기중심적인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의 소욕을 이루려 한다고 합니다.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마귀를 섬겼다고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마귀를 섬기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았던 몰랐던 그들은 실제로 사단의 소욕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적하고 성령을 대적하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니까 그렇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 사단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면 우리가 실제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5.자기중심적인 삶으로는 절대로 성령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갈5:16-25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우리 신앙생활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령의 사역 없이 우리 삶의 한 가지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신앙생활이 성령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25절에서는 성령으로 인한 삶을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NIV는 성령으로 함께 걸을지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래요.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닌데 앞에서 할 이야기인데. 우리 비전프로제트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자기자원으로 하려고 하니까 그럽니다. 그런데 고후8-9장은 헌금에 대한 구절인데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드릴 씨앗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으로 품고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할 때 하나님이 드릴 씨앗도 주시고 드릴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다루고 계시는데 주권을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한 삶인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성령에 의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갈5:16절 이하입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육체를 따르면 타락한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삶을 살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원하고 사모해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성령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신을 이기는 길은 무엇인가?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절대로 성령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면 반드시 자기자신을 부인해야돼. 네 자신이 반드시 죽어야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1부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이 자꾸 제 마음 속에 사랑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거든요. 어떤 일로 한 사람이 생겼어요. 그래서 많이 축복하고 내려놓았는데 이것까지는 쉬었는데 나름대로 1부 예배시간에 계속 생각나게 하시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누구를 사랑할 것인지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영원히 포기했다는 말씀이 생각하는 거여요. 그러면서 1부 예배때 드렸던 찬양중 하나가 우리 모두가 양과 같이 길을 잃고 제 갈 길로 갔네......였어요. 그 찬양을 드렸는데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을 잃고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상황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가 무엇이 중요하냐가 비추어져요. 그러면서 하나님은 내가 택한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사실 오늘 설교 많이 우리들 들었습니다. 다 아는 설교라고 생각할지 몰라요. 그런데 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에서 재정이면 재정 관계면 관계 등에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고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사단의 견고한 진인 혼돈이 우리 가운데 가득해서 우리 마음이 높아지게 하고 우리 삶이 우리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되지 못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들 일입니다. 이 상태가 너무나 심각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혼동되어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 앞에 가려지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임재가 대적될만큼 우리 가운데 지금 혼돈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려면 자기중심적인 삶이 버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면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삶이 실제로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예수를 믿는 우리의 옛사람도 거기서 함께 못박아 죽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모든 태도와 같이 그것이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음을 인식하고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실제적인 영역에서 말입니다.
6.자기중심적인 삶과 하나님의 심판
자기중심적인 삶은 타락한 삶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모양이 가득할지라도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삶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걷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기를 보려면 그것을 태스트할 수 있는 것은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테스트해볼 수 있는 좋은 기준이 우리 가운데 지금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장한다. 헌금이 얼마나 나왔가 출석하는 성도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볼 때 여러분 자신과 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까? 물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히 걷힌채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했으면서도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계속해서 살면 악한 자의 지배를 받는 것 최종적인 멸망을 받는 것 등 더욱 큰 심판이 닥칠 것입니다.
1)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된 체 이미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정반대로 자기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렘12장 1-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예레미야는 원래 선지자노릇하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발 저를 보내주세요 하는 분들이 많은데, 하나님이 너는 내가 보는 사람에게 가서 내가 전하는 말만 전하라고 해서 가서 전했는데 조롱과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 예레미야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자들이 형통하고 반역한 자들이 안락한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온갖 박해를 당하면서 순종하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이 악한 자와 반역자가 누구냐 하면 그 당시 유다백성 예루살렘 거민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닥쳤고 임한 시대입니다. 그때 수는 몇 명이라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상당수는 세상적으로 잘되었고 형통하고 안락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사업이 잘되고 아이들 잘 크고 집안에 근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대다수의 선지자들은 거짓선지자들이었는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많은 에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저 시바에서 오는 향품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이 물질에 복을 더하사 산업이 잘되게 하실 것입니다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대하게 예배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문을 지키시고 자식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사업이 잘되고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집안에 큰 문제가 없었으니 누구보다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햇습니다.
그것을 예레미야가 보고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걷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산업이 발달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형통한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전제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잇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와 임재, 하나님 안에서 거룩함, 주를 향한 열정, 하나님이 우리 삶을 실제로 간섭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길로 돌이키고 계시는지 우리 삶속을 드러내서 어둠에서 돌이키게 하고 계신지를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곁길로 갈 때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는 간섭이 있는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보이시고 동참하게 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가 잇는지, 잘 분별해 보셔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심각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걷혀 있는데 직장에서 승진했다고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믿는 사람도 직장에서 승진하고 자녀들이 서울대에 들어가서 박사되고 교수됩니다. 사업도 잘됩니다.
끝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의 특징
자기 자원으로 세상의 자원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세상의 목적을 위해 자기 방법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종교의 모양으로 옷을 갈아있는 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하나님과 실제로는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겉으로는 종교적인 옷을 입혀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이것이 이사야 시대이고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이고 이것이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거기에도 성대한 예배가 있었고 종교적인 헌신이 있었고 성경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오히려 종교가 돕습니다.
오늘 저는 자기중심적인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비추어져서 혼돈들이 비추어지고 견고한 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길을 보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가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자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십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의 생각과 삶이 조정되어지고 하나님을 더욱 아는 자리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과 교회 위에 운행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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