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자들이 예언자는 아니지만, ‘예언적 기름부음’음(Prophetic anointing)은 받을 수 있다. 우리는(성도들을 권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예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4:31).
예언적 기름 부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소리)으로, 그분의 마음과 뜻과 목적을 대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4;1)
때로는 나는 새벽에 갑자기 잠이 깼다. 마치 전혀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정신이 말짱했다. 내 자신이 어리둥절했지만, 말짱한 정신으로
새벽에 깬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는다. 때로는 찬송으로 그러나 많은 때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오직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힐 때가 더 많았다.
누군가가 이 시간에, 나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느낌에 사로 잡혀 안절부절
할 때도 있었고... 무엇을 ... 어떻게 누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해야 할 지 모르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나의 영으로(방언기도) 한참 기도한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위기가 지나갔다고 느껴지면... 다시 잠자리에 들곤 했다.
선한 목자 - 없지만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있다. 이러한 일이 자주 있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기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도와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羊)이며, 그분의 모든 양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때로는 이런 유형의 기도를 ‘예언적 중보기도’라고 한다. 예언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prophe teia)인데,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중보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툭시스’ enteuxis)이다. 엔툭시스는
“대화하기 위해 만나다”라는 뜻이다. 엔툭시스는 중재를 위해 왕을 알현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2:1 절(한글개역성경에서는
‘도고’로 표기됨)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와 응답을 구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중보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이타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두 단어를 합친 예언적 중보기도의 뜻은 다음과 같다.
* 영적 대화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
*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성경으로 그 음성을 분별하여) 그분의 마음과 의중을 말하는 것
선포하는
것
하나님의 의중 파악하기 - 중보기도를 드릴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마음과 의중을 파악한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자기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릴 뿐, 하나님의 의중은 전혀 파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하고, 그분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분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큰 도약을 이룰 수 있다.
예언적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는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진다(창1:26-28). 시편기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놀라운 임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상기시킨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 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시편8:4-6]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이 땅 위에 자신의 대리자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어 그분의 피 값으로 첫 사람(아담)의 실패를 구속(救贖)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할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은
비록 연약하고 불완전하지만, 거듭나고 그 마음에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는 계획,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 계획은 미래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히2;8,9).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지금 이 계획에 참여하도록 하는 특권을 주셨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특권, 그러나 죄로 인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는 특권까지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2:15)
우리의 책임 -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책임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일을
하도록 계획하셨다. 타락 전에 노동은 벌의 형태가 아니라 성취의 한 형태였다. 일이 고되고 힘들게 된 것은 타락 이후이다.(창3:15-17). 에덴 동산은 잡초를 뽑아줄 필요는 없었으나 보살필 필요는 있었다. 가시와
엉겅퀴도 아직 귀찮은 정도는 아니었다. 동산은 손질과 관리가 필요했다.
동산을 보살피는 하나님의 청지기인 인간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었다.
1. 경작하는 일 - 번째 책임은 동산을 경작하는 것이었다. ‘경작하다(vate)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아바드’ (abad)이다. 아바드, 즉
‘경작하다’는 말은 “섬기다, 쟁기질하다, 예배하다, 예배하게
하다”는 뜻이 있다. 다스림’을 제사장의 역할로 묘사한다면, ‘특별한 의미에서, 아바드는 레위기의 문맥에서 여호와를 섬긴다는 뜻이다”. 호세아 10:11절은 “유다가 밭을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이 중보기도자인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스린다는 것은 동산을 간다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마음의 밭을 갈아
마음을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하게 한다. 중보기도자인 우리는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마음 문이 열려 하 나님을 인정하며 예배할 수 있게 된다.
2. 지키는 일 - 에덴동산에서의 두 번째 책임은 ‘지키는
일’이다. ‘지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마르’(shamar)이다. 조드히아테스는 ‘샤마르’를
“억제하다, 경계 내에 묶어두다, 가시 같은 것으로 주변에 울타리를 치다, 양이나 소떼를 지키다, 예언자로서 보호하다”로 정의한다
아담은 특히 기존의 에덴동산 경계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창2:15). 그는 파수꾼이 양떼나 소떼를 지키듯이 동산을 지켜야 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동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바꿔 말하면, 그는 파수꾼으로서 동산을 아주 세심하게 돌봐야 했다.
성경에서 파수꾼이란 적인 성(城)을
공격하려 하는지 감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성벽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왕께 알려야
했다. 특별히 추수기에는 파수꾼에게 또 다른 역할이 주어졌다. 들판과
포도밭을 지키는 일이었다.
중보기도자인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리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중보기도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가정, 이웃, 국가 등... 이러한 자리에 가시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쳐서 원수의
접근을 막아야 한다.
회복된 직무 – 기도자들이 예언자는 아니지만 ‘예언적 기름부음’ (prophetic anointing)은 받을 수 있다. 우리는(성도들을 권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예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4;31). 예언적
기름 부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소리)으로, 그분의 마음과 뜻과 목적을 대변할 수 있게 해준다.
위기의 순간에 성령께서 중보기도자들을 깨우실 때 그들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자주 일어난다.
* 지금 나는 단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 나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이나 이 상황을 돌보시리라고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 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불신앙의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실 때
1. 우리의 마음과 원수(사탄)는
우리의 귓전에 중보기도를 하지 말라고 속삭인다
2.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3. 우리의 영(靈)이 깨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요구하신 일을 놓치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의 소리가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 후에 세례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1:23)고 외쳤다. 중보기도의 세대라 할 수 있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례 요한 처럼 하나님의 소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더러 하나님의 ‘회의 실’로 들어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 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계4:1)
회복된 인간 – 하나님이 성숙한 아담을
그 회의실의 일원이 되도록 계획하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담의 거역과 타락으로 그는 이 계획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자들에게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라고 명하신다. 이들은 성삼위(聖三位)의
회의실에 들어가야 한다.
구약시대의 여러 사람들이 이 회의의 임시 회원이었다.“구약에 나오는 몇몇
성도들은 하나님의 회의의 대표 회원이자 예언자들이다. 첫 번째가 아브라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멸망을 말씀하실 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고 자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님의 계획을 들려주시고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다. 나머지 이야기는 모두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서열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공경하는 자세로 말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분명히 말씀 드렸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창20:7).
하나님의 회의의 회원으로서 선지자 아브라함은 회의장에서 탄원이나 청원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대표 회원은 모세이다.
그는 예서 언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이며(민12;6-8),
세례 요한 이전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회의에서 정보를 얻었고 그 회의의
결정을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시내 산을 오르내리면서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회의장에서 강하게 논쟁했으며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놓기 까지’ 했다. (출32:7-14,
30-35; 민14;13-19)
모세는 자신만이 선지자가 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9).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선지자로 세워주시길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경영하길 원하셨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하셨다. 인간은 주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예배하고 싶어하도록 동산
경작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왕으로서의 인간의 역할이 포함되었다. 인간은 동산을 지켜야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할 침입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동산을 지켜야 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은 그들을 선지자(예언자)의 음성으로 삼는 것이었다. 인간은 중보기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과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하늘 회의의 결정 사항을 선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의 나라를 원하셨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