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009

21. 나사렛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윤리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소식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 헌장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살아야 할 삶의 규범이요 윤리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구원 소식과 더불어 구원받은 신자들의 삶의 윤리가 포함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율법을 폐기(廢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成就)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신자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수양을 해서 실천하는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신자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할 윤리이다. 이 윤리는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포되었다.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 명령하신다. 복음에는 직설법이 먼저고 다음에 명령법이 온다. 모세를 통해 주신 구약의 십계명에도 보면 먼저 직설법이 있다. 직설법이란 “나는 너희를 종 된 이집트에서 인도해 온 너희 나나님 여호와다”이다. 그리고 명령법이 나온다. 명령법이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이다.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 다음 “그렇게 살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
예수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동트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 자체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권능으로 오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권능으로 임하는 나라는 예수가 장차 메시아적 권능으로 오시는 재림(再臨)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의 부활 이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통트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안에서 확장되어 나간다.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전주(前奏)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F. F. Bruce, The Real Jesus, 68).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도달하고 그 이후에는 그가 보내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세상에서 지속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하여 비로소 권능화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부활 이전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속에서 동트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표시하는 윤리적 원리들은 그의 메시아적 사역 안에서 선포되고 나타난다.

윤리적 극단성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설교하신다. 하나님 나라 윤리의 독특성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요, 둘째는 사랑의 원리다. 예수는 신자들이 자선을 하되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기도를 할 때 외모로 하지 말고, 금식도 보이기 위하여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내면을 보신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7-18). 이 내면성은 율법의 정신으로서 바리새인들이 보지 못한 율법의 핵심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보다는 외면적인 규례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이들은 율법의 정신을 보지 못한 채 율법의 외형적 준수에만 치중하다가 외식과 위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둘째, 사랑의 원리란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송사하는 자에게 그 요구를 갑절로 들어주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복을 기원하라고 가르치신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을 받을 것(마 5:9)이라고 하신다. 신자들의 윤리가 이방인의 윤리보다 높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7). 하나님 나라 신자의 윤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명령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 윤리의 극단성(radicality)을 천명하고 계신다. 이 극단성은 인간 생각으로는 실천될 수 없는 불가능한 윤리를 말하고 있다. 이 윤리가 강조하는 중요성은 외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에 있다. 율법의 규례적 측면(외면성)을 넘어서 그 정신(내면성)을 살리는 사랑의 윤리는 역사적 예수가 가르친 윤리적 독특성이었다. 사랑의 윤리는 유대교의 윤리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의 독특성이다.

잠정적 윤리가 아닌 항구적 윤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윤리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 신자들이 행할 잠정적인 삶의 규범이라고 본다. 이들은 예수가 가르친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항구적 윤리가 아니라 중간시기의 윤리였다고 본다. 이 윤리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신자들이 잠정적으로 행해야 할 삶의 지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영구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통용되는 일시적인 타당성을 갖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윤리를 중간기 윤리 내지 잠정적 윤리(an interim ethics)라고 칭한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처가 이러한 견해를 표명한 대표적 학자이다 (A.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London: A. & C. Black, 1910 그리고 The Mystery of the Kingdom of God, London: A. & C. Black, 1925). 슈바이처는 예수가 기대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고상한 환상”(a noble delusion)이라고 보았다. 슈바이처의 견해에 의하면 실제로는 역사의 종말이 없고, 도래하지 않는 종말에 앞서 예수가 짧은 막간(brief interval)에서 실천을 제시하는 중간기 윤리는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실천할 필요가 없는 윤리이다.

그러나 이 윤리적 주제에 대한 슈바이처 입장의 역설이 있다. 신약 신학자로서 슈바이처는 중간기 윤리가 종말론적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의료 선교사로서 슈바이처는 신학, 의학, 음악에 있어서 문명사회에서 직업적 출세의 전망을 포기하고 서아프리카의 렘바르네에 가서 흑인들에게 봉사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 동기는 그가 해석한 중간기 윤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긴 예수의 윤리를 선교사로서는 실천했던 것이다. 여기에 슈바이처 삶의 역설이 있다.

그러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가르친 것은 중간기의 임시 윤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그것은 항구적인 사랑의 윤리이다. 슈바이처가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환상(illusion)으로 본 것은 복음서를 전혀 성경적 세계상이 아닌 현대의 실증주의적 세계관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행한 종말에 관한 설교란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의 세계관이 이 세상을 멸망할 도성 처럼 보는 묵시록적 세계관에 포로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해석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 선포의 비종말론화요, 예수 선포의 비신화론적 해석으로서 역사적 예수의 설교와 윤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헌장으로서 오늘날에도 타당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종말론적 윤리 운동
이러한 사랑의 윤리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을 때 가능한 윤리이다. 왼빰을 맞거든 오른뺨을 돌려주고, 오 리를 가자면 십 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는 윤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이러한 윤리는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향하여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향하여 축복하는 윤리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옛 질서, 옛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가 아니라 새 질서, 새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s)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예수의 인격과 삶과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다. 오늘도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종말론적 윤리 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에서도 이러한 종말론적 윤리운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느 양반이 자기가 여태까지 데리고 있던 종을 해방시킨 사건이 있었다. 예수 믿고 회개한 사람이 중국집에 와서 주인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된 외상값을 갚음으로써 주인을 놀라게 했다. 길선주 장로는 별세한 친구의 돈을 자신이 아간처럼 훔쳤다고 보통 사람 같으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일을 공중 앞에 참회하였다. 옛 질서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은 사건이 새 질서에서는 문제가 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윤리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운동은 파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도 미국에서 시작된 청소년 혼전 순결운동이나 도덕 재무장운동, 어버이운동, 가정지키기, 피스메이커(peacemaker)운동 등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반영하는 운동들이 파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으나 역사 속에서 이에 공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그 세력을 키우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겨자씨 운동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조건없는 사랑
2008년 12월 21일 KBS 스페셜로 방영된 “엘렌 가족 이야기, 그 후 8년”은 감동적이었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이 세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살고 있는 69세인 시각 장애인 올스 니콜스 부부의 이야기다. 니콜스는 연방공무원으로서 사회보장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사회보장국에서 42년간이나 이 일에 종사하여왔다.

이들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한국에서 버려진 시각장애아 4명 어린이를 차례로 입양하여 성공적으로 키워내었다. 이들은 이 세상 속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다. 이들의 일이 한인사회에서 알려지자 밀알 선교회에서 이 부부를 초청하였다. 막내는 25년 전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담요와 젖병에 싸서 버려진 아이였다. 시각장애뿐 아니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였다. 막내는 장애인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집에 오면 똥오줌을 더 많이 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빠 니콜스는 그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준다. 언니 세라는 한국명 신경미인데 정상인과 결혼하여 정상 아기를 분만하여 잘 살고 있다. 세라는 자폐증을 지닌 막내 동생과 특별한 교감을 갖고 있다.

니콜스 부부는 자녀들에게 항상 식사시간에 다음 감사 기도문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아멘”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다. 니콜스 부부는 말한다: “사랑은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말할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입양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조건없이 사랑할 뿐이다.” 니콜스 부부의 사랑은 예수의 종말론적 사랑에 의하여 역동화되고 있다.

성령의 윤리
예수께서 가르치신 조건없는 사랑의 윤리 실천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된다. 예수가 보내어 주시는 다른 보혜사,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어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자발성으로 사랑하도록 된다. 예수는 안식일 가버나움에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자신이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곧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한 예수의 설교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희락과 평안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그를 따르는 신자의 공동체 안에서 오늘도 파편적으로 실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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