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갈망하며 열에 들뜬 자인가? 그 증상은 뚜렷하다. 만일 당신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몰두한다면, 형식적인 교회 행사나 인간적인 방식을 혐오할 뿐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흥분을 겨냥한 감정의 과대포장, 마치 종교라는 무대 위에 올려진 공연 같은 뜨뜻미지근한 예배에 염증을 느낄 것이 분명하다.
거룩한 갈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이럴 때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영역으로 이끌려 나오신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킬 때 이것이 가능하다.
언제나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성에의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기상조건과 알맞은 습도, 실내외의 적당한 기온차가 있으면 독특한 형태의 성에로 만들어져 우리 눈에 보이듯이, 영적 영역에 알맞은 영적 온도변화가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라는 결정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영적 온도변화가 없기에 그분을 만날 수 없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던 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라는 영원한 형태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자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제사장의 직분을 침해하려했고 그로 인해 문둥병에 걸려 죽었다. 교만한 웃시야가 자기 고집대로 하나님과 접촉하려 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로 이어졌다.
오늘날 교회 역시 우리 방식대로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웃시야 신드롬을 겪고 있다. 바울이 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내치실 것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예배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한다. 웃시야 신드롬을 치유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타는 입술과 뜨거운 가슴이다. 평생을 의지하던 웃시야 왕 사후 의지할 곳이 없어 비통해하는 이사야에게 비로소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이셨다. 우리의 육신의 왕이 죽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영의 왕과 영의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도 이사야는 유다민족을 향해 많은 예언을 해왔지만, 하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사고와 삶은 완전히 변했다. 이사야 1장에서 5장까지는 이사야 자신과 민족의 죄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내용으로 일관하다가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60장에 걸쳐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예언적 선포를 한다. 그는 전능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에 대해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인간 중심의 설교와 찬양에 환멸을 느끼게 되며 이전과 전혀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흥분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당신의 운명과 미래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런 문제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 우리에게 관심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이상, 내 방법을 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신다.
자아를 버리고, 야망을 포기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님과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임재의 갈망과 감격중에서...토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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