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시89:5)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형식주의가 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형식주의와 형식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 형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형식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서 형식주의는 자신의 영성을 갉아먹는 요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헌금을 할 때도 내가 교회를 다닌 게 얼마인지, 내가 직분이 이런데 헌금을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의 모습은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는 헌금이 아닙니다. 교회에 조금 더 보탬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업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개업했으니 예배를 드려야 잘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는 다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쳐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강도 만난 자가 예루살렘 중심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돕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맹이 없는 신앙의 형식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고 나아가야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형식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형식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바로 사도 바울에게 그런 의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돕는 형식이 아니라 은혜를 바탕으로 한 관계였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7절 말씀을 보면 감옥에 갇힌 어려운 상태 속에 있는 사도 바울이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4절을 보면 괴로움에 참여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잘못 없이 감옥에 갇혔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사역에 물질적 필요를 도운 교회가 빌립보교회 외에 아무도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후원하고 도왔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구절에서 반복되는 참여한다는 말은 함께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즉, 함께 기쁨과 즐거움과 아픔을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기도함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로만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도를 의미할 것입니다. 둘째는 동정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해 사도 바울이 풍족함을 누렸듯이 온 성도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시길 축복합니다.(목동제일교회 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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