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2010

기적은 있는 것이냐? 종교 다원주의 비판 (5)

성경에는 대단히 많은 기적 (miracle) 이야기가 있다. 이런 기적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냐 ?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직결 되어 있다. 무신론자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존재 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 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기적의 유무 여하를 알려고 하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존재 한다면,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시면서, 또한 ‘자유로운’ 인격적인 하나님 (God as a person) 이시다. 우리 인간에게도 있는 자유가 하나님에게는 없다고 믿기는 어렵다.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는 다음 글에서 정식으로 다룰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없다’ 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된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씨는 얼마전 한 강연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과 같은 기적을 믿는 사람은 4 살된 어린 아이의 수준 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것은 망언이다. 그는 기적을 부인하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을 믿는지도 의문시 된다. 우리는 오 씨를 한심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나, 우리가 그를 무시해 버리지 않고 그에게 주목 하는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가 일부 한인들에게 대단히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통적 기독교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비판을 서슴치 않는 경솔한 지식인의 한 표본으로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그 것을 기독교의 입장과 대조 시킴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다.

오 씨는 최근 또 하나의 책을 출판 했는데 이 책에서도 잘못된 말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성경의 문자에 사로잡혀 문자대로 해석하는 것은 유치하다며,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하라고 충고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그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하고있다.
 
필자는 이런 오만과 무례함을 본 기억이 없다. 이것은 불교신자가 아닌 내가 불자들에게 불경을 옳게 해석하는 법을 강의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오 씨의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는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문자대로 해석할 말씀도 있고, 그 참 뜻을 헤아리는 해석을 해야 할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두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오 씨는 이 구별을 안하고 있다.

문자대로 해석하고 이해 할 성경 구절의 예를 들겠다. 구약성경 에서는 출애급기 34:5-6, 이사야 45:21-22, 신약성경에서는 요한복음 3:16.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 참 뜻을 이해해야 할 성구의 예는 요한복음 10:11, 15 : 1-2 이다. 문자대로 해석해야 할 말씀 “여호와 께서 그 (모세)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사랑과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출 34:5-6)

문자대로 해석하지 말고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말씀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 10:11) “(예수 께서 가라사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한 15:1)

성경을 상식에 따라 해석하라는 오 씨의 주장에는 <숨은 전제> 가 있다. 그것은 동정녀 탄생과 부활, 승천과 같은 기적과 초자연 현상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숨은 전제>는 어느 특정한 세계관, 또는 무신론에 근거가 있는데, 오 씨는 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숨은 전제가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느 특정한 세계관이나 무신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그가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무신론 (atheism)도 이런 세계관도 성경과 기독교의 기본 입장과는 상용될 수 없다.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하라고 했는데, 오 씨는 인간의 상식이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변해 왔음을 모르는 모양이다.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 유럽인들은 지금부터 200년 또는300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는 식탁의 표면과 같이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다. 즉 이른바 <천동설(天動說)>을 믿었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 라는 천문학자는 <지동설(地動說)>을 제창하여 당대인들로 부터 ‘바보’ 라고 조소를 받았다. 지동설은 천동설의 정반대 이론이다. 즉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론이다.

그 보다 약 100년후에, 이태리의 천문학자 갈리레오(1564-1642)는 책을 출판하여 지동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 천문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갈리레오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학설 때문에 그는 죄인 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 후 몇세기 동안 유럽인들은 여전히 천동설을 믿었다. 이 것이 그 시대의 <상식> 이었던 것이다. 아마 일부 동양인과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20세기 초반까지도 지구는 평평하며, 지구가 우주의, 또는 태양계의 중심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것이 그 시대의 <상식> 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있는 현대인은 아마 없거나, 있더라도 극소수일 것이다. 즉 <상식>이 변한 것이다. 천문학에 관한 상식만이 아니라, 인간의 거의 모든 상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오 씨의 주장대로 성경을 상식에 맞게 해석한다면, 성경해석과 신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도 시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종교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일 수가 없다. 만일 교회가 오 씨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머지 않아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오씨는 그동안 여러 옳지못한 말을 했다. 그는 한인들에게 이미 많은 해독을 끼친 사람인데, 아직도 끼치고 있다. 오씨는 자기 영혼의 평안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중하고 근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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