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2010

하나님의 아는 지식은 무엇인가? – 코리 러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평생 동안 그분에 대해 말해왔던 것은 지적인 차원에서 동의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평생을 변화시킬 만큼 훨씬 더 깊은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스스로를 무엇이라 계시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떠한 분이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빠져들도록 우리를 유혹하여, 결국 우리가 입을 다물고 우리 눈이 인도할 것이다. 이 질문들은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끌면서 그 과정 중에 우리의 상태를 거침없이 드러낼 것이다. 이 질문들을 참으로 진흙인 우리의 상태와, 참으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지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던 욥에게 110개에 달하는 질문을 던지셨다(39-41). 그 질문을 대면한 욥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들어서는 방법은 그분에 대하여 당신이 생각하고 또한 알고 있는 것이 그분의 실체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세월 동안 그분에 대해 오만하고 경솔하게 행동하고 만다. 우리는 반드시 욥의 친구 엘리후의 선포로 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36:26). A.W 토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존엄의 완전히 밑바닥에 위치한 것이라고 한다.(A.W. Tozer, The knowledge of the Holy)

하나님은 범접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오직 한 분이시다. 비록 세상에 있는 그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배웠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분의 속삭임만을 들은 것뿐이며, 그분의 행하시는 길의 가장 말단만을 본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또한 우리의 영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성이라는 그분의 실체에 비한 우리의 인성을 깨닫고는 마음이 상한다. 그분의 신성은 우리를 의기 소침하게 만들고, 우리의 자존심을 위협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낙담케 하신다. 우리는 그분을 정의할 수도, 그분을 우리 마음대로 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내린 모든 정의를 무시해 버리신다. 하나님은 도저히 정의될 수 없는 분이며, 그 사실에 우리는 안달하게 된다. 그분은 우리가 속한 작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다. 시편 113 6절은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시기 위해 스스로 얼마나 낮추셨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분은 신비하고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분을 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표현해 낼 수 없다. 신비를 대하는 일은 우리를 철저히 두렵게 만든다. 우리는 다룰 수 있고 정의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갇히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 역시 우리를 낙담시킨다. 우리는 영원함의 길이 앞에 주눅들 수밖에 없는 짧은 인생이며, 영원함이라는 속성처럼 늘 한결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함이라는 주제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강조되어 있다.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실체는, 우리가 알고 또한 보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분을 구별시킨다.

잠시 재미있는 상상을 한번 해보자. 눈을 감고 당시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라. 그 다음엔 당신의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라. 그러고 나서 당신의 증조할아버지를 생각해 보고, 그 다음에는 당신의 고조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계속 떠올려 보라. 아담까지 이를 즈음에 당신은 한 가지 질문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다. “아담의 아버지를 누구라고 해야 하지답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 동의했기를 바란다.

이제 이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라. “누가 하나님의 아버지인가? 누가 하나님을 존재하게 하였는가?” 창세기11절을 떠올려 보라. ‘태초에 하나님이......” 태초가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는 것은 그분이 태초의 이전에도 계셨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분이 태초의 전부터 계셨다면 도대체 그분의 시작은 언제란 말인가?

창세기 1장의 신령한 장면에서 영원의 차원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문이 바로 이 물음 안에 있다. 당신은 이 문을 통해 요한복음 17 5절과 17 24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세상이 기초가 생기기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하게 될 것이다. 모세와 함께 부르짖어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1”(90:2)  당신을 영원한 과거 속으로 가라 앉혀보라. 당신의 마음이 닿을 수 있는 만큼 더 깊이 내려가 보라. 그리고 당신의 삶이 시작된 시점과 그 끝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달아 보라.

지금쯤 당신의 뇌가 타 들어가고 있을 것이 상상되지만, 여기서 그치지 말고 바로 다음 목적지인 미래로 떠나보자.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그가 천년 동안 이 땅에서 다스리실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영원한 존재가 남자와 여자라는 인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그들의 삶에 파고드시는 일을 생각해보라. 영원한 낙원과 영원한 지옥에 대해 묵상해보라. 당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존재인지를 깨달으며 주를 경외함이 당신의 심장을  움켜잡기 시작할 것이다.

토저는 프레드릭 파버(Frederik Faber)의 찬송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저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해보라. 그 분의 생각을 생각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호흡하는 것, , 그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이 땅에는 이 보다 더 높은 하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없도다!”. 토저가 권한 이 일이 우리의 유업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 것을 시간낭비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깊고 친밀하게 알기 위해 지어졌으며 바로 이와 같은 신령한 만남을 풍요 가운데 살기 위해 창조되었다.

영원으로의 여행은 우리의 마음을 탐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경험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허무한 기쁨으로 좌우되는 우리 자신이 아니, 영원과 영원이 가진 가치에 더 매료되는 사람으로 거듭하는 방법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른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6, 8).

우리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는 영원한 공간에 선한 행위를 쌓아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윗처럼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145:3). 다윗은 우리가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에 대한 위대함과 그분에 대한 지식을 찾아낼 수 있는 영원한 특권과 임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이를 탐구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자식을 만지는 것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그 무엇이며, 또한 우리로 살게 하는 그 무엇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이 비로소 가장 높은 고지에 놓이게 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목적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그동안 잃어왔다.

<거룩을 추구하다/코리 러설/드보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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