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09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대로, 주신 의도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성경의 저자는 누구인가?
각계 각층의 사람 약 36명이 1600년 어간에 걸쳐서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으로 본 것 일뿐, 이면적으로 보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1) 하심같이 성령님 한 분에 의한 한 권의 책인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
모든 책은 기록목적이 있다. 성경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케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구약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5:39). 성경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24:25-27)하여 주심으로 제자들의 의심을 치료하여주셨던 것이다.

구약성경만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요한 사도는 복음서를 기록하는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이와 같이 신구약성경의 기록목적은 그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맞춰져있다.

성령의 사명은 무엇인가?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19:30) 하고 선언하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구속사역을 누가 증거하여 저들로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인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리고 명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4, 8). 약속하신 대로 주님은 승천하시고 성령은 강림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구속사역을 증거하기 위한 임무교대였던 것이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15:26). 성령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가?
강림하신 성령은 제자들에게 임하셨다. 이는 제자들을 복음을 중거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는가?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미리 기록해 놓으신 성경을 들어서 이 약속과 예언과 예표와 모형들이 성경대로 성취되었음을 입증(立證)하므로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 행한 베드로, 스데반, 바울 등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설교의 모델이 될 수가 있다. 이를 관찰해 보라. 한결같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성경을 들어서 입증하므로 증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證明)"(17-2-3)했다고 말씀한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증거해야만 하는 가? 그 분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 얻을 자, 다시 말하면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다른 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대로, 주신 의도대로 사용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성령과 동역을 하고 있는가?"

백성을 잃어버린 하나님
태초에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45:18)시다. "나라"가 구성되기 위한 절대적 요건은 "왕과,백성"이다. 이를 한 가정으로 축소를 한다면 가정의 구성요건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아내, 자녀"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해체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파괴당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예가 걸려있는 문제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8:11).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선포하신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하나님은 ① 메시아가 어느 계통을 통하여 보냄을 받아, ② 어떤 방도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③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실 것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셨다. 여자의 후손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고 언약하셨다.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33:2)시다.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1:1) 하고 시작이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약속이 예수의 초림으로 성취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4:18-19). "인자의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 어떤 방도로 가능하여지는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20:28) 하신 오직 "대속"을 통해서뿐인 것이다. 왜냐하면 첫 창조는 말씀만으로 가능하였으나 재창조는 이미 저질러놓은 죄 값을 누군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19:30),즉 죄 값이 다 지불되었음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성경 마지막 책은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21:6) 하고 선언하므로 하나님 나라 회복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신다.

성경의 통일성과 점진성
이런 맥락으로 성경을 인식할 때에 성경은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두 권의 책도 아니요 66권은 더욱아니다. 한 주제,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계시해주기 위하여 한 성령님에 의하여 기록된 한 권의 책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하(幾何) 첫 시간에 "점이 움직이면 선이 된다"는 정의를 배웠다. 이와 같이 성경은 창세기3:15절에 찍혀진 첫 복음이라는 점()이 움직이어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져 있는 선이라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라는 역을 출발한 구원열차가 계시록이라는 종착역을 향하여 달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66층의 건물에다 비할 수도 있다. 고층 빌딩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튼튼한 골조(骨組)가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는 통일성과 점진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인물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리는 것과도 같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한 점(원 복음)이 찍혀진 것만으로는 계시가 밝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과→다윗의 자손으로→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처녀를 통하여 태어나→은 삼십에 팔리어→죽으셨다가→다시 살아나심으로→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사탄을 정복하게 되고→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다시 오심으로 구속사역은 완성이 된다고 구속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는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것이다.

설교자의 사명
그렇다면 말씀을 맡은 설교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자명해진다 하겠다. 사도 바울은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해주고 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3:8-9).

첫 목적은 "그리스도의 풍성", 즉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둘째는 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언약과, 예언 등을 어떻게 일관되게 추진해오셨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이를 성막 계시를 통해서 설명할 수가 있겠다. 모세가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께 올라가서 받아 가지고 내려와 백성들에게 전해준 것은 돌 비에 기록된 십계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짓되,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식양(式樣)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으라"(25:8-9) 하신 성막의 설계도를 받아 가지고 내려와이를 백성들에게 전해줘서 그 식양 대로 성막을 세운 것이 보다 중요한 임무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성막의 용도를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성소"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막을 짓는다는 것,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계시가 성막(성전)이라는 모형으로 주어졌다가→ 임마누엘로 성취되고→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신 교회로 적용이 되었다가→ "보라 하나님의 장막(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21:3-4)에서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건설의 마스터플랜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하실 성막은 연결하여 세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모세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하나님의 거하실 성막을 세웠던 것이다. 이점에서 중요한 것은 성막의 존재의미란 단편적(斷片的)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신 식양 대로 만들어 이를 구성(構成)하고 조립(組立)하여 세울 때만이 그 의미가 있게 된다는 점이다. 성막의 식양과 기구들을 따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다면 성막을 통하여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해체되고 만다. 번제단에서 희생당한 어린양의 대속의 피를 통하여 맑은 물로 씻음을 받고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는 복음진리의 증거를 세울 때만이 하나님께서 이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계시가 바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성경 전체의 주제란 하나님의 거하실 성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에 대한 식양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설교자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서 완성되어지는 이 식양을 성도들에게 알려주어서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함을 드러내야할 사명을 맡은 자이다.

예증적 설교는 성막을 해체한다
성경을 교훈적, 모범적, 예증적으로 증거하는 것으로는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거하실 성막을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제시하여 이를 본 받자고 제시하는 것을 "모범적, 교훈적, 또는 예를 들어 증거하는 예증적인 설교"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설교하기도 쉽고 감화력도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설교라면 성경을 들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논어나 불경, 심지어는 삼국지나 춘향전을 가지고도 교훈적이고 모범적인 감동 어린 설교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가 발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강단을 주도하고 있는 이러한 예증적인 설교는 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식양을 조각 난 그림으로 만들고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설교를 듣고 자란 성도들은 단편적인 성경지식은 풍부하면서도 이 퍼즐이 어떻게 연결되어 지어져 완성되는지를 모르게 된다. ② 신본주의(神本主義) 신앙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신앙인을 양산하게 된다. 설교를 듣고는 "나도 아브라함처럼 순종하여 복을 받아야지. 나도 요나처럼 불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나지 말아야지" 말하게 만든다. 그들은 예배드리려 왔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모세를 만나고 엘리야를 만나고 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축복만을 구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되고 만다.

<출처: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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