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2010

하나님의 사랑 1 -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은 영생임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경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 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영생을 얻게 되며, 영생을 얻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길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 거듭난다, 영생을 얻는다 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모두 같은 뜻입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라는 것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자세히 상고(상고의 원래 뜻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쓰는 용어임)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며 이는 곧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경”이라 함은 예수님 당시로 보면 구약성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신약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舊約)은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이고, 신약(新約)은 그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구속의 역사를 이루신 사실과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입니다.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함이 가장 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 얻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많은 말씀을 배워서 안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을 상고하는 목적은 상실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거듭났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것은 성경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과 진리를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성경이 깨달아지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영의 양식’이라고 하는데, 양식은 산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성경은 윤리나 도덕책도 아니고 또한 육신의 양식이 아닌 영혼의 양식인 까닭에, 영혼이 구원을 받아야 성경 말씀이 양식이 됩니다. 그때부터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구원은 말씀을 통해 받습니다. 골로새서 1 6절의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는 말씀대로, 복음(福音)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며, 그것을 깨달은 날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많은 말씀 가운데 우리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내용에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가서 구원 얻을 말씀을 증거했고 고넬료와 그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얻을 말씀’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구원받을 말씀을 깨달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 그 날이 한 번 있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주의 말씀 처음 받은 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라는 찬송도 같은 의미입니다. ‘주의 말씀 처음 받은 날’, 그것은 교회당에 가서 처음으로 성경 듣는 때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생활한 지 몇 십년 만에 그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운 좋게 교회당에 가자마자 구원받을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생 교회당에 다니는데도 그 구원받을 복음은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주의 도   처음 받은 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 참 중생한 새 몸일세”(찬송가). 그 복음을 듣고 깨달은 날, 참 중생(重生)한 날이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있습니다. 영어로는 Born again, 즉 거듭난 날이 구원받은 날입니다.  

(하나님) 조물 중에 우리로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라는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를 낳으십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그 영혼이 구원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것입니다. 또한 너희가 거듭난 것이썩지 아니할 씨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 25)라는 말씀처럼, 거듭난 사람에게  생명이 된 ‘썩지 아니할 씨’는 바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 즉 복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린도전서 4:15).  

누가복음 8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가 뿌릴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누가 8:11),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라고 이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 채 잠깐 기억하다가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가 심기우지 못하고 있을 때 새가 날아와 쪼아먹어 버리듯이, 말씀을 듣긴 들어도 그 말씀을 마음에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길가, 돌짝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심기어지지 않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구원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말씀은 듣고 깨닫는 자니”(마태 13:23)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구원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기워주는 씨입니다.  

씨는 특별한 모양도 없고, 흙 묻은 씨앗 하나가 굴러다닐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이 옥토에 심기어지면 움이 트고 큰 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씨는 한 알갱이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심으면 자라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전파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 우리 귓전을 울리고 지나가는 그 말씀이 준비된 사람의 마음속에 깨달아집니다. 좋은 땅은 준비된 사람의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좋은 땅은 없습니다. 전부 길바닥처럼 단단하고 완고하며, 돌짝밭처럼 그 속에 죄가 숨어 있고, 가시떨기처럼 세상의 욕심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 불모의 땅을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흙을 파헤쳐 돌맹이를 주워내고 부드러운 땅을 만드는 것처럼, 성경을 배울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부드럽게 만듭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구원받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바꾸십니다.

그 준비된 마음속에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이 전해지면, 그 말씀은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씨가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되면 싹이 나듯이, 준비된 마음에 생명의 말씀은 뿌리가 박히고 자랍니다. 복음의 말씀이 준비된 사람의 마음 속에 전해지면, 신비하게도 그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이 그 마음 속에 심기어진다는 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 전파(電波)가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를 켜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것을 녹음하면 그대로 녹음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의 방향이 간절히 하나님을 향해 있고 또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을 깨달으면, 그때 그 말씀이 그 영혼 속에 기록(記錄)됩니다.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브리서 10:16).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기록된 말씀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며, 그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이고, 참 신비한 일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죽어 봐야 알지요’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것으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구원, 즉 거듭나는 것은 영적 출생이라는 하나의 사건(事件)이요 확실한 경험입니다. 모든 일(사건)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난 때도 없고 발생한 곳도 없는 사건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있다면, 그 일은 원래부터 없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았다고는 하는데,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면 어물어물 대강 넘어가버립니다. 또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구원받았고, 구원받았으니까 믿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언제부터 믿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모태 교인입니다’라거나, ‘세례 받았으니까 구원받았지요’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하다가 십자가 환상을 봤습니다. 기도하는데 온 몸이 화끈했고 뜨거웠습니다’ 라든지 ‘이상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병이 낳았습니다’ 라는 등의 별별 이야기를 다 합니다. 그런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일 수도 있고, 마귀의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이 나았다 할지라도, 그 병 치유 자체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반드시 성경 말씀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구원받았다는 실체가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 구원은 착각이고 거짓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도 말씀에 비춰 점검해 보면 구원이 아닌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구원받지도 않았는데도 구원받은 줄 아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요즈음 가짜 돈, 가짜 수표, 가짜 카드가 많이 돕니다. 진짜와 비슷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가짜인데, 위조나 변조 사실이 나중에 밝혀지게 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가짜 여권, 가짜 비자로 수속을 밟다가 그것이 들통 나서 출입국관리국에 체포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사람은 설사 속일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어물쩍 넘어갈 수 없으므로 완전하고 철저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방식대로 깨닫고 믿어야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조건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기 위해 사람이 먼저 해야 일은 먼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약속은 쌍방이 지켜야 이루어지듯 성경 속에 하나님의 약속도 먼저 인간 편에서 해야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으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이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내일 **시에 **에서 만납시다. 그러면 당신이 필요한 것을 내가 주겠습니다’ 라는 약속을 했을 때, 약속한 일이 이루어지려면 두 사람이 똑같이 그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문제는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셨고, 하루가 천년 같이 기다리시며(베드로후서 3:8)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디모데전서 2:4). 그런데 정작 그 은혜를 받아야 할 대상인 사람이 원치 않기 때문에 구원의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을 드리면, 똑같이 구원받을 말씀을 들었는데도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깨닫고 어떤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는 사람은 머리가 좋고, 못 깨닫는 사람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과 양심의 문제입니다. 듣는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느냐를 보시고 그 찾는 영혼에게만 복음의 진리를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하러 오셨으므로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은 찾아가십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만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미 하나님을 잘 공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배척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인’이며 타락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고 살아가는 생활 전부가 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죄인(罪人)이라는 말은, 자기가 어떤 죄를 얼마나 지은 자인가를 말하기에 앞서 ‘아담의 자손’이라는 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되어 하나님 앞에 잃어졌다는 의미이자, 영혼이 죽은 상태에 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먼저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타락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를 물 먹듯 마시고 사는 인생,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인생,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비록 인간이 의롭고 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인인 자신들이 볼 때나 선한 것이지 거룩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조금도 의롭지 못합니다. 평생 사는 동안 죄를 짓고,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건너가서 심판을 받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나의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 19:26).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4).

심장이 멈춰 서는 순간부터 사람의 육체는 썩기 시작하고,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천국으로 가지만 거듭나지 못한 죄인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이 타는 영원한 지옥으로 가 다시는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나 평생 온갖 죄를 짓고 살다가 언젠가 죽어서 심판 받고 영혼이 지옥에 들어갈 운명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지옥 운명에서 어떻게 하면 건짐 받을 있겠습니까? 다시금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그 심판과 멸망 받을 운명에서 자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면서 죄를 위해 울고, 금식하며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시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죄의 용서는 울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찬송가(343)에 있는 대로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하네”(찬송가)라고 했듯이, 아무리 울어도 죄는 털끝만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형선고 받은 사형수가 살려 달라고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재판장을 졸라댄다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언행이 단정하고 남에게 많은 선을 베풀면, 그것으로 죄를 하나님 앞에 씻음 받을 수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자기의 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힘써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하네”(찬송가). 힘쓰고 애쓰고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그것이 자신을 다시 나게 못합니다. 다시 나는 것(Born again), 즉 거듭나는 것은 힘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흥강사는 “은혜 받으려면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라며, “눈물 한 방울 없이 은혜 받을 줄 아십니까? 힘쓰고 애 써야 됩니다. 힘 써야 천당 갑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눈물로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수십 년 끈질기게 교회 다니고, 추우나 더우나, 남이야 욕을 하든 말든 어떤 어려움도 이기면서 교회당에만 끝까지 다니면 죄를 사()함 받습니까? “참아도 못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하네”(찬송가 343). 찬송가에 있는 대로 참아도 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스스로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믿으면 하겠네 구주 예수만 믿어 하신 일을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울어도, 힘써도, 참아도 안 되는 것을 믿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해서(행위) 가능할 것 같으면 그것을 행하는 것으로 됐지, 또 무슨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종교적인 열성을 행함이 곧 믿음인 줄 아는 데서부터 오해가 생깁니다. 게다가 종교인들이 ‘믿는’ 것과 ‘하는’ 것을 뒤섞어 놓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믿는 것이고, 열심히 하는(行爲) 것이 잘 믿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한편으로는 ‘믿음’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 행위를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행함이 믿는 것인지, 믿는 것이 행하는 것인지 근본부터 혼동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의 시발점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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