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6/2011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기술된 아홉 가지 은사 목록 가운데 두 번째로 나타나는 은사이다. 이 ‘지식의 말씀’은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 계시로서 사람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형편 혹은 사람에 대한 사실 등 그의 현재, 과거에 관한 계시이다.

이 초자연적 지식은 우리의 영을 통해 우리 마음에 전달된다. 그것은 자주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보통 생각들을 중단시킬 것이다. 이는 생각, 말, 이름, 느낌, 인상, 이상 혹은 속에 ‘내적 감지’로서 온다. 짧은 말이라 할지라도 이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형편에 대한 전체적 지식(이해)의 작은 한 부분이 된다.

그냥 ‘말씀의 은사’가 아닌  ‘지식의 말씀’의 은사 
성경은 ‘말씀의 은사’(이러한 은사는 없다)라고 하지 않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은사가 ‘말씀’과 관련 된 것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배우고 경험함으로서 습득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연구와 체험에 의해 획득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특정한 때에 그 곳에서 내 영에 말씀해 주심으로 초자연적으로 생긴 지식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고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본문을 잘 분석하고 명료하게 해석하며, 적절한 예화를 곁들여 설교를 은혜롭게 잘하는 목사님을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은사’가 아니다. ‘은사’란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 곧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은사’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단순히 ‘말씀의 은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때 큰 은혜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 자체는 아무리 뛰어난 설교라 할지라도 서재에서 잘 준비한 설교는 ‘예언’의 말씀처럼 성령님이 직접적으로 주시는 즉흥적인 초자연적 선물이 아니므로 ‘은사’라고 말할 수 없다.

지식의 말씀이 주어진 성경상의 사례 
성경에는 성령께서 계시해주신 ‘지식의 말씀’의 은사에 관한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다음에 신약 성경에서 그 사례들을 찾아보자.

사무엘이 여호와께서 왕으로 택한 사울을 찾거나 사울의 잃어버렸던 나귀를 찾은 사건(삼상 9:15~20, 10:21~23)은 지식의 말씀이 잃어버린 사람이나 재산을 찾는 데 사용된 경우이다.

여권을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안날 때, 그리고 통장을 분실했을 때 성령님께 ‘지식의 말씀’을 구해보라. ‘지식의 말씀’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일에도 정보를 가져다준다.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에 관심을 두신다.

나단은 ‘지식의 말씀’을 받아서 다윗 왕과 밧세바의 은밀한 일을 알았다(삼하 12:7~13). 엘리사는 게하시가 거짓말 하는 것을 ‘지식의 말씀’으로 드러내었다(왕하 5:20~27). 또 엘리사는 초자연적 계시로 아람(시리아)군대의 진영의 위치를 알아내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이 승리했다(왕하 6:8~23).

예수님도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그는 지상에 육체로 계실 동안 ‘전지’하지는 않으셨지만, 필요할 때마다 모든 지식을 성령을 통해 사용하실 수 있었다. 예수님은 ‘지식의 신’(the Spirit of knowledge)이신 성령께서 그의 육체에 충만히 임하여 계셨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 11:2)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고 그의 죄까지 사해주셨을 때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은 이를 마음에 참람하다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마 9:2~6).

이 계시의 은사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셨다(요 1:47~18, 29). 이처럼 ‘지식의 말씀’은 사람의 ‘거처’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다.

또 예수님은 ‘지식의 말씀’으로 우물가의 여인에게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 때에 비로소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증거 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요 4:17~18, 29).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 안에서 이와 같은 초자연적 지식이 가능하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 열쇠는 계시의 은사들을 발휘하여 일하도록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 초자연적 지식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대로 초대교회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베드로에 의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부정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다(행 5:3).

또한 성령은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을 나타내시어 그는 의심치 않고 욥바에 있는 그의 집 문 앞에서 그를 찾고 있는 세 사람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행 10:17~23). 바울은 루스드라에 있던 그 앉은뱅이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그의 영으로 ‘봤을 때’ 지식의 말씀이 동원되었다(행 14:9~10).

이와 같이 성경에는 ‘지식의 말씀’에 관한 사건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적인 연구를 통하여 노력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요, 또 어떤 사람들이 은밀히 알려줘서 그 정보를 통해 얻은 지식도 아니다. 오직 성령님에 의해 계시된 초자연적 지식인 것이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주된 목적 
성령에 의한 계시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앎’(지식)은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에 조력하여 도울 것이다. 사람에게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정확하고 효과 있게 사역하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다. 위험을 경고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며, 우리들의 매일의 삶과 사역 가운데 나를 ‘정로(正路)’로 인도하기 위하여 죄를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이 놀라운 은사는 사람이 소유하여 물 쓰듯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 은사를 갖고 계셔서 특정한 때에 필요를 따라 성령의 뜻대로 나타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신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한 개인에 대한 지식의 말씀은 우리가 그들의 눈을 들여다 볼 때나 그들을 만질 때에 우리에게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께 귀를 기울이며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은사를 활용하기를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라! 은사를 사모하라! 그러면 주님의 약속대로 누구나 초자연적 지식, 곧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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