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009

내적 치유와 용서

내적 치유와 용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해꼬지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내 힘으로 보복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실제로는 나를 고문하고 학대하는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떤 의사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 중 용서만 제대로 한다면 약 50%정도는 금방이라도 퇴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해코지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보다 실제로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용서의 최대의 수혜자는 용서하는 사람 자신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이다.

1. 용서와 회개가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는 회개와 함께 내적 치유의 양대 축이다. 용서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고 용서와 회개가 없는 내적 치유는 불가능하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비록 신자이지만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회개를 해야 한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회개할 때 그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용서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옥가야 마땅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당연히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

2. 무자비한 종의 비유.
우리의 죄 용서에 관한 하나님의 은혜와 그런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이 처분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8장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 18:21-3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고통을 받는다(마 18:34-35).

‘옥졸들에게 붙이셨다’는 말은 옥졸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말이다. 인권이 최고로 발달한 미국이나 한국의 교도소에서도 때로 간수들은 죄수를 무자비하게 다룬다. 하물며 인권 사상이 거의 전무한 당시의 옥졸들이 무자비한 종을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핵심적인 의미는 무엇이냐? 그렇게 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도 자기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크나 큰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다.

일만 달란트, 6,000만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나 되는 엄청난 빚을 공짜로 탕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윽박지르며 용서하지 않는 이 종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고슴도치같이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죄인이다. 알게 찌르고 모르게 찌른다. 문제는 내가 남을 찌른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남이 나를 찌른 것은 쉽게 잊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앙심을 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복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나를 괴롭히고 해코지를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수록 내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증오심이 지나치면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뛴다. 오래 되면 화병이 나서 몸져눕는다. 신체적인 병의 70%는 마음에서 오는 병이며 분노에서 오는 병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사람은 ‘세월이 약이다. 잊어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심은 세월이 간다고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진 것 같지만 깊숙이 박혀 있다가 짜증나는 일이나 언짢은 일이 생기면 온갖 형태의 추한 몰골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극도의 자기보호 본능 때문에 정상적인 부부 관계나 인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이것들이 바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무자비한 종이 옥졸들에게 붙여져서 당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힘입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나를 해코지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죗값은 아무리 크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100 데나리온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대신 희생시키신 값은 6,000만 데나리온이다.

여러분은 어떤 죄값을 갚겠는가? 100데나리온인가, 6,000만 데나리온인가?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축복까지 해 주라고 말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병은 이 세상의 어떤 약(藥)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 미워할수록 내 가슴에 굵은 대 못을 망치로 쾅, 쾅 박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을 치료하는 약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일이다.

나를 저주하고 나의 신세를 망친 사람을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내 심령 깊숙이 박혀 있는 증오의 가시를 뽑아내는 유일한 약다. 나의 원수를 축복할 때 나를 괴롭히던 증오의 가시가 뽑히고 내 심령에 평강과 안식이 임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3. 용서하지 않았을 때 받는 불이익들
형제를 제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이익이 있을까? 그 반대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마 6:14-15; 막 11:25; 롬 12:19-21; 요 20:23).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

내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있으면 그 화살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날아간다.

영, 혼, 육의 고통을 당한다(롬 2:9-10; 8:6; 사 48:22; 57:2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1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하나님이 예물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마 5:23-25; 호 6:6; 암 5:21; 사1:11-18).

예수님은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말씀하신다(마 5:23-25).

마귀에 궤계에 놀아난다.
용서 않고 금방 분을 삭이지 않으면 마귀의 궤계에 놀아난다(고후 2:10-11; 엡 4:26-27).

죄 지은 형제를 제 때―해가 지도록 즉 하루가 지나기 전―에 용서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공격할 팔 발판(foothold)을 주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통해, 분노. 증오, 배신감, 죽음과 자살의 영이 역사 하여 이후에 용서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4.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불이익들의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용서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나는 잘 했고 남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 폭행이나 어른의 폭행 등과 같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사적인 보복은 절대 금물이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스스로 원수를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2-23).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당했다기 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은 보지만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 전에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감히 내가 누구라고 나를 이렇게 대해’라면서 복수의 칼을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죄 지은 형제를 불쌍히 여겨서 용서해야 한다(엡 4:32).

용서해준 것 같은데 기도 중 용서해 주지 않은 것같이 생각된다.
사역을 할 때 이런 간증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표면적으로는 용서한 것 같지만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았을 경우에 성령이 다시 중심으로 용서하게 하시는 경우이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마 18:35).

내가 죄 지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했나를 알려면, 그 사람이 잘되었거나 잘못되었다는 소문이 들릴 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배가 아프고 잘못 되었을 때 고소한 마음이 생기면 중심으로 용서했다고 할 수 없다.

보상 심리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보상 심리가 있다. ‘내 원수의 빚은 공짜로 탕감해 주면 내가 받을 빚은 누가 갚아주는가? 내 원수를 누가 갚아 줄 것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해자가 먼저 사죄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고(롬 5:8), 간음한 여인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셨다(요 8장). 특히 고의적으로 위해를 가한 가해자일 경우 가해자 먼저 용서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때 주님의 사랑으로 먼저 용서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람이며 가해자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다.

5.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얼른 나에게 죄 지은 사람만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용서의 대상은 하나님, 나에게 죄 지은 형제 및 본인 자신이다.

하나님
충격적인 사건이나 뜻밖의 재앙을 당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why me?)라면서 무엇보다 먼저 이런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는 악담을 했다.

다른 사람들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본인 자신
자신이 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연민의 정과 함께 피해자가 된 그 사실을 증오하여 자신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완벽주의, 율법주의, 부당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자신마저 용서하고 축복할 필요가 있다.

6. 용서하는 방법.
용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신자는 누구나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

그러므로 용서는 직설적이 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 저는_____죄를 지은 _____를 용서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_____를 용서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제가 ____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 땅에서 용서할 때 매인 것이 풀린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가능하면 가해자 본인에게 직접 용서를 해주면 좋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가해자의 사망, 원거리에 거주, 행방불명 등―으로 가해자를 직접 용서하기 힘들거나 가해자가 아직 용서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유의할 사실은 마음으로 지은 죄는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할 것이며, 성적인 죄를 배우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고백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용서할 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 내적 치유가 주는 심령의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전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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