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009

내 안에 거하라 – 해밀턴 스미스

마지막으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고별의 말씀을 나누시고, 마지막 교훈을 주시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주님은 주 안에 거하는 일의 복됨과 필요성을 힘주어 강조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의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4-7).

이 고별의 말씀을 주님의 입술로부터 직접 들었던 그 사랑받던 사도 요한은 다시금, 요한일서에서 신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던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일요2:6).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만일 이 구절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의 복됨을 알려주고 있다면, 우리는 잠시 멈추고 물어야만 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 가까지 밀착하여 동행하는 삶을 살므로써 우리 영혼이 주님의 사랑스러움과 그분의 도덕적 탁월함을 기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의 목적과 완전한 본을 발견한다는 뜻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께 배우는 기쁨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 살면서 믿음으로 그 임재를 체험하는 삶을 가리키는 것을 아닐까? 만일 거룩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의 집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의 출현이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않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평상시 사용하던 우리 자신의 말과 태도 보다 더 조심할 것이다. 만일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의 영향력이 이렇다면,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임재를 깨달을 때의 영향력은 어떠할 것인가? 하지만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슬픈 광경이 벌어지곤 한다. 시기와 다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마땅히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생각 없이, 또는 악의를 가지고 가혹하며 공격적인 말을 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우리는 심한 말에 대해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주님이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분쟁하는 우리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신다면 과연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우리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서 결코 해서는 안될 말이었지만 우리가 내뱉은 심하고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서 자백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록 주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들으시고, 보시고, 또 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기럭하고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시94:9-10).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 말을 들으시고 우리의 모든 행동을 보시며, 또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신다는 의식 가운데 행하는 것은 주님의 임재의 복된 영향력 아래 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주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권면하는 모든 성경구절들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복됨을 즐거워하며 노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는 저절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많은 열매를 절로 맺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성령의 열매를 볼 수 있다. 즉 갈라디아서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이 사랑스러운 자질들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의 묘사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이처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성품이 재생산되는 것을 가리킨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열매는 섬김이나 봉사 또는 은사의 활용이 아니다. 물론 은사의 활용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사의 활용은 사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젊은 신자나 나이든 신자나 동일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기회를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흘라나온 지극히 작은 것도 승화되어 아버지를 향해서 열매로 올라가며, 세상을 향해서는 그리스도인의 강력한 증거로서 뻗어 나간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선전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비추도록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남겨진 이유이다. 이 일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그저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선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그분의 거룩한 영향력 아래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분명 확실한 것은 주의 임재 안에서
내 영혼이 머문다면
나의 눈은 더욱 친밀하게
그 밝은 영광의 광채를 보리.

그럴 때 주의 완전한 형상
나 더욱 확실하게 보며
흠모할 주님의 성품
그 영광의 광채 속에서 나 자라게 되리.

두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될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주님의 임재의 복된 영향력 아래 산다면,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거하게 되면서, 우리의 생각은 점점 주님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의 기도 또한 주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마다, 응답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지니라”(요일2:6)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행하셨는가? 우리는 로마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15:3)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친히 아버지를 향해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8:29)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것이 신자가 따라야 할 완벽한 모범이다. 사도 바울도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고 말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2)고 신자들을 권면한다.

우리 주님이 걸으신 길의 탁월한 특징은 자기의 뜻은 철저히 배제하고 아버지의 뜻을 행했으며, 또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긴 점이다. 우리에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길만이 주님이 걸으신 완전한 길을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마리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리아는 우리에게 주안에 거하는 삶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온전히 주님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에만, 주님이 걸었던 길을 묵상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좇고, 주님의 사람으로 가득하며 또한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며, 축복하시기 위해 내미는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자아에 속한 모든 생각을 내려놓으셨던 주님의 모든 완전한 행함과 행사와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들을 알지도 모른다. 또한 믿음의 위대한 핵심적인 진리들을 바르게 붙들고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지식이 아무리 정확하고, 이해력이 아무리 올바르다고 해도 그러한 것들이 우리 영혼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어 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또한 실제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 하는 사람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우리가 동행하는 사람의 성품을 은연 중에 닮게 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네 번째,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종 우리의 행동과 말투와 태도에 세상적인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간적인 기준으로 매우 가볍게 서로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시는 영광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말과 행실을 판단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그 영광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며 스스로를 책망하며, 많은 것을 자백하게 되지 않겠는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주님의 임재의 영향력 아래서 살 때에만,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만한 모든 일에서 보호를 받을 것이다.

다섯 번째로, 사도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고 말한다. 이 구절 바로 앞의 구절로부터 우리는 성령님이 무엇을 죄로 말씀하고 있는지를 배우게 된다. 즉 4절에서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는 관계없이 다만 자신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 주변 세상은 날로 불법이 증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 그 결과로 문명, 교육, 그리고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질서는 깨어지고, 사회와 국가는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불법의 영이 횡행하는 곳마다, 분열은 따라 온다. 이 일은 세상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나 마찬가지이다. 신자인 우리도 주변 세상의 영에 의해 영향을 받는 위험에 처해 있다. 따라서 경계를 게을리 할 때 세상 질서를 무너뜨리는 불법의 원리가 역사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분열과 나뉨을 초래한다.

만일 학교에서 학생들이 자기 뜻대로 하도록 허락된다면 학교는 필연적으로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만일 가정에서 각자 가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만일 교회에서 신자들이 각자 자신의 뜻을 추구한다면, 분열은 필연적으로 따라 올 것이다. 불법의 영이 역사하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분열이 일어나고,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미치는 해악은 더욱 클 것이다. 성실한 사람의 확고한 자기의 의(義)만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악한 불법의 원리 또는 자기 의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고 말씀하신 주님의 영향력 아래서 살 때만이 우리는 죄의 본질인 자기 의(self –will)를 피할 수가 있다.

주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 임하게 될 복된 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분명한 것은 주 안에 거하고자 추구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다면,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열매들이 맺힐 것이다.

주님의 마음에 합하게 드려진 우리의 기도들이 응답될 것이다.
우리가 걷는 길에는 주님의 행하신 아름다움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의 행사는 장차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안에 거하라…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는 주님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인가! 어쩌면 우리는 은사를 받았고, 또 모든 지식이 있고 또 열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경험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참된 진리이다. 은사, 지식, 역=열심, 그 자체는 결코 능력이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거절하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지극히 작은 시련에도 넘어지고, 엄청난 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구하도록 하자. 이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그리스도를 떠나 하루도 살고자 하지 말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도록 하자.

주 예수님, 내 영혼을 지켜 주소서
주 떠나 방황할 때
나를 가르치시고
곧 주께로 돌이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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