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5:7-9절입니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신앙이 타락하면 항상 예배가 타락하게 되어 있음을 지난 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사야 시대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 유대인의 예배가 타락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바리새인들의 예배를 평가하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예배의 특징을 말합니다. 하나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지난 주에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에 대해서 그중에서 한 가지 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인데, 그 중 하나가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1.신앙이 타락하면 항상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기를 원하시는 분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4장 1절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이 가득해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호세아시대는 하나님을 아는 것도 없고 사랑하는 것도 없는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호세아에게 고멜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결혼했는데 살다가 고멜이 남편만 가지고는 만족을 못해요. 바람이 나서 돌아다녀요. 여러 남자를 만납니다. 또 호세아가 그 여인을 찾아나섭니다. 왜 이런 창녀와 결혼하라고 했어요? 그 시대가 고멜과 같았어요. 거기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호세아서입니다. 그 시대에도 많은 예배가 있었어요. 많은 제사가 있었어요. 이렇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호4장 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는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시대만이 아니라 항상 그럽니다.
예레미야 시대를 볼까요. 예레미야 시대는 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렘2장 13절입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많은 의식이 있었지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악을 범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도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본인들은 성대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들이 버렸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해 있었습니다.
6장 19절입니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그것이 타락한 것입니다. 타락하면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리 생명을 원하셔도, 결과는 사망과 재앙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는 말은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말합니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이것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으면서도 시바 오늘날 에디오피아를 말합니다. 원방은 인도를 말합니다. 그 먼 곳 까지 가서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제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어떤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2.하나님의 법을 버린다는 의미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면 자신이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심판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그러면서 경고하고 있는데도 본인은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잘한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 아시지요.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호세아서를 당연히 잘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조상들처럼 율법에서 떠나 우상숭배라고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생겨난 무리가 바리새인들입니다. 호세아서를 잘 알았습니다. 호세아를 읽을 때 이 백성이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너희를 잊어버리리라는 말을 봅니다.
아까 렘6장 19절처럼 재앙이 임한다고 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들의 생각의 결과라 너희가 내 법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 말을 통해서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려서 심판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리면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생명을 원하셔도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버리면 심판이 올 것이라고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들의 모습인 줄을 이만큼이라도 생각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2장 17절 이하를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말합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율법의 613가지를 빼놓지 않고 지켰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의 법을 버리면 심판이 오고, 예레미야시대에 하나님을 버려 심판이 왔다고 기롟되었는데, 자기 조상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려 심판이 왔다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는 사실을 꿈에나 생각했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고 말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안보이면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의미를 모릅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모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1)하나님의 말을 버렸다는 성경적인 지식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왜 이 부분을 살펴보냐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저들이 율법을 잊었다 여호와의 법을 버렸다는 말을 성경적인 지식이 없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자기 조상들이 율법을 잊엇다 여호와의 법을 버렸다는 말을 성경적인 지식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해서 자기들은 누구보다 성경적인 지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저들과 다르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의 법을 버렸다는 말은 성경적인 지식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서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시대입니다. 아까 19절에 보면 땅이여 들으나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법을 버렸음이라고 합니다.
렘8장 8-9절입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여기서도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 윗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당시 사람들은 자기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지혜롭다고 생각했어요. 여호와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율법적인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다고 하시는 그 시대에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자기들이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이 지혜롭다고 자부했습니다. 성경적인 지식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2)하나님의 법을 버린다는 말은 삶에서 하나님의 법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3.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제가 큰 3번째로 바로 넘어간 이유는 이 부분을 보여야 하나님의 말을 버린다는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 신앙 뿐아니라 우리 예배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핵심적인 것입니다.
1)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진정으로 무엇을 믿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신조가 아니라 우리의 말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진정으로 나타냅니다. 아까 제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의 예를 지나갔는데 찾아봅시다.
요5장 45-47절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가 고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라는 자라는 말은 NIV는 너희가 너희 소망을 그 위에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소망을 율법에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안믿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믿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안믿었다고 말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아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믿었구나 타락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믿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이 오지. 여러분 하나님 말씀 믿으십니까? 성경을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믿으니까 바리새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에 대한 태도는 우리보다 훨씬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적지 않습니다. 성경을 필사할 때 한글자라도 틀리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인지 아세요. 그들은 율법 규정의 613가지를 철저하게 지켰어요. 여러분들 예루살렘에 가서 안식일날 휴대폰 받으면 우세당합니다. 안식일날 일한다고요. 율법에 자기들의 소망을 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안믿는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믿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관점의 차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당연히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십니다.
제가 자주 질문하지요.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여러분 나중에 죽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믿습니까? 또 하나님 앞에 서면 이땅에서 사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줄 믿습니까? 그렇게 질문하면 오늘날 안믿는다고 말하는 성도는 없어요. 이 세 가지는 신학교에 가야 배우는 차원높은 지식이 아니지요. 예수 믿는 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들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세요. 이 세 가지를 진짜 믿는다면 진짜 이렇게 살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목회를 안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나타낸다고 보십니다. 교리적인 동의가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서 조그마한 문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를 보여줍니다. 조그마한 문제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를 증명합니다. 우리의 신조가 아니라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2)하나님은 우리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여러분 이사야서 30장을 보세요.
8-11절입니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에게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 전하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법 따위는 관심도 없어. 듣기 원하지 않는다니까. 거짓말하기를 원한다니까. 우리가 원하는 부드러운 메시지를 전하라니까 글쎄. 하나님의 길에서 우리가 떠나게 만들어 달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게 만들어줘. 이랬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여러분 이 구절만 보면 이해가 안됩니다. 사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 뿐아니라 대회와 모든 절기를 빼놓지 않고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성경에서 말하는 드리나는 짐승을 가장 살지고 좋은 것으로 무수히 하나님께 드렸어요. 많이 기도했어요.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겠어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저들이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거짓의 그림자도 없으신 분인데.
이것을 보아야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입으로 절대로 이렇게 말했을 리 없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던 자들입니다. 심지어 예레미야 시대만 해도 저들이 입으로는 주께 가깝다고 말합니다. 입만 벌리면 하나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겠어요. 절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바로 그들의 행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대해서 관심 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햇습니다. 자기 목적의 성취와 욕심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법 따위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을 전해도 여호와의 법을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길 세상 길로 행함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길을 뒷받침해주는 메시지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행동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것을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보입니다.
말라기 1장을 보세요. 6-7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12-13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지금 말라기 시대에 제사장들에게 말하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기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 당시 제사장들이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고 봅니까? 저들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주님이라고 부를 뿐만아니라 정기적으로 그 예배를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제단은 더러운 거야 라고 말했을까요? 절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누가 하나님을 주라고 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저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들이 입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그렇게 말했을 리 없습니다.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고는.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것들은 자기가 다 갖고 병들고 쓸모없는 눈멀고 흠있는 것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차피 쓸모없는 것이니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정당화 시켰던 것 같아요. 어차피 태워 드리는 것 아니냐 피로 드리는 것 아니냐 그러니 다리가 부러졌다고 상관이 있느냐. 그러나 이런 그들의 행동은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히 여기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더러운 것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아야 성경의 관점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이것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4)입술 뿐인 타락한 예배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으면서 실제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으면서 의식은 가득한 예배를 하나님은 입술 뿐인 예배라고 하십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세요. 10-15절 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그들은 성경대로 성경에 나오는 규정대로 성대하게 하나님께 예배했기 때문에 자기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진정한 예배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토대 위에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에게 복을 주시고 자기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에서는 심하게 표현한대로 하나님의 법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여호와의 법 길에 대해서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장 4절에서 말합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고 버렸습니다. 삶에서. 그러면서 성대하게 예배하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기초하기 때문에 성대한 예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입술 뿐인 예배였습니다. 타락한 예배였습니다.
호세아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그랬습니다. 렘7장 22절 이하를 보십시오.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렸으면서 오늘날의 남예멘이나 인도에까지 가서 특별한 향품을 사서 하나님께 드릴 정도로 헌신적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7장 21절 이하 26절까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22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이처럼 입술 뿐인 예배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제가 전하는 것이 성숙한 고차원적인 성도들이나 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니까요. 심지어는 목회자들도 그렇게 치부해 버린다나까요. 말씀 앞에 직면하지 못하고. 그저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부드러운 메시지, 성경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에 바쁘다니까요.
하나님의 백성들 그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법과 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의 법을 철저하게 버려 하나님께 등을 돌이고 있고 살아가는 방식이 악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의식 몇 가지 잘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줄 알고 그것의 대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을 주시고 사업을 잘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러분 아까 읽었던 렘6장 19절 이하도 마찬가지입니다. 16절에서 뭐라고 하십니까?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이 말은 이미 예레미야 시대만 해도 그때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돌이키면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행하라 그러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은 우리가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입만 벌리면 하나님을 불렀던 그들이 우리가 그렇게 안하겠습니다고 직접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하세요. 이 말은 그들이 행동으로 하나님의 법을 거부한 것입니다. 성경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데 그들의 행동은 노 탱큐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의 소리가 그랬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넘어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들은 땅바닥에 땅을 치며 애통해하며 하나님이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회개해야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일날 여기와서 교회에 가서 그저 순서를 따라 예배드리고 가면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 안빠지면 참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5)신앙의 본질과 삶
입술 뿐인 마음이 없는 예배는 신앙의 본질이 없는 예배입니다.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가장 핵심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길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같이 갑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가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을 추구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면 그것이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헌금이요 우리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에 나오지요.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 일에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 삶이 없는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절대 과하게 말씀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 그렇게 많은 제물을 드렸는데 소돔의 백성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하니까 얼마나 더해야 되느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의 법을 버렸고 그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을 버리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된 예배를 하나하나 살펴볼 것인데 우리의 예배와 삶이 비추어지기를 원합니다. 중심에서부터 돌이키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문을 밝히셔서 처지를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땅바닥에 엎드려 애통해하며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우리 교회를 이 나라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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