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29장 13절 이하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오늘 설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낮 간을 통해서 예배회복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운행하셔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구원 우리 가정의 구원도 하나님이 하셔야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 핵심은 예배회복입니다. 그래서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2개월 도로 필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지금은 타락한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예배를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로 돌이키기 위해서 타락한 예배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부분은 이사야 시대건 예레미야시대건, 예수님 시대건 신앙이 타락하면 예배가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세 시대마다 같은 두 가지로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였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두 시간은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가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마음이 없는 입술 뿐인 예배인데 본인들은 정작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
우리 신앙은 모든 면에서 성경에 기초해야 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 신학 삶 사역에 있어 하나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배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려면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타락하면 우리 예배가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에 기초하게 됩니다. 심각한 사실은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의 예배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라는 사실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그렇듯이 신앙이 타락하면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없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봅시다. 이사야 시대의 예배입니다. 이사야 1장 10-15절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오늘은 주일날 낮이니까 이 구절만 읽었습니다. 제가 책으로 쓰고 있는데 책 나오면 보세요. 출20:8장은 안식일에 대해서 민10:10절은 월삯예배, 레23장은 모든 절기에 대해서 레22:17-22절은 짐승의 제사를 드리는 법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과 함께 오늘 본문을 대조해본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대로 안식일 지키고 월삯에배드리고 성경에서 말한대로 절기 지키고 성경에서 말한대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라고 생각했을까요. 정확하게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누구보다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의 예배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로서 헛된 예배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강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의지하고 살았다고 확신했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에 두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안에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지식의 모범이 들어있다고 확신했고 그 성경으로 율법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자기들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한 예배인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이 마태복음 15장 17-19절에서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치니 너희가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되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사야 시대나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보다 말씀 말씀 강조하면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성경에 기초한 예배라고 자부하는데 하나님은 바리새인이나 이사야 시대의 예배와 같이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점이 중요합니다.
2.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의 의미
하나님은 무엇을 두고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예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람의 교훈에 기초한 헛된 예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우리의 예배는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신앙은 성경에 토대해야 합니다. 우리 예배도 말씀에 토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토대해야 하려면 우리 삶이 우리 예배가 성경에 토대한 것이 되려면 우리에게 반드시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 아주 중요한 것이 우리가 철저하게 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의 올바른 순서에 서야 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겠어요.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며 이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알 수 있는 통로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성경 전통 이성(합리적인 사고) 경험입니다. 그래서 네 가지를 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출처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네 가지 출처의 우선순위입니다. 우선순위는 성경 전통 이성 경험 순서입니다. 순서에 따라 중요성을 갖습니다. 성경이 가장 중요한 권위를 갖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되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 해야 하는데 이 올바른 순서 위에 우리 예배가 세워져야 합니다.
2)신학을 위한 네 가지 출처는 다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또한 전통도 중요합니다. 이성도 중요합니다. 경험도 중요합니다. 학자들은 전통을 하나님에 관한 신학을 위한 하나의 출처로 꼽습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하나님입니다. 이것은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입니다.
여러 구절에서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안나옵니다. 이것은 전통을 통해서 도움을 준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수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교리 믿음에 의한 삶 성령에 의한 삶 은혜에 의한 삶 등 성경에 대한 진리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진리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올바로 아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난 2000년 동안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면 일단은 의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전통이 중요합니다.
이성 즉 합리적인 사고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합리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보다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합리적인 사고는 하나님의 뜻을 발겨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경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책을 보았는데 챨스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관해서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이상한 것이다.” 이 말 속에는 우리 경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출처들은 다 중요합니다.
3)다른 출처들이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네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입니다.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도 합리적 사고도 경험도 중요하나 성경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말씀 말씀 해도 실제적으로는 말씀에 의한 삶이 안됩니다. 그래서 미국의 덴버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데 정성욱교수입니다. 석사와 박사 때 칼빈을 연구한 분입니다.
제가 어느 기독교 신문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신학자의 주장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으면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신학을 인간의 학문으로 만들어버린다.” 학자의 의견이 성경 위로 올라가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전통들이 훌륭한 학자들의 의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까? 학자들의 의견도 중요하나 그것이 성경 위로 가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킬 뿐아니라 신학이 아니라 인학 인간의 학문으로 약화시킨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신학자의 주장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하며 모든 신학적 주장들도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성경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인지를 검증해야 한다.” “교회의 비성경적인 전통들 소위 장로들의 유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분석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정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칼빈박사가 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칼빈박사를 강조하냐면 칼빈이 오늘날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칼빈이 성경 위로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이 문제가 되는 요소, 예를 들면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마리아에게 예배하면 마리아게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이 응답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이런 에배는 성경에 태도한 예배가 아닙니다. 아무리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마리아에게 드린 기도가 성경적이라고 말할지라도 성경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이렇게 드린 이유는 전통이 성경 위로 가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카톨릭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카톨릭의 문제만이라면 제가 여기서 설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할 것은 우리가 교리적으로는 전통이면서 실제 삶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잇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통이 성경 위로 가서 문제가 된 한 가지 예를 마리아에 대한 예를 들었는데. 이 말에 대해서 보수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한국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분이 있겠습니까? 다 동의할 것입니다.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문제가 된다는 말에 다 동의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실제 삶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말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신조가 아니라 우리 행동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가를 실제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리적으로는 전통으로 고백할지 몰라도 실제 우리 행동이 어떤가를 보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한 가지를 물을께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교회에서 교단법을 성경에 비추어서 건증해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교단법이 성경보다 우선입니까? 답은 다 알지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만 해도 우리는 다른 출처들이 성경위로 가는 문제가 카톨릭이나 다른 사람들의 문제만을 아님을 알 수 있어요.
제가 집회를 다니거나 강의하다가 보면 이런 부분들도 보여져요.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 성경에서 보면 이사야 55장 8-9절에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은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다르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1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우리의 지혜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알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우리의 의견을 모아서 하나님의 뜻이 분별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개인들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적지 않는 경우에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하나님의자리가 전혀 없는 국회나 회사나 로타리 클럽에서 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에서 하는 것 아세요. 성경은 그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은 말로는 말씀 말씀 말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성경이 전혀 위로 안 올라가 있어요. 사람의 의견이 위로 올라가 있어요.
제가 한 두 가지 예만 들었어요. 이처럼 우리의 실제적인 행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부분을 보아야 합니다.
3.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의 심각성
그러면 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제 짐작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는 전통이나 당시에 팽배한 신앙관이나 일부 신학자들의 의견이나 합리적인 사고나 개인의 경험 등 이런 것들이 성경보다 위에 가면 그런 가치관에 토대한 예배는 성경이 아니라 사람의 의견에 의한 예배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말로는 말슴을 외치고 교리적으로는 전통적으로 믿고 받아들일지라도 실제 예배와 삶에서는 말씀이 기초가 아닌 사람의 의견이 토대가 된 삶과 예배가 됩니다.
그런 예배는 헛된 예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것들 중에 우리의 예배를 가장 타락하도록 영향을 끼치는 것이 전통입니다. 많은 전통은 그것이 시작할 때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문가적인 의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의견과 전통이 같이 가기도 합니다. 전통이 우리의 예배가 사람에 기초한 예배가 되도록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남은 시간은 전통의 위험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사람의 의견에 의한 위험성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전통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통은 헬라어로 파라도시스라는 말입니다. 전해내려오는 것 혹은 전해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말 자체는 중립니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요. 문제는 전통이 성경 위로 갈 때 심각해집니다. 이렇게 되어지면 사람에 의한 예배가 되고 우리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1)우리 영적인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어두워집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집니다. 성경적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입니다.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눈 먼 사람을 고친 것은 하나의 표적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임을 증거하고 드러내고 싸인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건입니다. 그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려진 것입니다. 안식일도 범하는 놈이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안식일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안들면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이 가린 것입니다. 무서운 것이 이것입니다. 전통은 구속력이 있습니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성경만 해도 전통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우리를 강요합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야 말할 때 예수님의 제자가 우리 선생님이 무슨 안식일을 범했는데요 하고 물으면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구절들을 언급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화를 내면서 대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은 일상적인 일에서 쉬고 육신의 휴식을 취할 뿐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일을 세분화했을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선생님이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통으로 내려오면서 굳어져서 성경과 동등하게 됩니다. 무엇이 성경인지 무엇이 전통인지가 구별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어기는 것인지 전통을 어기는 것인지가 구분이 안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성경을 보더라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 구절을 보도록 전통이 구속합니다.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눈이 가려지는 것입니다. 못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며 인류구원의 일을 이루시고 있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분임을 엄청난 능력으로 계시하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어두워진까 전혀 못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2)전통이 말씀 위로 가면 성경말씀을 어기게 만듭니다.
바리새인의 전통에 기초한 에배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를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마태복음 15장입니다.
15장 1-2절을 보면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당시에는 전통적으로 손을 씻고 먹지 않으면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의식적으로라도 간단하게 담그고라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자 답하십니다. 3-6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지지요. 당신들은 왜 전통을 범합니까? 식사할 때 왜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는 어찌하여 장로의 전통을 가지고 성경을 어기느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고르반을 언급하십니다. 고르반이란 성경중에 십계명 중 5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공경하라는 말에는 존경하라는 말 뿐아니라 부모의 필요를 채우는 것도 포함됩니다. 즉 십계명 중에는 부모의 필요를 부양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학자들은 1계명부터 5계명까지를 하나님께 대한 계명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하나님에 관한 계명에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부모는 가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그들은 어떻게 가르쳤어요.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려야 하는데 나는 하나님께 드립니다고 헌신하면 부모에게 안드려도 되는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 헌금 많이 하게 하려고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해왔습니다. 문제는 전통이 성경 위로 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가 말씀 말씀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예배는 성경이 아닌 전통에 기초한 예배였습니다.
보세요. 처음에 어떤 의도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반 이것이 굳어지면 성경을 해석할 때 전통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래서 전통이 성경과 같은 레벨에 올라갑니다. 무엇이 성경인지 무엇이 전통인지가 구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 말씀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말씀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몰라요. 왜냐하면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아까 카톨릭 예를 들었지요. 마리아 예배, 예배시간에 촛불을 켜는 것 등등. 이런 것이 중세시대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다가 1545년 트렌티 회의에서 성경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들은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전통과 성경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어서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인식하고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런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성경에서는 심지어 천사들도 예배를 받지 않는데 인간들이 예배를 받으면서 정당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3)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성령을 소멸합니다.
성령을 대적합니다. 우리 신앙의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예배도 성령의 도움이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의 핵심은 성령에 의한 예배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예배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부흥 때마다 성령이 통치하시는 에배가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성령을 대적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5장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함으로 고칩니다. 그 날이 안식일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한 줄을 알고 예수님을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답볍하십니다.
17-18절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 구절을 보면 38년 병자를 고친 것은 예수님이 임의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성령의 인도를 따랐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예수님이 동참했을 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못볼 뿐아니라 그것을 대적합니다.
여러분 아까 제가 전통의 문제는 카톨릭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전통이면서도 실제 삶과 예배에서는 전통이 말씀 위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교리적으로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머리는 예수님이고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맞습니까? 이것을 부인할 사람이 누가 잇겠어요. 예배 인도자도 성령님이라고 성경에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적지 않는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신학이 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일련의 순서가 예배를 인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과가 성령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씀 말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리적으로 아무리 내용을 다 믿고 강조해도 실제 삶에서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그것은 말씀에 의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이고 결과는 성령을 소멸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그래서 스데반도 그 당시 그런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했어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형식과 순서를 고집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그 모든 형식과 모양을 성경에 비추어 보는 것이 옳습니까? 답변은 명백합니다. 성경에 의한 삶이 되려면 무엇이 옳은가가 명백합니다. 문제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옳으면서도 실제로는 반대로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경에 의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에 의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교회 초기에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고 교회방문한 사람들이 수없이 왔다가 갔습니다. 얘배 중에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예배 순서가 다르다고. 성경에 어떤 종류의 찬송을 드리라고 나와 있는가요. 안 나와 있습니다. 물론 가사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아닌가는 성경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또 찬송이면 찬송 예배이면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 성경적인 이해가 무엇인지 성경적인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경배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그분을 마음껏 높이고 구하고 구분을 사모하는 가운데 그분만을 예배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시면서 만지시고 치유하고 계셔요.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익숙한 형식에 틀리다고 해서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성령이 하시는 놀라운 역사들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자리에 있을 지라도 전통을 가지고 형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성령을 소멸합니다.
4)율법주의 예배가 됩니다.
앞으로 나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데 전통이 좋을 수 있지만 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예배가 율법주의 예배가 됩니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율법주의는 껍데기입니다. 가짜입니다. 예배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율법주의는 의식을 지키는 가짜신앙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경우에 율법의 영을 무시하고 율법의 문자에 집착한 나머지 그들은 실제로 율법을 어긴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예배가 율법주의로 전락하면 겉모습에 치중합니다.
예배의 겉모습에 치중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몇 가지 순서와 규례와 규칙을 지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결국 껍데기 뿐인 예배가 됩니다. 아까 마태복음 15장을 언급했는데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아세요.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문제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밖에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러자 성경에 보면 나중에 예수님이 설명해줍니다.
16절부터 보면 아직도 못 깨닫느냐. 17절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그것들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 이런 것들이다 이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하십니다.
마23장에서 말씀합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그 속에는 시기 다툼 싸움 미움 탐욕 등이 가득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전혀 언급안하면서 손 안씻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예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제가 마태복음 23장을 읽다보면 이런 것들이 보여요. 오래 전에 젊을 때 읽을 때에는 어떤 구절들은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15년 전에 가까운 포도나무 교회 개척한 다음에 그 구절을 다시 읽을 때 우리중에 마23장 중에서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은 거기서 예수님이 화도다라고 강력하게 책망한 내용들은 오늘날 문제도 아닙니다.
잔치의 상석에 앉기 원하고 랍비라 칭함을 받기 원하고 이런 것이 무슨 죄냐고 말할만큼 문제도 안됩니다. 오늘날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삶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더 심각한 것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처럼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몰라요. 조금씩 타락하니까. 이런 상태에 있는데 그것은 전혀 무시하고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예배시간에 순서 하나 빠졌다고 문제삼고 야단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예배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있어요.
영국의 개신교 교회 중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채플입니다. 알 티 켄들이라는 목사님이 사역하셨어요. 5년 전에 은퇴하셨는데 그분이 쓴 책 예배에 대한 책을 보면 이처럼 전통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데 전통이 참다운 전통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까 라고 리트머스 테스트처럼 기준을 제시해요. 그중에 하나가 죄를 드러내는 것을 증진하는 것은 참된 전통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예배가 되면, 하나님의 기준이 비추어지고 하나님의 빛이 비추어지고 그 앞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죄된 모습이 비추어지기 때문에 중심에서부터 전환해서 회개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증진하는 전통이라면 참된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전통이 말씀 위로 가니까 바리새인들에게 속은 그토록 썩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언급조차 안하고 손 안씻고 먹었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어요. 그것이 더 심각한 것은 그런 구절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데도. 여러분 이것이 그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가까운데서도.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포도나무 교회만 해도 분당에 있을 때만 해도 하나님이 너무나 함께하셨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지시고 예배시간에 치유하시고 돌이키게 하셨어요. 교회 가운데 생명이 넘쳤어요. 국내 뿐아니라 해외까지 귀한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도 지방회 내에서 일부 목사님들이 단 한 마디를 가지고 그것을 가리고 대적하는 줄 아세요. 그놈의 목사님은 주일날 잠바땡이나 걸치고 그럽니다. 성경에 양복 입으라는 구절은 없는데. 우리의 상태는 그렇게 심각한데, 하나님은 그처럼 일하고 계시는데. 의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복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단정하게 입으라는 것입니다.
평상복을 입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경건을 입은 옷의 종류에 두는 것은 철저하게 타락한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예배가 격식화될수록 성령님이 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는 일부러 평상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어떤 성경적인 근거를 두고 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전통이 성경적으로 되어버렸습니다.
5)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하나님의 마음을 잃습니다.
사실 이 하나하나가 두려운 것입니다. 마14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풉니다. 풍랑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갑니다. 이 광경을 보고 제자들이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33절). 그리고 나서 게네사렛 땅에 이르렀는데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인 줄을 알고 근방에 말해서 많은 병자들을 데려오는데 다만 예수님의 옷자락에라고 손을 대기를 간구하니 그런 자는 치유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점입니다. 이렇게 일하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은 지금 손 안씻고 먹었다고 주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점입니다.
여러분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요한복음 9장 눈멀고 장님되고 구걸하는 자를 고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했어요. 가족들도 돌보는데 한계가 잇는 버려진 자를 고쳐서 새 삶을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안식일날 땅에 침을 뱉어 흙덩이를 만들었다고 다시말해서 일을 했다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 없습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없습니다. 긍휼을 잃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알티킨델 목사가 좋은 전통의 근거가 세 가지라고 했는데, 아까 한 가지만 말씀드렸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삶을 드리는 마음의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예배는 외부적인 모양만 강조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삶을 드리는 마음의 예배를 증진시킵니다.
아무리 옳은 전통일지라도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경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옹호해야 경건해집니다. 전통을 옹호하는 것은 옳을 지라도 우리에게 경건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7)전통이 성경 위로 가면 결국 사람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셨고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증거가 보여지는 순간에 그들이 뭐하고 했어요?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습니까? 장로들이 과거에 신실하고 훌륭한 장로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장로들이 과거에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장로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장로들이 과거에 신학적으로 훌륭한 지식을 가진 장로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통이 시작되었을지 모르지만 전통이 굳어져서 성경 위로 가게 되고 성경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되고 전통을 고집하게 되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 장로들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전통에 집착하면 그것은 결국 사람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칼빈이건 마틴 루터이건 우리가 잘 알고 존경하는 신학자이건 그것을 고집하면 그것은 사람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성욱 교수도 모든 학자들의 의견도 성경에 의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학자들의의견이 성경보다 권위를 가지게 되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인학 인간의 학문으로 전락시킨다고 경고합니다.
오늘 저는 사람의 의견에 기초한 예배를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너무나 심각합니다. 주일 아침이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우리의 현실에 하나하나 적용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우리의 예배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두려울만큼 심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성경을 교리적으로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고백하고 나름대로 성경적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경적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볼 때 그것이 그들의 문제인 것은 잘 알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 우리 예배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에 기초한 예배가 되도록 기도하고 겸손이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재검토하고 검증해서 말씀에 기초한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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