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2010

제10강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예배회복 - 여주봉목사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지난 시간까지 타락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은 거짓신앙체계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항상 거짓신앙체계에 빠집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우리 신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로서 가짜입니다. 본인들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본인들은 성대하게 예배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타락한 예배도 또한 거짓신앙체계의 결과물들입니다.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살펴보아야 타락한 예배의 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신앙체계의 예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삶을 알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교회를 오래전부터 다니신 분들도 있고 나중에 더해져서 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알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요점만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전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중심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삶을 요점만 보려고 했는데 안되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1.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1)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창조하셧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담을 두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많은 실과가 있었고 아담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햇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안 만드셨다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으셨을 것인데, 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두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창조한 것을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죄은 안지은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진정한 순종이 되려면 불순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시고 인간으로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하나님을 선택하여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영 인간이 불순종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감수하시면서 인간을 자유의지가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룰 가족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또한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2)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계획을 실행하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실패하자 하나님이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는 한 백성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그를 부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워진 한 백성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어떻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는가를 볼 때 그에게 떠나라고 하시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75세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어디로 갈지도 알지 못하고 떠나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전락하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가장 그에게 명령하신 삶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갑니다. 한편으로 롯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지요. 나중에 넘어지고 실수도 했지만 어떤 단계에까지 성장합니까? 나중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까지 순종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험하는 줄 모릅니다. 


이삭을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재 가운데서라도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는 자리에까지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는데 그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오직 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구약시대부터 말씀하심으로 이 백성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백성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초청하셨는가? 그것이 우리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구절을 봅시다. 창세기 12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절에 보면, 이제 그 복이 누구에게까지 미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열방에게까지. 그러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곳에 하나님이 복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열방이 복을 얻게 됩니다.

어떻게 열방이 복을 얻게 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열방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워질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때도 그 백성에게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세워질 열방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열방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열방이 복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잇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냐면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산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내신다. 셋째 열방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나온다.

우리는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여호수아 4장 23-2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하나님이 왜 요단강을 가르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백성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고 둘째는 열방으로 하나님의 능하심을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배를 만들거나 상류로 우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방법을사용하지 않고 요단강을 가르시고 물줄기를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열방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안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도 안믿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임재가 실제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그리고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며 하나님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한 마디로 줄여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믿음에 의한 삶을 강조하셧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실 때도 광야에서 집중적으로 믿음에 의한 삶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잇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시고 새로운 세대를 세워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두 번째 세대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이방사람들도 보았기에 예를 들면 라합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삶을 드림으로 구원받았을 뿐아니라 라합은 이방인이요 여자인데도 그리고 그의 전직이 창녀인데도 그의 이름이 예수님이 족보에 오를만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나님께 더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 모든 삶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3)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아브라함을 통해서 시작하신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실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그 놀라운 권능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질 때부터 명령하신 삶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었습니다.


렘7장 22-2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우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땅에서 건져내신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말은 진짜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부터 가장 주된 명령은 가장 본질적인 가장중요한 것 가장 중추적인 것이 번제나 제사와 같은 의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7장 21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많은 의식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명령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떠나 있었어요. 그래서 그 모든 의식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하고 너희가 내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니까. 


그러면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실 때부터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두 구절을 대표적으로 봅니다.
한 구절은 출19:3-6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우리가 수없이 살펴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주된 목적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이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어약을 지키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과 생명이 넘치게 될 것인데 무엇이 가장 큰 복입니까? 열국 중에서 그들이 특별한 소유가 되고 열국을 위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나라가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이며 생명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들에게 이런 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 구절은 신30:15-16절입니다.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생명과 복을 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세 가지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모든 길로 행하라 하나님의 모든 법도와 명령을 지키라 한 마디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중에 하나가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하자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그 땅에서 쫓겨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이스라엘을 세우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어요. 그드링 제사장나라가 되고 특별한 소유가 되고 거룩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주실 유업의 땅을 차지하게 그 땅에 생명이 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새백성인 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4)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중심적인 삶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창조하셨고 타락하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는데 그때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고 이스라엘도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우리 신앙과 사역과 삶을 위한 모델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우리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예수님처럼 빚어가십니다. 그래서 엡4장을 보면 교회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델이자 목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보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셨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어요. 예수님이 사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중적으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집중적으로 전하시는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는 지역이나 영토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하나님의 백성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이 누구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메시지 대표적인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4:26-33절입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올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물러가고 더 이상 따르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이 제자가 되려면 우리 자신 우리 가족 우리 재산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 우리 가족 우리 돈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져야 우리가 예수님의 제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진정한 주인이 되려면 그런 소중한 것들이라고 하나님이 주권 아래 내려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말로는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시고 왕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내려지지 않으면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왕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이고 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도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우리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 우리 돈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만 선별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의 유익에 순종을 결정합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주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고 왕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로 철저히 드렸습니다. 그런데 마23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삶 속에는 개인적인 야망 명예욕 세상에 대한 집착, 돈에 대한 탐심이 전혀 내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었고 그들 자신이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5장 42절부터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2.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부담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건 안믿는 사람이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오기를 꺼려하는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서 요구하시는 주권적인 통치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주권적인 통치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의 반대인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삶을 보아도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살 때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쳣습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들과 교제하셧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온전한 연합이 있었습니다.  온전한 평강과 안식이 그들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자연세계도 그들에게 협조적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도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인적으로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내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앞으로 보겠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하자 그 모든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에게서 걷혔습니다. 출19:3-6절 신30:15-16, 렘7:22-23절 등등의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나님이 저들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들에게 있을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우리 삶속에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넘칠 뿐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다시말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열방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에 열방이 복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때에야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예수님께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여기 예수님이 약속하신 안식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시는 살롬 평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안식을 약속하시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와서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적지 않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강과 안식을 원하지만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정한 평강과 안식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시는 평안과 안식과 생명은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시는 하나님중심적인 삶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부예배 시간에 오늘 설교를 하다 보니까 설교가 길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기도사역을 할 시간이 있어서 했어요.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부분들을 보게 하셨어요. 사단이 우리 속에 거짓말을 심어놓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삶이 쉽다고 하셨는데.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목적과 탐심에 집착하고 돌이키기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생각 속에 표현은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대단히 모진 분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지 못할 너무나 높은 수준을 요구하시는 모진 분으로 여깁니다.

실제로는 자기 탐심 때문에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전환하지 않으면서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 자기중심적인 삶을 정당화하면서 하나님중심적인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그 길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사람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진 분으로 여깁니다. 그런 것이 성도들 속에 적지 않게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사단의 거짓말에 속아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돌이키고 돌이켜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길로 돌이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결단을 촉구하며 초청했을 때 여러분 가운데 사단의 거짓말을 파괴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날 적지 않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를 꺼려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하면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말로는 하지 않을이지 모르지만 행동으로 여러 가지로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합니다. 목회자들에게 압력을 넣습니다. 


목회자들은 사람들에게 소위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는 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전파하신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로 인하여 부담을 느끼고 떠나는 것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러면서까지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흩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ㅔ 십자기를 지러 오신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야말로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잇고 이런 삶을 살 때 그들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동정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았고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전하셨습니다.

여러분 렘23장에 보면 양떼들을 흩어버린 목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 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4절입니다.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양들을 흩어버린 목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자 그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해서 흩어진 구절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의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다가온 상황에서도 그들이 듣기 원하는 평화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은 목자들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양떼들을 흩어버린 목자라고 표현할까요? 그들은 양들을 하나님께로부터 흩어버린 자들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양들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유업에서 흩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 양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흩어진 곳에서 다시 모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목자들을 세우실 것이라 말합니다. 돌보고 보살피는 목자들 그래서 다시는 양들이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일들이 없는. 

그러면서 목자들의 대표적인 분을 다윗의 한 가지로 말합니다. 다윗의 한 가지는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삶으로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사셧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그들이 살 수 잇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어떻게 우리 신앙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일까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창1장 1절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성경전체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전체가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삽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사람들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싫어합니다. 
또 말씀을 전하는 자들도 자기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단의 거짓말이 여러분의 생각에서 파괴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쉽습니다. 깨닫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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