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2009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막 14:10-21)


이 시간에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굴까요?마음속에 예수님이 사는 사람입니다.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계 되고 영생과 우리 모든 삶과 관계가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냐 아니 계시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살지 않는다면 그는 버리운 자입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줄기세포 연구가 활발합니다줄기세포란 원래 육신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기원이 되는 세포입니다줄기세포로 인해서 우리 인체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이 줄기세포가 작용하고 있기에 다쳐도 치료되고 복원이 됩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상당 부분의 줄기세포는 둔화되어 복원력이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활성화된 줄기세포를 추출하여 이식시키려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연구대로라면 심장에 심장세포를 심어주면 도마뱀의 꼬리가 다시 자라듯 자라서 새로운 심장이 생기고 간에 간장세포를 심으면 새로운 간이 자라나게 됩니다그래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줄기세포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과학자들은 치료를 위하여 줄기세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기의 복원을 위해 줄기세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우리 속에 예수가 접목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면 주님께서 우리 성품이 되시고 우리 생명이 되시고 우리 능력이 되십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고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20)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을 뿐 아니라 내가 철저히 악에서 죽을 때 생명의 예수께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불의한 욕망을 위하여 예수를 판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본문 21절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제일 좋았을 뻔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사는데 그는 자기 욕망 때문에 예수를 팔아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내가 죽는 것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교만을 죽여야 합니다.
흔히 고난 주간 넷째 날인 수요일을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주님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바로 다음에 가룟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사랑받는 장면이 본 14 3-9절에 나오고 바로 이어서 10-11절에 가룟 유다가 배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이런 극과 극의 장면이 연이어서 나올까요? 그것은 가룟 유다의 오해에서 비롯된 예수님께 대한 분노가 깊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는 바로 우월감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습니다. 계산이 빨라 제자들 중에서 돈 궤를 맡을 정도로 주님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출신도 다른 열한 제자들은 북쪽 갈릴리 출신인데 가룟 유다는 남쪽 유다의가룟이라는 도시였습니다. 가룟 지방은 교육여건이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출신부터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다른 제자보다 똑똑했고 돈 궤도 맡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는 항상 엘리트 의식이 가득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조금만 무시당한 듯 싶으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삼백 데나리온으로 1년 소득 정도의 가치였습니다. 유다는 그것을 허비했다고 곁에 계신 주님이 무안할 정도로 그 여인을 책망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잘했다고 자기를 두둔해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자기를 제지하시며 “가만 두어라. 왜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이 이 여자의 일도 말하라” 하시면서 여인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때 유다의 마음은 발칵 뒤집혔습니다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자기는 무시 받고 별 볼일 없는 여인을 두둔하시니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일개 무명의 여인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것 같아서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격한 감정 가운데 마귀가 들어가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고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받은 상처는 순전히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이 교만이 주님의 말씀을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시험은 교만 때문에 옵니다. 교만이 시험을 생산해 냅니다. 정말 낮아져 보세요.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시험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식쟁이일 뿐이요 초라합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하루 세 끼 이상 먹는 것 아닙니다. 우월감과 교만이 내게 있을 때 주님은 내 안에 계실 자리가 없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내 뜻을 죽여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또 다른 이유는 자기 야심을 죽이지 못해서입니다. 그가 왜 주님을 따랐을까요? 그것은 야심 때문입니다. 그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에게도 야심이 있었지만 가룟 유다는 특별히 그런 정치적인 야심이 강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때 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님에게서 그런 야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무수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뒤엎고 자신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자기 뜻이 큰 문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점점 자기 기대와는 다르게 그 반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와 능력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왕이 될 채비를 하지 않고 여전히 소수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어울리는 사람도 비천한 사람들이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다는 말씀만 하십니다. 이것을 본 야심을 가진 가룟 유다로서 너무 답답하고 속터질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야망을 비전으로 착각했습니다. 비전과 야망은 다릅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지만 야망은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 주님의 뜻을 맞추지 못합니까? 주님의 뜻을 받들려면 내 뜻을 접어야 하는데 도리어 주님을 불러 내 뜻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날마다 내 뜻을 놓고 기도하니 어떻게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겸손히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그냥“하나님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탐심을 죽여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있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약점은 바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그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여인을 책망한 것은 선교와 구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아 그것을 훔쳐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팔아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으니 얼마나 탐심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있는 약점이 아닙니다. 사람이 탐심에 눈이 어두우면 상상할 수 없는 짓을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팔고 부모를 팔고 자식을 팔기까지 합니다. 누구나 한 가지 이상씩의 탐욕이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면에 약한지 알아야 합니다. 물질에 명예에 권세에 이성에 무엇에 약하냐는 말입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다 지켰지만 물질 사랑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것은 다 잘 이겼는데 이성문제에 넘어졌습니다. 베드로는 한 순간 자기 목숨을 사랑해서 거짓을 말합니다. 자기 목숨이 우상이었습니다. 자기 건강이 우상이기도 합니다. 자기만이 갖고 있는 탐심을 버려야 예수님을 바로 모시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가 가장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때로는 성공을 가져다주는 동력이 되기도 하나 지나치면 자기 체면을 위해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옳은 줄 알면서도 자존심이 마음을 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차례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향유 사건을 통해서 질책하시므로 유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적의 마음을 회개하기는커녕 반항함으로 예수님을 팔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도 “너희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시며 그의 회개를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저건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하고 자존심 소리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말을 듣고 근심하며 한 사람씩 “접니까?” 하고 질문했지만 그런 상황에서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유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그러시면서 “나를 파는 그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세 번째 회개의 기회인데 그래도 유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랑의 목자라면서 어떻게 이렇게 저주를 퍼붓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한 자의 삶이 이렇게 악하고 비참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유다에게서 자기를 죽이지 못한 자의 최후를 봅니다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삽니다. 최고의 원수는 바로 자기입니다아무리 봐도 우리가 가룟 유다보다 더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갖고 있는 죄악의 속성 우리도 다 갖고 있습니다. 주님을 뒷전에 둔적이 얼마나 많고 주님을 무시한 적이 얼마나 많으며 그의 뜻보다는 내 뜻만을 추구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모두 예수 공로 힘입어 교만을 죽이고 내 뜻을 죽이고 탐심을 죽이고 자기를 죽여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온전히 사시는 가장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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