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010

예수의 영성생활


예수는 자신의 독립적인 공생 애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 요한과 함께 준비의 기간을 보냈다. 이 준비 기간은 그 이전에도 그런 기회를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성경을 통해 볼 때 예수는 우선 세례 요한에게로 와서 세례를 받는다. 이 세례 사건은 매우 의미심장한 경험을 예수에게 제공한다. 복음서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하듯이, 이 사건에서 예수는 성령에 의해서 종말론적(終末論的)인 사역을 위해 준비되었고, 또한 종말의 시작과 함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예수가 본하늘의 열림의 환상은 종말론적인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회개의 표시였던 그 세례가 예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주었다. , 그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사역을 위해서 부름을 받는 소명(召命) 사건이었다.

이 사건 후에, 예수는 40일 동안 광야로 나가서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성인들이 자주 행했던 패턴과 일치한다. 광야에서 지내면서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복음서들은 다만 하나의 이야기만을 전하고 있다( 4:1-11, 1:12-13, 4:1-13). 사탄의 시험 이야기는, 이 수련을 통해서 예수가 이른 결론 중 하나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로 인식하고 있으며, 아들로서의 권한을 자의(恣意)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방법에 따라서 사용할 것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 어떤 형태의 사탄적인 타협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그의 공생애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지켜졌다.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사용하되,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그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서도 사탄적인 수단과 연합하지 않았다. 죽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한 그 뜻에 복종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 원칙이, 적어도 복음서에 의하면, 광야에서의 수도 생활의 결과로 결정되었다.

예수의 광야 수도 생활의 결말 부분에 복음서 저자들은 의미 깊은 정보를 하나 던져 준다. 누가복음에는 없지만, 마태복음에는천사가 시중들었다( 4:11)고 언급되어 있고, 마가복음에는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1:13)고 표현되어 있다. 이 표현들은 광야에서의 영성 수련의 결과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인데, 그 배경은 에덴 유형론(Eden-typology)이다. 천사들의 시중은 하나님과의 열린 교제를 의미하고, 들 짐승과의 동거는 자연과의 열린 교감(交感)을 의미한다. 광야에서의 영성 수련을 통해서 그는 사탄의 유혹을 극복하였고, 그 영적 승리는 에덴의 상실 이후에 잃어버렸던 인간의 원형적(原型的) 삶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원형적 삶이란, 인간과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막힘 없는 교제와 사랑 가운데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예수의 광야의 사건은 인간의 영성적인 삶이 결국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회화적(繪畵的)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이후에도, 그는 얼마 동안 광야에서 세례 사역을 하면서 지냈던 것 같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기간이 얼마였든지 상관없이 그 동안에 예수는 요한과 같은 금욕적 영성 생활을 행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메시지나 삶의 스타일은 요한의 그것과 흡사했을 것이다.

이제 곧 종말론적인 파국(破局)이 도래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그 파국을 위한 준비로 회개할 것과 그 회개의 표시로서 세례를 받을 것을 촉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상당히 철저한 수준의 금욕적 영성 생활을 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경험했던 수도사적 영성 생활은 세속의 거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 자취를 남겨 놓았다. 또한, 영성은 예수의 이후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 세밀한 논의할 필요가 있지만, 이와 같은 영성의 특징들이 그의 말씀 속에 자주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본다. 예수에게 있어서 영성의 출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다스림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데부터 시작한다. 예수의 복음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전통에 따르면, 영성적인 노력이란 구원의 은혜를 입고 변화 받는 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일련의 작업이다. 이 영성적인 노력은 마침내 하나님과 하나됨으로써,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고,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서( 6:36) 우리의 삶 전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다.


기도를 통해서 얻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에 의하면, 성령이다( 11:13).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영성적인 노력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을 때, 축제적인 영성을 가질 수 있다. 예수는 이러한 영성적 삶을 살았고, 또 그러한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성의 대가(大家)이자 모델로 서 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유혹을 당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모델이 될 뿐 아니라( 4:15), 우리에 앞서 완전한 영성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델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계를 살펴보면, 예수의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한 편에는 지나친 물질주의적 영성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고린도교회적인 열광주의적 영성이 있다. 한 편에는 현실도피적, 초월주의적 영성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는 기독교적 율법주의적 영성이 세력을 확장하고 잇다. 이 양상은 예수 당시의 유대교 안에 있었던 다양성과 유사하다. 다양한 흐름 속에서 예수는 새로운 영성을 제시하여 올바른 길을 보여주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영성의 바른 길잡이로 다가 온다. 예수의 영성은 이러한 다양한 경향들 가운데서 통합적 중용(統合的 中庸)과 창조적 초월 (創造的 超越)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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