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를 믿지 아니 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기 15:14∼16).
파란 하늘과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의 마음을 비교해 봅시다. 하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한데,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게 선행을 가르칩니다. 착한 일 많이 하면 곧 선을 많이 쌓으면(적선:積善) 복 받고 극락에도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게 선행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악행을 가르친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선행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참된 의미에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어서 마음은 완전히 타락되었으므로 그 더러운 마음으로부터 선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나무로 말하자면 나쁜 나무입니다. 나쁜 나무 보고 좋은 열매 맺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먼저 선한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반박하며 “아니 사람이 죄만 짓나, 선한 일도 하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선이 사람이 볼 때는 선한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 볼 때 선일 뿐 하나님 보실 때는 선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문에 사람 인(人) 자 옆에 할 위(爲)자를 쓰면 거짓 위(僞=人+爲) 자입니다. 사람이 하는 선은 위선(僞善), 즉 거짓 선이라는 것입니다. 선은 선인데 죄가 발린 선입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먼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임 받아야 합니다. 나쁜 나무에다 거름을 많이 주고 물도 많이 주면서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공을 들일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에 접을 붙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나무에 접붙이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구원받을 때, 거듭날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 용서함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에 접 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으로 인한 변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에게 오시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 사람이 되어야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의 생명을 받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보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국 그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속에 죄 짓고 싶은 마음이 막 올라오는데 꽉 억누르며 ‘죄 짓지 말아야지. 착한 일 해야지’라고 결심하고 자기 의지로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죄는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 맺으려고 막 흔들거나 무슨 노력합니까? 그냥 절로 좋은 열매 맺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할 수 있는 힘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도 있으시겠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자마자 금방 천사처럼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되면 점점 거룩해집니다. 좋은 나무라도 자라야만 좋은 열매를 맺힙니다.
구원받고 나서 신앙이 자란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마음이 그때부터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 수십 년 다니고,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기도도 하지만, 밖에 나가면 죄 짓고 거짓말하고, 욕심 부리고 나쁜 짓 합니다. 그리고 또 교회당에 가서 ‘잘못 했다’고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 듣고, 말씀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죄 짓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다시 밖에 나가면 또 죄 짓고 기도하고, 밖에서 나쁜 짓하고 교회 와서 찬송 부르고…. 그것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종교생활을 오래 하면 양심까지 무뎌집니다. 그리고 삶의 진정한 변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도를 덜 해서 그렇습니까, 의지가 약해서 그렇습니까, 돈을 덜 바쳐서 그렇습니까? 교회당에 더 오래 다니지 않아서 그렇겠습니까? 교회당에 평생 다녀도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계시록 21:1)에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새 생명과 새로운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그 그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 우리의 결심이나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음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기 35:7,8).
사람이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습니까? 죄 가운데 태어나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타락된 마음을 가지고 죄를 물 먹듯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 기준에서 착한 일 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어린아이가 더러운 진흙을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호빵을 움켜쥐고 엄마에게 가져와 “엄마, 호빵 드세요” 하고 건네주면, 엄마가 좋아하며 받아먹겠습니까? “고맙기는 한데 네 손이 더러워 못 먹겠다. 개나 갖다 줘라”라고 할 것입니다. 개야 넙죽 받아먹고 더 달라고 졸졸 따라 다니겠지만, 엄마는 못 먹습니다. “네 의는 너 같은 사람이나 유익하게 할 따름이라.” 너 같은 죄인들이 볼 때나 좋게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조차도 좋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착하고 의로운 일을 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저 좋아하실 줄로 여기면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타락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한들 하나님께서 받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교회 가면 헌금 낼 걱정부터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헌금이나 십일조를 바치는 것 등은 거듭난 후에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라도 죽으면 지옥 갈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자격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옥 갈 죄인에게서 무엇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한 시몬에게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느니라”고 책망하였습니다(사도행전 8:20,21).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의 구속은 너무 귀하여 그 재물로 한 사람의 영혼도 구속할 수 없습니다(시편 49:6-8).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이 하나님께 먼저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감사함이 동기가 되어 모든 것을 행하고 드리며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면 영원히 지옥 갈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갈 소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을 위해 백 번 죽어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습니다. 헌금을 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구원받은 후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자원 (自願)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복음을 위해 물질을 드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서울대학교에 등록금을 내려면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믿는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도 않은 채 밤새도록 기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기도는 교회당 천장 이상 더 올라가지 못 할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해야 할 기도는 하나뿐입니다. “저를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 제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외의 다른 기도는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나 취직 좀 시켜주시오. 나 점심 값 좀 주시오. 나 감기약 좀 주시오”라고 합니까? 그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고 부르짖어 우선 물에서 건짐부터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옥 갈 죄인은 먼저 지옥 갈 운명에서 건져달라고 부르짖어야 하고 그 운명에서 건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 3서 1:2)라는 말씀대로 영혼의 문제가 우선이고 범사에 잘되는 것이나 육신의 강건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운명을 뒤로 한 채 너무 맹목적인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이사야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짠 것”이란, 앞에 보면 거미줄로 옷을 짠다는 말이 있는데(이사야 59:5), 인간이 자기 죄를 가리기 위해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거미줄을 짜서 옷을 만들 수 없듯이, 인간의 선행과 열심으로 자기 양심의 부끄러움을 가리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이사야 59:12).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가 평생 짓는 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죄를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사니까 그렇지, 머리털 보다 더 많은 그 죄(시편 40:12)를 다 기억한다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꽉 막혀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1,2).
하나님이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귀가 둔해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꽉 막혀 있어서 이 죄를 해결하기 전에는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이며, 다른 무엇을 구해도 죄로 인해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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