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10-13).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을 잘 공경한다는 종교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백성들의 장로들 그리고 율법사들, 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를 철저히 바쳤으며, 하나님 앞에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하고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또한 길게 기도하고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요즘 아무리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도 아마 그 당시에 제사장들이나 율법사들 및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세리(稅吏)는 당시에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백성들에게서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여 얼마는 로마에 바치고 얼마는 중간에서 가로채어 배를 채우던 자들이었습니다. 세금 관련 업무를 하면서 국고를 축내며 사리를 채우는 자들이 요즘도 종종 있습니다.
또한 돈을 그렇게 얻어 정상적으로 쓸 리가 없는 그런 자들과 어울렸던 창녀와 죄인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종교가들과 이런 죄인들은 상종(相從)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하다고 자처한 그들은 죄인들 근처에 가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집에 가셔서 그들과 같이 음식을 잡수시고 말씀도 하시고 그들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종교가들이 불평을 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도 깨끗케 하며 소경의 눈도 뜨게 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는 예수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라면 자기들과 가까이 해야 할 것으로 그들은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정치적인 운동을 하려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인 자기들과 가까이 해야 할텐데, 정치적인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고 죄인들과 같이 어울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가 건강한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병들어 죽게 된 사람을 위해 의사는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을 고치러 오신 의사가 아니고 영혼의 병을 고치러 오신 의사이십니다. 영혼의 병은 곧 죄를 뜻합니다. 병(病)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죽습니다. 죄(罪)는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타락하게 하며, 그리고 끝내는 지옥에까지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은 죄를 업이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1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요한 1서 3:5). 예수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신 것은, 당시의 제사장들과 율법사들, 장로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 의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롭다고 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겼으므로,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가까이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따지러 온 장로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1:31)고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의로운 것이 없고 죄 지은 것밖에 없으므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가 쉬운 것입니다. 죄인이라야 그 죄로 인해 지옥 갈 운명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병이라도 고치는 의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즘에 불치병이라고 하는 암, 에이즈, 기타 무슨 병이든지 고치는 의사가 있다면 모든 환자들은 그 의사를 만나려고 할 것이고 또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죄인이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예수님을 유대 종교가들은 왜 배척을 한 것입니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택한 백성인데다가, 안식일을 지키며 십일조를 바쳤으며, 성전에 모여 경건하게 예배하고 하나님을 위해 금식하고 구제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거룩한 종교가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미 자기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던 터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구원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며 당장이라도 죽으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를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종교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구원받지 못한 반면에 세리와 창녀들, 죄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인 것 같지만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예수님 옆에 못 박힌 살인 강도 한 사람이 구원받은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누가복음 23:39 ~ 43).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 중죄인이나 흉악범을 십자가에 산 채로 못박고 매달아 공개처형하던 사형 집행 방식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이 함께 못 박혔습니다. 한 쪽에 못 박힌 강도는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죽은 자도 살리고 문둥이도 깨끗케 하는 그런 이적은 행하면서 왜 바보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거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당장 십자가에서 뛰어 내리시오. 그리고 나도 좀 구원해 보시오."라고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다른 한 쪽 강도 역시 평생토록 강도질하고 살인하고 온갖 흉악한 짓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기 옆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반대 편에 달린 강도를 포함하여 십자가 밑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머리를 흔들면서 조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반항하거나 원망치 않는 예수님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네가 동일한 정죄(定罪)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그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누가복음 23:40 ~ 42).
죽음 직전에서 한 강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예수님, 그분이야말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이시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시고 어떠한 죄인이든지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것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곧 지옥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영혼을 예수님께 부탁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이 은혜를 베풀면 저는 살 수 있습니다"라는 간구가 자연스럽게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평생 흉악한 죄를 지어 놓고 그래도 천국에는 들어가고 싶어 그러느냐? 너는 안 된다. 너는 이제 늦었다"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한마디 책망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살인 강도가 구원받은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살인 강도로서 선한 일을 할 시간도 없었고 하나님을 섬길 기회도 갖지 못한터였지만, 그런 그가 주님의 구원의 약속을 직접 눈 앞에서 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자리에서 그 살인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곧바로 낙원(樂園)에 들어갔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상의 그 살인 강도가 구원받은 것이나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나, 주님의 구원은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죄인이냐는 것은 사람의 판단일 뿐이고, 그 죄인을 구원하시는 권능(權能)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主體)는 죄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속(救贖) 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죄가 너무 많아 예수 믿고 싶어도 못 믿겠습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술고 먹지 않고, 마음을 좀 고쳐 먹은 다음에 교회 다니겠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목욕탕 가자고 하니까 "나는 때가 너무 많아 목욕탕에 못 가겠으니, 집에 가서 좀 씻고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죄가 너무 많으므로 예수님이 구원하지 못할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왜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지 그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구원받기를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해야 할 말은 "사람 살려!"라는 말뿐인 것과 같습니다.
누가 물에 빠졌다면 그것을 본 사람이 먼저 물에 들어가 건지거나 다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 사람이 살려 달라고 하든 하지 않든, 구조하는 입장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일단 살려 놓고 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기를 부르짖는 그 사람만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치 않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멸망받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구원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하고 물어보고 그들이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찬송가에 "네가 구원얻었느냐 질문함을 받을 때에 죄사함을 못 받음 몸 무슨 대답할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네가 구원받았느냐?"고 질문받을 때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나 스스로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모른다는 것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줄 압니다. 구원(救援)은 그렇게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언제 죽어도 하나님 앞에 간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한 1서 5:10)
구원받았다는 것, 자신이 거듭났다는 것에 관해서는 찬송가에 수없이 나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 안위함과 영생함을 주께 모두 얻었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피와 성신으로 거듭나니 땅 위에 사는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 찬송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간증(干證)입니다. 찬송(讚頌)은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마음에 이루어진 사실을 시(詩)로 써 놓은 것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부르려니까 자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찬송을 부르는 것은 자기 찬송이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 상태와 찬송가 내용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이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몇십 년 교회 다녔는데도 왜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중요한 두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자신이 지금이라도 죽으면 지옥 갈 운명에 있다. 즉'나는 죽으면 지옥 간다'는 것을 한번도 절실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지금 죽으면 지옥간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둘째, 구원받을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을 한번이라도 들은 일이 없습니다. "그저 교회 다니면 믿는 것이고, 열심히 하면 잘 믿는 것이다. 천국이 있어서 보내 주시면 가고, 말게 되면 말지 뭐. 이렇게 열심히 다니는데 설마..."하면서 막연히 습관적으로 교회당에 다닐 따름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종교인과 죄인의 상징이라 할 세리, 창기를 비교 설명하면서 죄인이라야 구원받는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도 가장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이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 부류는 자인은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께서도 받아 주시지 않을 것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과 천당이 있든지 지옥이 있든지 나는 마음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부류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고,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사람이고 자처하며 세례받고 집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높은 위치에 오르기도 하여 사람들에게 믿음 좋다고 칭찬도 받는 경건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이들 또한 구원받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으려면 죄인이라야 합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그것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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