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0:19-20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
오늘은 기복신앙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지난 주일에는 율법주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는 삼위일체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신앙체계의 세 가지 특징으로 세 가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이론을 제공한다면 기복신앙은 그 배후에 있는 탐심을 말하면 인본주의는 그런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자기의 수단으로 삼는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중심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중심적인 삶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반면에 타락의 본질은 자기중심적인 삶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리 많은 종교적인 헌신과 열심히 있어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하나님의 생명 실제도 없습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인데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 목적을 위한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는 혼합주의 신앙입니다. 안믿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삽니다. 우상숭배하며 삽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숭배는 혼합주의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나 바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림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자기를 섬긴 것입니다. 동일한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려면 자기 목적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는데 그것은 실제로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살고 자기 목적이 성취되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인지는 실제로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것에 따라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은 기복신앙의 예배를 살펴볼 것인데, 기복신앙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1.성경이 말하는 복
기복신앙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얼마나 많이 복에 대해서 말하는데 왜 잘못되었냐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왜 기복신앙이 왜 타락한 거짓신앙체계인가를 알기 위해서도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하나님이 복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하는 아주 중요한 이해중 하나는 하나님 자신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복입니다.
오늘 신30장 19-20절은 복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자기 길로 행할 것을 염두해 두고 하시는 것 같아요. 하늘과 땅을 내 증인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생명과 복 또 사망과 저주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생명을 택하라고 합니다. 즉 복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생명과 복을 택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목소리를 청종하고 부종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네 생명이시요라고 합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복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님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 그분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2)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와 함께하시고 하나님을 버리는 자를 버리십니다.
역대하 15장 2절 이하입니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3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4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여기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함께한다.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난바 되신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멸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3)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까요?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고 할 것입니다.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한 것이 아니라 멸시했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를 존중한다고 외쳤어도 효과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존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1장 4절입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예레미야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렘 6장 20절을 봅시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이들에게 하나님을 존중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한다면 이런 예배를 드리겠냐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하십니다.
렘2장 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여기보면 본인들은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자부했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한 삶입니다. 우리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관점만 통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요. 그 관점을 모르니까 이사야시대에 아무리 외쳐도 효력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이 관점을 모르면 우리에게 효력이 없어요.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우리 식대로 해석하니까요.
렘2장을 보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 혹은 하나님을 존중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행하심에 우리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있는 삶이며 이 삶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습니다. 이런 삶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렘6장을 보면 시바에서 원방에서 향품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내 법을 버렸다고 합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이라고 표현하는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사는 삶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4)복 혹은 생명과 신앙의 본질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분이 복이요 생명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넘칩니다. 기도응답이건 인도하심이건 보호하심이건 등등.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노래한 것이 그의 인생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런 생명이 넘칩니다.
반대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떠납니다. 종교적인 의식과 모양은 가득하고 종교적인 교리는 믿음으로 고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실재가 걷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걷힙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앞에서 다림줄안에 거하는지 안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는지 안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만큼 간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과 함께하시고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버리시고 임재를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심각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나라에 기독교인들이 많은데 그리고 교회가 많은데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교리를 다 믿고 하나님을 위한 종교적인 헌신이 많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개인과 교회 가운데 함께하는 경우는 너무나 적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사야 시대처럼 예레미야 시대처럼 유대인들처럼 종교적인 의식과 헌신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렇게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예배가 상달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도는 간 곳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이것을 살펴본 이유는 이것이 보여야 다음에 말할 거짓신앙이 보입니다. 이것이 보여야 우리 삶이 보입니다. 이것이 보여야 기복신앙이 무엇인지 보입니다. 왜 잘못되었는지가 보입니다.
2.기복신앙과 거짓
우리 신앙이 타락하면 항상 거짓신앙체계에 빠집니다. 신앙이 타락한 시대일수록 거짓신앙체계가 전면에 나섭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신앙이 타락했기 때문에 어느 시대보다 거짓신앙체계가 가득하비다.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기복신앙과 아울러 같이 오는 것이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복신앙에 빠지면 항상 거짓이 팽배합니다.
1)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복신앙에 빠지면 거짓이 팽배합니다.
렘5장 31절입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6장 13절입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8장 5절입니다.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8장 8절입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이것을 보면 예레미야 시대도 율법적인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아는 것은 중요하나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수단입니다.
18장 18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종교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치면서 하는 말입니다. 영어 niv를 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를 쳐야 제사장들에 의해서 가르치는 율법의 가르침이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에게서 나오는 모략도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들에게서 나오는 말씀도 쏟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선지자 제사장 율법사 서기관 지혜로운 현인이라는 사람들이 다 거짓을 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거짓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심판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볼 때 당연하지 거짓을 행하니 심판이 오지 그럽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이 구절을 몰랐을까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 거짓을 행했다. 총체적으로 거짓을 행했다. 지도자들도 백성들도 거짓에 빠졌기 때문에 심판이 왔습니다고 하고 설교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와 같은 거짓에 빠져있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미워하지요. 제 말은 우리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하나님이 무엇을 두고 거짓이라고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이 우리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여기서 말하는 거짓이 무엇인지를 보았더라면 자기들은 거짓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2)거짓의 의미
무엇이 거짓입니까? 렘6장 1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4절입니다. 여기에 거짓이 무엇인지 나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짓은 평강이 없는데 평강이 있다고 말하니 거짓입니다.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름대로 성경에 기초해서 그렇게 전한 것입니다.
왕상 2장 33절입니다.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대상 22장 9-10절입니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지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 그 나라 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삼하 7:12절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6절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대상 23:25절입니다. "다윗이 이르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 백성에게 주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제가 몇 구절만 읽었습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왕위와 나라가 가문이 영원히 보전되고 가문과 나라에 영원히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영원히 자기 이름을 두시고 자기 눈과 마음을 거기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 그 나라가 다윗의 나라였습니다. 왕위가 다윗의 왕위였습니다.
왕이 다윗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평강을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르심으로 우리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의미로 평강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평강을 외쳤어요.
뿐만아니라 렘7장만 해도 그날도 안식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성대한 예배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그 나라를 지키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성경을 주해하면서 평강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인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자기가 참 선지자라고 하면서 이것이 거짓이라고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믿는다고 외쳤을 때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만일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래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돌이키지 못한 것입니다.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레미야서가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역사가 하나님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는 것이 확실한 것을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대로 성전이 불타고 폐허가 되고 실제로 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참된 선지자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 당시에 살았다면 믿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예레미야 당시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참된 선지자였고 자기 조상들은 거짓이 가득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심판인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들의 문제라는 것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거짓입니까?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이 말하는 복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들이 종교적인 의식은 가득했고 종교적이 헌신은 가득했어도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에 대해 관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철저하게 하나님을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평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앙에 대한 이해도 잘못되었습니다.
의식이 본질을 대체한 것이 율법주의인데 의식 잘해도 본질에서 떠나면 껍데기뿐인데도 그들은 의식을 잘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리더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닥쳐왔는지도 모른채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와는 상관없이 저들이 원하는 좋은 약속만 임의대로 가져다가 전한 것을 두고 거짓이라고 그런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거짓이었습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렘23장 16절입니다.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렘7장을 다시 봅시다. 22절 -26절입니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지금 이것이 예레미야 당시의 백성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리더들은 강팍한 대로 행하는 그들에게 심판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제 거짓임이 보입니까? 이제 왜 이것이 거짓이었는지 보이세요?
성전에 해도 그렇습니다. 아까 신12장에서 내가 내 이름을 그곳에 영원히 두고 내 마음과 눈이 그곳에 영원히 두겠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그 이전에 신10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즉 신앙의 본질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식입니다.
뿐만아니라 왕상 9장 1절 이하를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그런데 그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총체적으로 영적인 분별력이 어두워져서 무엇이 옳은 신앙인지도 전혀 모른 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잇는데 의식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잘한다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무시한 채 성경에 나오는 좋은 약속들만 임의로 택해서 그것을 근거로 저들에게 평강이라 평강이라 축복이라 축복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이라 생명이라 이렇게 외친 것을 두고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문자 그래도 거짓이었습니다.
그래서 렘23장에서 그럽니다. “항상 그들이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으리라고 한다고 합니다. 영적분별력이 가려지면 그럽니다.
21절입니다.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이제 그것이 왜 거짓인지 보이시지요.
3)기복신앙에 빠지면 사람들은 거짓을 좋아합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내 백성들은 그 거짓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내게 돌아오기를 거부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어요. 여러분 거짓 좋아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은 거짓을 좋아했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온 것이 너무나 당연했지만 그리고 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시대의 문제만 아니고 우리시대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들이 거짓을 좋아한 이유는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워하셨는데 신앙이 타락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축복 자기 문제해결 자기 사업 자기 자식 잘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에게 관심도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내 백성이 거짓을 고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30장이 그 말씀입니다. 저들의 일을 서판에 기록해서 대대로 남기라고 하나님이 하십니다. 화가 대단히 나셨어요.
9절이하입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11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말은 입으로 직접 그들이 이렇게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행동의 소리입니다. 우리 행동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는가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탐심이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지 부드러운 메시지만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길에서 떠났고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나 심각하게 거짓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목적을 위한 메시지만 우리 임의대로 선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4)거짓은 효력이 없습니다.
렘7:4절입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8절입니다.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이것은 두려운 말입니다.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신앙이 지금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다가왔어요. 그런데 축복이라 축복이라 복주실 것입니다고 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헛된 자만 가운데 빠지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평강을 외쳐도 심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 모든 것이 심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거짓은 소용이 없습니다. 거짓은 성도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헛된 자만 가운데 빠지게 해서 마취제 같은 역할만 했습니다. 이제 거짓이 무엇인지 보이시지요.
3.기복신앙의 예배
1)기복신앙의 예배에서는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칩니다.
사람이 탐심이 가득하여 하나님을 믿지만 자기 목적을 위해 살기 때문에 그 목적이 성취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메시지만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리더들이 왜 그런 메시지를 전하냐면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소위 부드러운 메시지 평강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기복신앙에 빠지면 부드러운 메시지가 판을 칩니다. 예레미야 시대는 선지자 제사장 율법서 현인 할 것 없이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다 총체적으로 거짓신앙체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이 어느 도시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어요. 자기 친구가 서울 근교에서 숫자적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인데 전화해서 교회성장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3 년동안 주일낮예배 뿐아니라 모든 예배 때 축복만 전하라고 하더랍니다. 이길수 목사님이 지방회 연합성회가 있어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기복신앙에 빠져있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기도했는데 강사 목사님이 정확하게 기복신앙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목사님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한국교회에서 복을 전해서 성장하지 않은 교회 있으면 찾아보라고 하시더래요.
그것이 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영적으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걷혀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임의로 성경에 나오는 좋은 약속만 택해서 전파하는 심각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성도들이 원하고 교회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사람을 절대로 변화시키기 못합니다. 사람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우지 못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삶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서위 치는 설교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강하게 설교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길을 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과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소위 축복의 메시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절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에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이 내 회의에 참여했더라면 내 말을 저희에게 들려서 내 백성들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했을텐데”
이 말씀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에스겔서입니다. 거기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갑니다. 605년 597년 586년입니다. 597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중에 한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바벨론에서 예언한 사람입니다.
겔13장 8절-1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평강의 메시지를 무엇으로 비유합니까? 무너지는 담을 가리기 위해서 회칠을 하여 견고한 담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부드러운 메시지가. 하나님의 심판이 올 때 그 회칠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서 22장에 보면 또 나옵니다. 25-31절입니다. "그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배역함이 우는 사자가 식물을 움킴 같았도다 그들이 사람의 영혼을 삼켰으며 전재와 보물을 탈취하며 과부로 그 가운데 많게 하였으며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회칠한 것을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얼마나 두려운 내용입니까?
이것을 보면 부드러운 메시지는 결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메시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높아지게 해서 헛된 자만 가운데 빠지게 해서 자기가 처한 상황도 인식하지 못하게 해서 심판받게 하는 것을 영혼을 삼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메시지는 심판을 막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은 신앙이 타락할수록 하나님의 메시지는 강해집니다. 여러분이 부모라고 할 때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습니다. 자녀가 멸망의 길로 가면 잘한다 축복이다 복주고 복주리라고 하겠어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하겠어요.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그럴 부모가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얼마나 메시지가 강해지는가 볼 수 있어요.
렘23장 29절에서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렇게 해서라고 돌이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시대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에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에 어떻게 하랴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안개 같도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화로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신앙이 타락하면 온통 관심이 자기 탐심과 목적을 이루기 원하기 때문에 이런 메시지를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중심적인 메시지를 부담스러워했고 똥 보듯이 피했어요. 오늘날의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2)사람을 두려워함이 가득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만 해도 저들이 탐심이 가득하여 평강이 없는데 평강하다고 외쳤어요. 축복이 평강이 저들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중심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는데 하늘과 땅을 증인 삼아 말씀하셨는데. 세상의 방법 자기 방법으로 살면서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원하니까 이렇게 그들 역시 동일하게 탐심이 가득해서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그러니까 사람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을 채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구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겠느냐.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보세요. 메시지 뿐아니라 모든 면에서 너무나 사람중심적입니다. 진짜 이것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에는 관심도 없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다시 오게 하고 그래서 우리 교회가 부흥하게 할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메시지 뿐아니라 순서 시간에서 그럽니다. 성가대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래 성가대 아삽의 무리는 사람에게 찬양하던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노래합니다. 그래서 성가대원들을 돈을 주고 사옵니다. 독창자를 돈을 주고 사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노래를 잘해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초대왕 사울은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림받았습니다. 그 중심에 개인적인 야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조건없는 섬김이 없습니다. 진정한 섬김이 없습니다.
기복신앙에서도 종교적인 헌신과 희생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를 보세요. 예레미야 시대를 보세요.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희생과 헌신을 보세요. 엘리만 해도 자기 두 아들의 죽은 소식보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충격이 클만큼 종교적으로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기복신앙에서도 종교적인 희생과 헌신은 가득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서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의식이 뛰어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할 것은 기복적인 섬김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주 예를 듭니다. 남자가 있어요. 재벌 외동딸이 있어요. 자기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싫어요. 그래서 빚을 내서도 잘해줍니다. 그런데 목적을 결혼 후에 얻게 될 부와 명예를 위해서 그럽니다. 그럴리 없겠지만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 있다면 이 여자가 그 남자와 결혼하겠어요.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복적인 섬김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시대의 그 엄청난 의식을 보고 하나님이 싫어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이 그 번제를 받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조건없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주어질 복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이 내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일에 동참하는 분들이 오늘날 몇 분이나 됩니까? 예를 들어서 건축헌금을 할 때 건축헌금하면 하나님이 복주셔서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기 때문에 동기부여해서 헌금을 걷고 그러지요.
그런데 이런 것하고는 상관없이 그저 아버지를 사랑해서 아버지 일이 내 일이라는 믿음으로 건축헌금에 동참하는 분이 몇 분이나 되겠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러 온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복신앙에 빠져있다면 자기가 은혜받는 일에 관심이 있지 아버지 일에 동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복신앙의 예배는 자기 목적의 성취를 위해 나가는 예배입니다.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 새벽기도하고 자기 서원성취를 위해 작정기도하고 좋은 대학 자녀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금식기도합니다. 자기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밤마다 나와서 기도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주의 나라를 붙들고 주 앞에 서는 자는 적습니다. 모든 것이 다 조건있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빠징꼬 기계 취급합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의 예배의 특징입니다.
어리석은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자기를 잃으면 얻을 갓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여러분 한번 해보세요. 여러분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세상의 방법을 동원해서 목적을 이룬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이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삶처럼.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목적삼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일에 전 존재로 동참하고 아버지의 일이 이루어지를 위해 살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잃으면 얻으리라.
4)기복신앙에서는 선별적인 순종이 가득합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살기 때문에 순종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선별적으로 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합니다. 사울왕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 왕의 목을 백성 앞에서 밟는 것이 승전의 행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벌써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갔을 때 기념비를 쌓고 있잖아요. 그래서 선별적인 순종을 한 것입니다.
5)기복신앙에서는 세상사랑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사랑이 탐심이며 영적인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복신앙의 핵심은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탐심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탐심이 가득한 것은 기복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기복신앙에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세상사랑과 탐심을 부추깁니다. 그리고 타락하면 축복의 개념이 바뀝니다.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이 축복이 됩니다. 돈많이 버는 것이 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많이 버는 것이 반드시 축복은 아닙니다. 안믿는 사람들 중에도 돈많이 버는 자들이 많습니다. 돈많이 버는 것이 축복이라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복받은 교회입니다. 나는 부자로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후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도 칭찬한마디 없습니다.
렘12:1-2절을 보면, 심판이 코 앞에 온 상황에서도 최소한 일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잘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축복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타락하면 기복주의에서는 자기 목적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걷혔고 하나님과 교제도 걷혔고 하나남의 목적 의도는 모른 채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채 음란과 사술을 가득한 채 사업 잘되면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밖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 저는 기복신앙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예배에서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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