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죄를 극복하고 사는 데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증인이 되리라는 아버지의 의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미
패배해버린 영역을 극복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죄와 죄의 본성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끊어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죄로부터의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 더 많은 능력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해 더 이상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그가 돌아가신
것도 충분치 않다면 그 밖에 무엇이 더 남아 있을까? 이 전쟁은 이미 싸웠고 이겼다! 이미 피로 끝난 문제를 계속 붙잡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계속된다고는 생각지 않는가?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이 편에 잘못 머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여길지어다란 단어는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를 말해주고 있다. 내가 거기에 대해 죽은 자라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능력은 필요 없다. 대신 기적과 불가능을 위해서 담대할(행4:28-29)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진 문제 중 하나는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불가능하지
않은 일만 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나타나지 않으신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부분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벼랑 끝에 서서 우리의 참된 부르심과 맞닥뜨리게 된다.
혼동하지 말아야 것은 인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궁극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접근하는 그분의 방법은 우리와는 대단히 다르다. 그의
의와
인격은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우리 안에 이룰 수 없다. 우리의 안간힘 쓰기를 접고 온전히 그의 뜻에 우리를
맡기는 법을 배울 때 우리의 인격이 성장한다.
능력으로 입히다 –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제자들은 너무나도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능력이란 단어는 기적적인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능력이란 단어의 원어인 두나미스는 ‘할 수 있는 힘’이란 뜻이다.
그 뜻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할 수 있는 힘으로 옷 입는다는 것이다.
가룟 유라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들은 역시 가운데 표적과 기사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훈련을 받았던 인물들이었다.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제자들보다 더 많은 기적을 보거나 행치 못했다. 그런데
이들 열한 명은 위로부터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능력을 받았고 그걸 알았다. 이 능력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부터 온다.
어떤 이들은 실수할 것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과의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말해왔다. 결국 성경과 맞지 않는 경험을 기초로 한 자들에게서 잘못된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려움이 우리의 스승이 되었다. 하지만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왜 능력 없이 교리로만 무장된
진영에 속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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