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산 사람들 가운데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 가장 많은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명하셨다. 누가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에서 그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했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에서 그의 능력을 경험하기도
했었지만 그들은 두나미스(dunamis),
즉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기다려야만 했다.
이는 그들이 이전에는 예수님의 기름 부으심의 지붕 아래서 행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 자신이 직접 그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할 때가 다가왔다. 불세례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며 이는 장차 핍박이 올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들이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성령세례는 하늘의 두나미스(dunamis, 능력) 속에 잠시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은 이런 세례를
통해 주어지는 놀라운 은사이다. 난 늘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은사에 대해 감사라고
있다. 하지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성령 세례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혹스러울 만큼 단순한 생각이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것이 곧 약속의 땅을 취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고 그 땅을 볼 수도 있었지만 아직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강을 건널 때 그들에게는 그 땅을 소유하도록 접근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주어졌다. 방언기도는 약속의 땅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하지만
강둑에 서서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다고 외치는 건 아무리 잘 보아도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이러한 무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의 언어를 받고서 거기서 멈춰 버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방언 기도를 하게 될 때 자신들이 성령 충만하다는 가르침을 늘 받아왔다. 잔은 오직 흘러넘칠 때에만 가득 찬 줄안다. 흘러 넘쳐야 충만한
상태이다.
하나님의 충만은 내게 초자연적인 언어를 주는 것 이상이다. 만일 그것이
전부였다면 난 아무런 불만도 없었으리라.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광스러운 은사이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우리를 좀 더 앞으로 데려가는 데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동역관계로까지 데려가기를 그는 원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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