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010

만남을 가르치는 가르침 – 능력대(對) 교만 [빌 존슨]


오늘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들이 능력없는 복음에 대한 유혹에 빠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14-20).

바울은 선생과 아비를 대비시키면서 말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선생은 예수께서 교회들로 갖기 원하셨던 종류와는 달랐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신자인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서는 이들에 대해 교만하였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여보라.

후기 교파적인(post-denominational) 이 시대에 우리는 영적인 아비(남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 주변에 신자들이 놀랄 만큼 몰려드는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다. 과거에도 어떤 진리에 대해 몰려든 것이 있었고 이런 것을 통해 새로운 교파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모임의 강점은 교리와 어떤 사역에 대해 한 뚜렷한 동의를 보인다는 데 있다.

반면 어떤 다양함이나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약점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방언 말함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교단이 화석화된 믿음의 고백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영적인 아비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현상은 심지어 교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한 모임은 핵심적이 아닌 교리에 대해서 그 차이점을 인정하면서 분열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하나의 사도적인 질서의 회복이라고 보고 있다.

바울은 두 번째로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 교만해지는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실함과 교만을 대비시키면서 요점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멋있는 이론에 그들이 현혹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개인적인 은사가 기름 부으심이나 진리보다 교회 안에서 더 높이 인정받고 있다.

인격이 부족한 사람들이 인기가 있다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앉을 수도 있다. 바울은 특별히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으로 나아오기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해왔었다. 그는 그들을 그의 많은 지식으로 누르지 않기로 선택했다. 사실상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믿음의 주가 되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했다(고전2:1-5 참조). 하지만 현재 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바울의 해결책은 그들에게 자신과 닮은 사람, 즉 디모데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영적 아비가 어던 사람인지를 다시금 생각나게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자치체계를 조정하여 이론만 있는 사람이 아닌 실체를 지닌 사람을 닮을 수 있도록 하길 원했다. 이런 사람은 곧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은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으라(고전4:20). 원어로 보면 이 말씀은 이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로고스(logos)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두나미스(dunamis)에 있음이라.

분명한 것은 고린도에 말을 많이 하는 일에 능한 선생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실제로 능력을 나타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워주신 선생의 모습을 따르지 않았다. 두나미스(dunamis)성령의 부어주심 속에 나타나고 전수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두 장 앞서서 바울은 그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말하면서 그것이 고린도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고전2:5 참조). 여지서 그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때 그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처럼 생명과 능력을 나타내는 대신 어떤 이념이나 생각에 사로잡힐 때 그 생각이 얼마나 좋은가와 상관없이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라 관계다. 관념을 능력있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우리에게도 이것을 요구해야 한다(*여기서는 우선 능력이라 했을 때 육체적인 상태나, 혹은 자연세계에서의 문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쉬울 것 같다. 그것은 분명히 이런 종류의 상황을 포함한다. 그 사랑은 한 인생을 전혀 다르게 바꿔놓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주변의 아프거나 고통당한 자들의 분명한 필요를 회피하는 데 대한 변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옷 입히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찾을 때까지 구해야 한다(11: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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