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부으심(성령)을 좇는
삶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주의 임재의 구름을 따랐던 것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없었다. 그가 이끄셨고 백성은 따랐다. 그분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났다. 그들이 만일 구름을 떠나면 그들을 붙들고 있던 기적의 역사는
사라져버릴 것이다.
만일 두려움에 묶여있는 신학자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보라. 그들은 아마도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던 초자연적인 역사가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할 새로운 교리를 만들었으리라. 국 그들은 지금 그런 신학의 돌비를 갖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대해 문제 삼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우선적으로 할 대 초자연적인 역사가 넘친다. 하지만
그 임재가 없을 때 그런 것 없이 사는 우리 모습이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새로운 교리를 또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신약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꺼이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을 초월한 영역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세계이다. 순종은
믿음의 표시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입장권이다.
이상하게도 그분의 임재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바람처럼 되는데, 이는
곧 성령의 특성이기도 하다(요3;8참조). 성령님은 능력 있고 의로우신 분이지만 그의 길은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 이 부분은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허를 찌르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하고 있는 일들 대부분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교회는 별로 없다.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없다 하더라도 오늘 날 교회 활동의 95%는 계속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을
때 95%는 교회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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