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2010

제18강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 - 여주봉목사

시24:1-6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우리가 예배회복을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2주간 예배와 중보기도학교 1기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참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섬기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예배회복에 관심이 있는지 알겠어요. 또한 방해도 심했어요. 그러면서 한편 느끼기는 사단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예배를 참소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는데 집중적으로 살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인데 일주일에 한번씩 모이니까 어떨 때는 몇 개월이 걸려서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어떻든 예배회복이 절실합니다.



거짓된 예배를 살펴 보았는데 오늘부터는 참된 예배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예배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3절에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 예배로 나가는 구절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여호와의 산은 성전이 있던 시온산을 말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는 구절입니다.


6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하나님께 예배로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아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화하실 때도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예배인데 그 당시 종교적인 헌신과 의식은 많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전혀 없을 때 예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우리 예배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럴싸한 의식이 많아도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학에는 평행법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말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 평행법으로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며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삶과 예배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된다면 우리의 예배는 입술뿐인 예배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절대로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타락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면서 참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뿐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자기의 목적과 목표와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이 삶의 패턴인 신앙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마실 것 고기 위기에서 구원 등 자기들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을 구하는 것이 그들이 구한 전부였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하지 않고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의 패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가치관이 깔려 있습니다.



한 자녀가 있습니다.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필요가 생길 때마다 ‘돈 줘’ 합니다. 돈을 받으면 필요가 채워졌기 때문에 또 혼자 삽니다. 이 자녀에게는 부모와 교제 부모의 의중 이런 것은 관심도 없습니다. 또 필요가 생기면 부모에게 옵니다. 부모에게 잘합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도움을 얻어내야 하니까. 그래서 부모에게 와서 다시 말하지요. ‘돈 줘!’ 그러면 부모가 잘 안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침저녁으로 떼를 씁니다. 돈줘 돈줘 돈줘. 그래도 안주면 날짜를 정해놓고 떼를 씁니다. 일주일동안 이십일 동안. 그래도 안주면 안먹습니다. 그러다가 돈을 받으면 자기 필요가 채워졌기 때문에 곧바로 일어나서 나갑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한다면 어떻겠어요. 머리가 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나올 때 자기들의 목적 필요 처지를 위해서 하나님께 도움만 구하려고 옵니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께 나오는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하나님의 의중과 목적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필요만 채워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채워지면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러다가 필요가 생기면 또 하나님께 나옵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으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로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떨 때는 은사만 받으면 될 줄 압니다. 그런데 은사가 나타나도 심지어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안되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수많은 은사가 나타난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 중에 가장 영적으로 어린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가장 문제 많은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삶은 변화되지 않고 우리 삶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전환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란?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이 그분이 우리의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1)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는 삶

2)하나님의 목적을 알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3)하나님의 길을 따라 그 길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



(1)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우리의 유일한 보화되는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신앙은 하나님 그분이 우리에게 유일한 보화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 비유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값진 진주이고 보화이며 우리 모든 것으로 그것을 샀다는 것입니다. 즉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며 보화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이미 타락한 예배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를 믿어도 자기 목적 목표가 살아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일한 보화가 되는 삶이 참된 신앙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낍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 년에 두 차례씩 이웃초청 잔치를 하는데 다음번에는 한동대 총장인 김영길 박사를 초청합니다. 그분은 창조과학회 회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인격체이십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보화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화를 발견하고 그분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것, 즉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보는 자들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보도록 인도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보화가 되는 삶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삶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40편에 다윗의 시가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는 한 가지 그것을 구하겠다고 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나는 한 가지를 하나님께 구한다. 이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면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을 찾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도 고전2장 2절에서 말합니다.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여주봉 목사의 개척초기에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간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목회했었는데.



사역을 할 때도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사역하는 것입니다. 사역이 결국 자기 체면을 위한 것이고 자기 신분을 대변하는 것이고 자기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며 목표가 되는 자리게 가야 진짜 사역이 가능합니다. 그때 교회성장을 위한 모든 노력이 내려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아지는 대로 회개하고 돌이키고 했습니다. 줄기차게 주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영생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하나님의 목적을 알아 그 가운데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아 우리의 모든 삶으로 동참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모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출33장 7절 이하입니다. 회막을 세워놓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습니다. 모세가 거기에 들어갈 때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얼굴과 얼굴을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핵심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12-13절부터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아주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시점은 금송아지를 섬긴 이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하시려 하자 모세의 기도 때문에 거두셨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주님의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길 뿐아니라 주님의 목적 주님의 의중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나도 행하고 주님의 의도한 곳에 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입니다. 

지속적으로 주님의 의도한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같이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 그분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얼마나 다른 태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손만을 구했는데 모세는 하나님 그분 자신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이 소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말합니다.

‘어느 시대에 그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그 시대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무엇인지 보고 그 일에 온 삶으로 동참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에는 하나님의 의도와 길을 알아 그 가운데 온 삶으로 동참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3)하나님의 길을 알아 그 가운데 행하고자 하는 삶입니다.

최선과 좋은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알기 위해 사모하며 서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길에 섰습니다.

그래서 시편 128편 1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대하6:31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며 주의 길로 행하리이다”


시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이처럼 주의 길을 알기 위해 구해야 합니다.



지난 주인가 제가 예배 끝나고 기도사역을 하는데 내려가서 기도해주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한분에게 갔습니다. 제가 몇 마디 기도하다가 그냥 갈까 하다가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그분이 런던에 사셔요. 지난주에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기도하는데 인생에서 중요한 처지에 놓여있음을 알았어요. 결정해야 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인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할 것인가였어요. 이런 선택을 할 상황이었어요. 

우리 삶에는 날마다 매 순간 선택의 순간에 놓입니다. 내 목적대로 하나님의 길대로.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의 길을 따라 가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주면서 그분에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했어요. 하나님의 길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직장 다시면서 날마다 결정해야할 것이 많아요. 사업하는 분들 많은데 여러분이 삶 속에서 결정해야할 것 중에서 하나님의 길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길로 가야 하나님이 뒷받침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길로 행하기 위해 기꺼이 때로는 대가를 지불하시더라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길로 행하려면 주와 동행해야 합니다. 주의 길을 알고 그 가운데 서기를 원하는 것 없이 주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2.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할 뿐아니라 지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처음에 진짜 하나님의 얼굴만 구할 때 교회가 세워질까 하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믿음으로 의지하니까 어느 순간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셨어요. 문제는 거기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이 높아져 구하지 않으면 점점 사라집니다.

빌3장 7-14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의 목표는 주님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자 손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삶이다. 삶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주님을 찾자는 것이었습니다. 연초에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 마음을 비추어주시는데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는 일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있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4개월도 안되었는데. 제 속에 타락함이 가득했어요. 하나님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배고픔을 주시라고 절박하게 기도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3.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고 지속적으로 얼굴을 구할 뿐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 예배하라 나와야 합니다.



시26:8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언약궤가 노출되어 있었어요. 그 위에 영광의 임재가 노출되어 있었어요.



시27: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여야 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을 알고 주님의 목적을 구하고 주님을 찬사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1)예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배는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를 수단으로 삼는 순간 우리의 예배는 타락한 것입니다. 컨퍼런스 기간에 기도사역을 하는데 하나님이 사역을 막으시면서 하나님이 오늘날 목회자들이 이렇게 예배한다고 하면서 회개하라고 하셨어요. 평신도 컨퍼런스 때인데 목회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나왔어요.


첫째, 예배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것.


둘째,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인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여 나오도록 사람
       들을 인도한 것.


셋째, 예배를 인도하려고만 했지 자신은 예배하지 않은 것.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가 수단이 아니라 자체가 목적인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라여 나오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우리 신앙이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인격체 하나님과 만남입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고 어느 계층이 나오느냐 보다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하러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고 그분의 마음을 알고 의중을 알고 길을 아는 것이 없으면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예배 때마다 스릴 있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타성에 젖어있는 예배라면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경각심을 가집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4주 동안 그렇게 하나님과 만남이 없었다. 그러면 정말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육개월 동안 그런 하나님과 만남이 없었다. 나는 일년 동안 없었다. 여러분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예수믿으면서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여러분 심각성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만남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세 가지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는 의식으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의 습관으로 전락해서도 안됩니다. 또 하나의 형식으로 전락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기억하셔요.



3)하나님께 나올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찬양시간에 일찍 나와야 합니다. 방해하는 요소를 준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1)죄책감입니다. -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죄책감 때문에 못나갑니다. 미리 나와서 예수보혈을 의지하고 해결받아야 합니다.



(2)분주함입니다. - 우리가 얼마나 분주합니까? 미리 나와서 준비하면서 일정시간 기다리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3)조급함입니다. - 우리는 조급해 합니다. 예배 빨리 끝나고 가서 할 일이 많아요. 그러면 절대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조급함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생각해보세요.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는데 30분이 되었는데 왜 안끝나는 거야 그렇다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의무여요. 그래서 빨리 끝나고 가서 다른 일을 해야해요. 그래서 조급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그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배는 사랑하는 연인과 데이트하는 것입니다.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4)자기 의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 제 아내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올려 보냅니다. 그리고 내려놓습니다. 지혜로운 일입니다.



(5)염려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구해서 나아야 합니다.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 나와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에는 예배에는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알티킨델 목사는 말합니다. '참된 부흥의 주된 표적은 사람들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다.’



로이드죤스는 말합니다. ‘부흥에 이르는 불가피한 단계는 하나님께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생생한 갈증입니다. 그리고 역사하시며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어서서 자신의 원수들을 훼파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불타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부흥의 필연적인 예비단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야 나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운행하시고 만나주시고 하나님의 길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동참하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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