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가 양을 치다가 밖에서 밤을 지내야 할 때, 동굴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마땅한 은신처가 없을 때는 임시 우리를 만든다.
주변에 있는 잡목이나 돌을 이용해서 울타리를 만든 다음, 그 위에 가시나무를 올려놓는다. 그러면 양도 밖으로 뛰어 넘어가지 못하고, 이리나 늑대도 그곳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이 양 우리는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한쪽은 열려 있다. 양들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입구다. 그러나 거기에 문은 없다. 이리나 늑대가 우리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입구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목자가 바로 그곳에서 자기 때문이다. 목자가 문을 지키는 것이다. 목자가 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목자가 문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0:7).
예수님이,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울타리로 넘어오는 자마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셨는데(요 10:10), 지금도 중동에서는 양 도둑들이 많다고 한다. 전문 도둑들이 트럭을 대놓고 몇 십 마리씩 훔쳐간다고 한다.
목자들은 막대기 대신에 총으로 무장하고 개들을 키우고, 문을 겹겹으로 자물쇠를 채우지만, 그래도 도둑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목자들은 문 옆에서 잔다고 한다. 그러면 세상 없는 도둑도 양을 훔쳐가지 못한다.
John J. Davis라는 사람이 베두인과 함께 열흘 정도 같이 생활하면서 어떻게 광야에서 양을 치는지를 보고 라는 책을 썼다.
하루는 야영을 하게 되었다. 베두인 목자가 양들을 임시 우리를 만들고 그곳으로 양들을 다 들여보냈다. 그리고 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께서는 저쪽 구석에 가서 주무셔요. 그러면 양들이 귀찮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I will be the door."
“나는 문에서 자겠습니다” 라는 말을 그 베두인은 “I will be the door"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당신께서는 저쪽 구석에 가서 주무셔요. 그러면 양들이 귀찮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I will be the door."
“나는 문에서 자겠습니다” 라는 말을 그 베두인은 “I will be the door"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베두인들이 2천 년 전의 예수님처럼 자신들을 양의 문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단순히 비유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목자는 양의 문이 되어서 양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양을 지켜준다.
베두인 장막을 방문했을 때 양 우리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6살쯤 된 꼬마 아이가 문을 가로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 아이가 바로 양의 문인 것이다. 문지기가 지켜 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못 들어가는 것이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문을 열고 닫고 할 수 있는 권세가 문지기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니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다른 양은 절대로 양 우리로 들여보내지 않는다. “양의 문”되신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문을 열어주실까? 자기 양에게다. 예수님에게 속한 양에게만 영원한 양 우리에 들어가게 하신다.
목자를 통해서 양들이 양 우리에 들어가듯이,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양도 양 우리에 들어갈 수 없듯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요 10:9).
한 작은 도시에 음식점이 있었는데, 30년 동안 그곳에서 유창한 언변과 성우 같은 목소리로 손님들을 매료시킨 연극배우가 있었다.
하루는 이 사람이 시편 23편을 분위기를 살려가면서 아주 감동적으로 낭송했다. 낭송이 끝나자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일어났다.
“나는 오늘로 100살이 되는 탐 롤린스라는 목사입니다. 저도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암송해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도다.”
“나는 오늘로 100살이 되는 탐 롤린스라는 목사입니다. 저도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암송해나가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도다.”
시편 23편을 암송하는 백발이 성성한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좌중이 숙연해졌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바로 5분 전에 이 목사님과 똑같은 시편을 낭송해서 손님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배우는 당황했다. 자기는 30년 동안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아왔지만, 한 번도 이 목사님 같은 그런 반응을 얻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목사님 테이블에 가서 물었다.
“목사님, 오늘 저녁에 저도 목사님과 똑같이 시편 23편을 낭송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반응이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아. 예. 당신은 오늘 시편 23편을 잘 낭송을 했습니다. 물론 시편 23편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그 목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일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저녁에 저도 목사님과 똑같이 시편 23편을 낭송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반응이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아. 예. 당신은 오늘 시편 23편을 잘 낭송을 했습니다. 물론 시편 23편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그 목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내가 다른 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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