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010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뒤돌아보아야만 볼 수 있다. - 이진희 목사

<도망자>(Fugitive) 같은 영화들을 보면 죄수들이 탈옥을 해서 목숨 걸고 도망친다. 그러면 그 탈주범들을 잡기 위해 끝까지 달라붙지 않는가? 결국 붙잡히고 만다. “나를 따르리니”라는 표현은 바로 탈주범들을 붙잡기 위해 쫓아갈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FBI가 범인을 추적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미국이 빈 라덴을 찾기 위해 문자 그대로 땅 끝까지 동굴까지 지하까지 어마어마한 군사 장비를 동원해서 추적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추적해오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나를 보라. 결국 땅 끝까지 바다 한 가운데까지 쫓아가셔서 그를 붙잡아가지고 오지 않으셨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하나님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오실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추격해 오실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나 하이에나가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고 추격해온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리나 하이에나만 우리를 따라붙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붙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결코 우리는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양이 많을 때는 목자가 앞에서 인도하면 뒤쳐진 양들을 혹시라도 이리나 하이에나가 물어갈까 봐 목자는 뒤쪽에 두 마리 개를 따라오게 한다. 양들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뒤에 오는 양들도 안전하게 목자를 따라갈 수 있다. 바로 양을 지키기 위해 뒤에 쫓아오게 만든 이 두 마리 개가 바로 하나는 주님의 선하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님의 인자하심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앞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시고 뒤에서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보호하며 따라오고 있기 때문에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가끔씩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앞만 보기 때문이다. 내가 당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다.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따라온다고 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려면 뒤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앞을 보면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없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의심 되는가? 믿어지지 않는가? 뒤돌아보라. 과거를 돌아보라.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라.

앞에 험한 낭떠러지가 있는가? 사망의 골짜기가 놓여 있는가? 원수가 앞에 있는가?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고 사망의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하게 하시고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주셔서 지금 여기까지 우리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양도 저녁이 되면 양 우리로 돌아간다
양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산에서 저산으로 하루 종일 옮겨 다닌다. 여름에는 서너 달씩 나가 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면 양들은 산이나 들판에서 야영을 한다. 때로는 동굴 같은 곳에서 보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무런 시설도 없는 곳에서 이슬 맞으면서 밤을 지내야 한다. 그런 생활을 여름 내내 해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집이 그립겠는가? 그러다가 가을이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겨울 내내 따뜻하고 아늑한 우리에서 지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정처 없이 나그네처럼, 떠돌이처럼 살다가가 인생 여정이 끝나고 인생의 황혼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의 본향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거하리로다.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멈추면 텐트를 치고 그들도 머물렀다. 그러다가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움직이면 다시 텐트를 걷었다. 어떤 때는 생각보다 오래 머물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하루만에 움직일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 2년도 아니고 40년을 그랬으니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장막절을 지키면서 조상들이 광야에서 고생하던 때를 회상한다

언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오라 하실지 모른다. 오라 하시면 언제든지 가야 한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결국은 이 세상에서 텐트 치고 사는 것이다.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계속 옮겨 다니면서 살았다. 양을 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광야에서 베두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짓지 않고 장막을 치고 산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은 하루 밤 머물고 가는 임시 피난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에서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늘나라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집이다. 양들이 겨울이 되면 본래 우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때가 되면 목자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영원한 본향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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