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의 압제와 만리장성의 건설로 인해 중국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동방족들은 차차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산동성에 거하고 있던 금빛 하늘의 파수꾼들은 차츰 한반도의 남단으로 물러가서 AD42년 가야(伽倻)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요직에 있었고, 많은 기술(技術)과 부(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당당하게 들어온 것입니다. 한반도의 다른 지역들은 예부터 한국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금천(金天)씨들은 한반도의 남쪽, 즉,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들어와 가야를 건설하였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가야인들의 무덤에서 발견된 철제(鐵製) 투구와 갑옷입니다. 가야가 건립되기 전만 해도 우리 한반도에서는 철기문명(鐵器文明)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야가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에 철기문화가 시작합니다.
아래 왼쪽은 가야의 금관(金冠)입니다. 가운데 그림은 가야의 금동관(金銅冠)들이고요, 오른 쪽은 각종 금속으로 만든 장식품들입니다.
아래 왼쪽 그림은 가야사람들이 쓰던 술잔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메소포타미아의 힛타이트 족속의 술잔(그 옆 그림) 스타일과 매우 비슷합니다. 동물의 머리와 가슴이 받침이고 몸이 술잔입니다.
가야문화연구소의 김도윤 소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 이 들고 들어온 성 도마교회의 복음이 AD48년에 먼저 가야에 전래되어 가야와 신라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였습니다. 오른 쪽 그림은 허(許) 황후(皇后)의 능입니다.
그 아래는 김수로왕 능으로, 왕릉정문에 떡 그릇과 물고기 두 마리 그림이 남아 있고, 가야라는 말이 인도 드라비다어로서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여담으로 인도의 허황옥이 아들을 열을 낳았는데, 그 중에 마지막 두 왕자는 엄마의 성을 따서 허(許)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김해 김(金)씨와 김해 허(許)씨는 혼인을 안 합니다.
그들이 한 조상을 가졌기 때문이죠.
신라 김유신 장군의 비석에 의하면 그가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 금천(金天)씨의 자손인데 그는 가야 왕의 후손이므로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성도 그와 동성이다 라고 써 있다고 삼국사기 열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영향이 컸던 초기의 신라에서 외래종교인 불교는 좀처럼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었으나, 불승 이차돈의 설득에 넘어간 법흥왕이 AD 527년에 대신들의 반대를 꺾고 비로소 불교를 공인했습니다. 그 후 법흥왕은 AD532년에 기독교 국가였던 가야를 전복시켰고 그 후로는 불교가 한반도 전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왕은 어째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본래 기독교적인 풍토에서는 고대로부터 왕권이 강하게 작용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를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호국불교 왕권불교로 만든 것이지요. 왼쪽 그림은 화려한 신라의 금관입니다. 강력한 왕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흥왕은 어째서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본래 기독교적인 풍토에서는 고대로부터 왕권이 강하게 작용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를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호국불교 왕권불교로 만든 것이지요. 왼쪽 그림은 화려한 신라의 금관입니다. 강력한 왕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 편 고구려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백(河伯)'의 자손이라 했는데, 이는 순 고구려 말로 '해밝'의 자손, 곧 빛의 자손이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고구려편에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10월에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성회를 열었는데 이를 동맹이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여사람들은 영고라고 하여 똑같은 일을 했으며, 동예 사람들은 무천이라 하여 똑같은 일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흰옷을 즐겨 입으며 술 마시고 노래하기를 좋아했다고 중국의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을 통해 북쪽으로 들어온 불교가 고구려의 승인을 받은 것은 AD372년 이었습니다.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겼던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불교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기원전 500년경에 시작되었거든요. 그러므로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불교가 시작된 지 900년이나 지나서이고, 신라에는 불교가 시작되고 1100년이나 지나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 규원사화 단군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발해가 나라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을 천통(天統)이라 하여 항상 공경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을 때는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차차 이것을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일삼아 드디어는 나라가 시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발해가 나라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을 천통(天統)이라 하여 항상 공경하여 하늘에 제사지냈을 때는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차차 이것을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일삼아 드디어는 나라가 시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삼신(三神)할머니의 비밀을 밝히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규원사화 단군기에 나와 있는데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사라지고 이제는 삼신(三神)과 제석(帝釋)을 숭상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매년 10월이 되면 햇곡식으로 떡을 쪄서 귀신에게 드리고 복 받기를 빌었다. 이것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을 섬기던 선조들의 신앙에서 온 것인데, 변질되어서 이제 하나님이 아닌 귀신을 섬기고 부귀와 장수를 무당과 박수에게 부탁하니 이것은 옛 풍속의 찌꺼기로서 커다란 폐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삼신(三神) 할아버지였다가 약한 여자로 바꾸어 삼신(三神) 할머니로 바꾸고, 제석(帝釋)은, 원래 불교에는 신이 없지만 사람들의 신앙을 완전히 떨치지 못해 제석(帝釋)이라는 것을 신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