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3/2010

생명을 얻는 회개를 맛보았습니까?

생명을 얻는 회개란 일반적인 회개와 동일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일 하고 있다. 일반적인 회개란 돌이켜 뉘우친다는 개념 속에 자신의 과거에 잘못된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양심적인 죄와 윤리도덕적인 죄를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상식적으로 죄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가운데 자신의 직간접적인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잘못된 회개라는 개념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글을 펼쳐 본다. 자신의 인생 속에서 잘못된 방향에서 전환하거나 돌이켜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차원에서 회개를 기독교에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생명을 얻는 회개에 근접한 내용일까? 하는 의문 속에 새롭게 관찰해야 것이다.

생명을 얻는다는 개념은 단순히 되돌아 자신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차원은 일반적인 종교에서도 얻을 있는 내용이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회개는 그런 차원에서 벗어나 생명을 추구하는 회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도 이것을 원하시며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회개하는 자를 찾고 계시는 것이다.

회개라는 개념을 분석하기 전에 죄라는 개념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죄는 안에 하나님을 존재하심을 모르고 있는 차원을 죄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우리가 짓고 있는 양심적이며 도덕윤리적인 죄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죄의 정의가 되지만 항상 성경은 밖에 있는 존재를 만들어 놓고 안에 있는 존재성을 깨우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도 죄라는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로마서 7장에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라는 존재가 안에서 존재하며 죄를 짓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죄와 사망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니라 안에 나를 괴롭게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죄와 사망은 우리에게 생명의 존재와 가치를 상실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생에 억압을 주고 굴레를 씌워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사명과 책임 속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아는 것을 차단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공허와 혼돈과 흑암이란 무저갱 속에 거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다.

이것을 알고 자유와 해방을 원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의 나약함을 아시고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능히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다. 분과 함께 사실을 깨닫고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삼일 동안 장사지내었다가 함께 부활하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회개라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믿거나 분에 나에게 하신 업적은 인식차원에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마귀 사탄을 이것을 노려 우리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다른 쪽에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고치거나 귀신을 쫓거나 은사를 발휘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좇아가게 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생명을 얻게 하려는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빨리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넓은 길로 인도하는 넓은 문에 불과하다. 진정 좁은 길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거나 보여 지는 길이 아니다. 진정 좁은 길은 길로 통과한 이들이 많아 길이 닳아 우리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길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화와 비교하기는 뭐하지만 인디아나 존스 3편에서 성배를 찾아 가는 길에 헬라어 알파벳이 적혀 있는데 예수에 대한 알파벳을 영어로 착각하여 J 밟았다가 빠지는 것을 봤다. J 아니라 I 시작되는 예수의 단어를 잘못 인식하여 죽음을 모면하는 것을 봤다. 또한 마지막 통로에서는 길이 없는 낭떠러지인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기록한 책에는 아버지가 길이 없는데 걸어가는 모습을 그려 놨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 앞에 모래를 던졌더니 유리 다리가 놓인 것을 발견하여 건너가는 장면을 것처럼 우리의 길은 암호로 비밀로 만들어 졌다. 이와 같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쉽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그렇게 어렵게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 험난하여 가기 쉽지 않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길이요, 아버지의 높은 사상에 도달할 있는 유일한 진리요, 아버지와 함께 살아갈 있는 유일한 생명임을 요한복음 14 6절에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는 길이 아니며 혼자 깨닫는 진리가 아니며, 혼자 얻어지는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길이요, 함께 깨닫는 진리요, 함께 나누는 생명임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무작정 가는 길이 아니며 무작정 깨닫는 진리도 아니다. 그리고 무작정 얻어지는 생명도 아니다.

어느 신학교를 간다고 해서 그리고 어느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얻어지는 생명이 아니다. 어느 부흥회를 가서 회개한다고 얻어지는 생명은 더군다나 아님을 명백히 밝힌다. 주님의 세포와 세포가 서로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지듯이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안에 들어와 나의 정신과 영혼과 육체에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암송하거나 금식을 하거나 철야를 하고 새벽기도를 한다고 되는 차원이 아니다. 거기에다 목적을 두지 말고 수단으로 주님과 서로 연결하는 관계성 속에 만남을 이뤄져야 한다.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사람이 추위가 느끼면 몸이 떨리고 닭살이 돋는데 이유를 질문하면 “추워서, 아니면 몸의 온도가 내려가서” 등등의 답변을 한다.

사실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와 같이 신앙의 몸부림을 생명을 얻는 회개라고 정의하고 싶다. 부흥회 때나 예배시간에 참회기도가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되면 된다. 진정 신앙의 몸부림으로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야심한 밤에 아니면 사람의 접근이 없는 곳에서 몸부림을 치는 기도와 절규를 했다고 어느 누구에게 자랑도, 간증도 하지 말고 조용히 혼자서만 해라.

성경을 읽는 것도 설교하기 위해서나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서 읽지 말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더군다나 교회 차원에서 성경읽기나 통독차원에서가 아니라 생명을 얻기 위해서 말씀에 대롱대롱 매달려 표현하기 그렇지만 거머리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빨아 먹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몸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가진 것은 십자가상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내었다가 함께 부활하여 함께 보좌에 몸이 되어 연합된 존재가 살아가고 있음을 직시하며 땅에서 사람의 마음 바탕에 하늘을 심는 일에 계속 나가는 것이 현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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