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각 사람의 삶에서 이루시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미리 경고하지만, 그 목표는 즐겁고 누구나 좋아하며 아픔이 없는 길이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좋은 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broken)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6~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 18)
주님과 친해지려면 우선 상한 심령이 있어야한다. 그 과정이 즐겁지않더라도 그분의 친밀한 임재하심은 거기에 따르는 고생에 비할수 없다.
다윗은 이것을 어려서부터 배웠다. 우리는 다윗의 상한 심령과 거기서 비롯된 삶을 다윗의 수많은 시에서 엿볼수 있다. 상한 심령은 희생적 삶이나 제사가 아니라 순종으로 얻을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군마는 자기 뜻이 꺾이기전에는 전쟁터에 나갈수 없다.
마구간에서 가장 세고, 빠르고, 재주가 많더라도 일단 깨어지기 전에는 싸울수 없다.
그 말은 마구간에 남아있고 재주가 덜한 다른 말들이 전쟁터에 나간다.
깨지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과 상관있는 것이다.
말의 주인은 그 말을 타는 사람이다.
제대로 깨지고 훈련된 말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수 있다.
총알과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싸움터에서도 그 말은 꽁무니를 빼지않는다.
적들이 칼과 도끼를 휘둘러도 뒷걸음질치지 않는다.
총을 들고 대포를 쏴도 주인의 뜻을 거역하지않는다.
주인이 누구든 한마음으로 복종할뿐이다.
절대로 자기를 지키거나 몸을 사리려하지않는다.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이 깨짐의 과정은 주님의 처방에 따라 사람마다 독특하다. 그 과정을 제대로 수료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통해 하시려는 섬김을 할 준비가 된 셈이다. 그 때는 그 분만 아신다. 주님은 우리가 새로운 차원에 올라갈 때마다 다시 그 때에 맞는 깨짐의 과정을 시작하신다.
<출처:존 비비어 /순종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징계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의 영적 상태를 한 단계 높이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된 우리에게 현재의 안전한 구역에서 나와 우리가 생각하기에 안전하지못하다고 여겨지는 구역으로 들어가라고 촉구하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인간은 안전을 추구하는 반면에 고통과 희생은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을 먼저 걸어가게 하신후에 온전함과 풍요로움을 주신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행하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믿음 생활에 이 정도면 됐지 라고 생각하며 만족해하는 그 어느 시점에서 우리의 안전을 빼앗아 가신다.
심한 경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믿음의 시점에 도달했다 싶으면 우리를 절벽의 끝으로 내어 몰아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신다. 그러나 우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낙하산을 주셔서 안전하게 착륙케 하신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게 되는 법을 배워나가게 만드신다.
인간이란 속기 쉬운 존재인 동시에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이다. 그 한 예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마치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있는양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난을 허락하셔서 자신이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럴때 많은 성도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마치 마귀의 공격으로 생각하여 마귀의 공격을 차단하는 기도를 하여 닥친 어려움을 피해보려고한다. 만약 그런 사람들에게 욥이 당한 고난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라면 그들은 설명을 못할것이다.
믿는 자들 중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어려움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에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 시대의 사도들을 보자. 그들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였을 때에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증가하였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더 많이 받았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는 믿음을 잃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신다고까지 생각하였다 (행4:28)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9)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때론 인간이 보기엔 단순하고 어리석기까지 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도 말하였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1:25)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손으로 쓰고 있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형벌이란 로마의 압제하에서 피압박 민족들이 받는 가장 참혹한 형벌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해 낼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런 방법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셨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경우는 성경에 매우 많다. 라합은 창녀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사용하여 두 명의 히브리 스파이를 적군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수 2:1) 하나님께서는 경수가 끊어진 할머니 사라와 아흔 아홉살된 할아버지 아브라함 사이에 이삭이 생기게하는 일을 하셨다.
인간이란 십자가를 통한 깨어짐의 고통 없이는 사람 앞에서 항상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는 삶을 살 수밖엔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심령이 깨어진 고통을 경험하게 하신후 비로소 우리를 성숙케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욱 더 온전해 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수술하신다.
하나님은 마취제를 쓰시지 않고 수술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수술하실 때 우리에겐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이 수술을 통해 삶의 암 덩어리들이 제거된다.
그러나 우리가 수술을 받을 때 만약에 이때 아프다고 수술 도중에 수술실 밖으로 뛰쳐 나간다면 우리는 그 암 덩어리들을 몸에 달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픈 수술과정을 우리는 깨어짐이라고 부른다. 이 깨어짐의 과정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이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꿈과 이상이 산산조작 나고 야망과 자만감이 여지없이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심으로 우리 속에 있는 분노와 상처 그리고 교만과 욕망의 암 덩어리들을 제거하신다.
우리가운데는 자신의 건강과 지혜가 영원할 것 같은 착각속에서 자신의 능력이 남보다 나음을 은근히 기뻐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적지 않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교만(pride)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이런 마음에 대해 예레미아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렘17:9)
마음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길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깨어짐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잘못된 눈으로만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면서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픔을 겪게 된다.
1998년 여름 어느날 나는 환상을 보았다. 나는 그 환상 가운데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서로 다가서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아름다운 포장지로 싼 조그만 크기의 선물 박스를 들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그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포장 속에 귀한 것이 들어 있다고 추측한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선물의 포장을 뜯었다.
그 포장속에는 손으로 만든 조그맣고 예쁜 컵이 한 개 들어 있었다. 값이 나가는 컵이었다. 그런데 그 컵에는 금이 나 있었기에 물을 담아 마시기에는 부적절하였다. 그 친구는 컵에 금이 난 것을 알아차렸다. 선물을 받은 이 친구는 왜 자신에게 금이 간 컵을 선물하였을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신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선물을 한 친구가 실망할까봐 애써 표정을 감추었다. 그리곤 그 컵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금이 가서 물을 담을수 없는 컵을 어떻게 사용할 방법이 없어서 그 친구는 그 컵을 다시 박스에 넣어 다락방에 집어넣었다.
그 장면이 끝나자 다른 환상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컵을 가져다주었다. 주님은 조심스레 컵을 받아들고 사랑스런 컵을 바라보았다. 그 컵은 첫 번 장면에서 본 것과 동일한 금이 간 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환상속에서 나에게
" 너는 이 컵이 왜 나에게 소중한 컵인 줄 아니?" 라고 물었다.
나는 "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환상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 이 컵이 깨어져 금이 간 컵이기 때문에, 이 컵 안에 나의 영광을 담을수 있단다. 내가 나의 영광을 이 컵에 담으면 깨어진 틈 사이로 나의 영광이 흘러나와 주위 사람들에게로 나의 영광이 흘러들어가게 할수 있단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일단 자기중심적이 되면 가인이나 사울왕처럼 제일 좋은 것은 자기가 갖고 하나님에게는 그보다 못한것을 바치게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심령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되면 하나님께 최고의 것, 곧 자기 자신을 바치게된다. 바로 " 자신 " 이라는 깨어진 컵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노력을 바칠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분의 위대한 계명을 지킬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쳐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상한 심령을 갖게된다는 말은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은 우리가 점점 더 많이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소유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또한 세례 요한이 외쳤던 소리 즉 "그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겠다" 는 말을 매일 되새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상한 심령을 갖고 살아간다는 말은 " 나는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는 삶을 살리라" 라는 결단을 매순간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깨어짐의 상태는 하나님의 임재의 불로 점령당한 상태이다. 깨어짐의 상태는 또한 이 세상에선 결코 온전히 도달할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보좌에 가고 싶어하는 하나님에 대한 향수병에 걸린 상태이다
<출처:마크 듀퐁/경험>
당신의 길이 더 힘든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부르심이 더 고귀하기 때문이다 ( 릭 조이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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