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덩어리”(lump)는 새 성품을 칭하는 명칭은 아니지만, 새 성품의 본질을 묘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덩어리”는 옛 성품에서 설명한 바 있는 “누룩”과는 상반되는 관계에 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에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6,7)
우리는 앞에서, 죄악된 성품의 한 유형으로서 누룩은 선을 악으로 물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반면에 “덩어리”라는 말은 구제적으로 “떡 덩어리”(loaf)에 해당되는 말이다. 옛 성품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퍼뜨리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죄악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이들에게서 배운 결과다. 육에 속한 마음은 다른 이들을 오염시킨다. 다시 말해서 옛 성품은 죄 짓기를 쉽게 배우는 학생과 같고, 자신이 배운 바를 다른 이들에게 전수하려는 욕구가 크다.
사단이 하와에게 죄를 짓게 한 후, 곧 일련의 재앙이 뒤따랐다. 그녀는 그 과실을 보았고, 땄으며, 마침내 먹었다. 그러나 하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단은 하와의 옛 성품이 계속 죄를 짓도록 부추겼다. 따라서 옛 성품이 지닌, 타인에게 죄를 전염시키는 근본적인 특성에 의해 하와는 그 과실을 아담에게 주었다.
비록 분노, 이기심, 악독, 원한, 적개심과 같이 천성적으로 타고나는 옛 성품의 특성들은 유년기에 나타나지만, 그 밖의 많은 것들은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거짓말, 욕설, 과음, 간음, 도적질 등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에 해당된다.
각 세대는 아담과 하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타락상을 다음 세대에게 계속 물려 주고 있다. 물론 이런 죄악을 계속 획책(劃策)하는 자는 사단이다.
사람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될 때, 타락한 누룩 대신에 새 덩어리가 실재하게 된다. 떡 덩어리는 먹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떡 덩어리의 특징을 지닌 신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 때에 그는 새 성품이 소유한 자양분으로 다른 사람을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의 극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일컬어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신 데에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삶을 영위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고 생명의 떡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신자는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신자의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의 양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몇 달 동안 고심한 끝에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네, 어젯밤에 우리가 식당에서 만났던 때를 기억하고 있나? 그때 빌(Bill)의 이름이 우리 대화에 들먹여졌던 것도 기억할 걸세. 나는 자네를 만나기 얼마 전에 빌과 말다툼을 했는 데, 그때는 내 옛 성품이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었다네. 나는 화가 치밀었고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지. 그래서 어젯밤에 나는 빌을 헐뜯었을 뿐만 아니라 자네에게도 해(害)가 될 만한 말들을 많이 지껄인 것이라네.
나는 빌의 아내와 세 아이들의 이름까지 들춰 가면서 그들까지 저주하지 않았는가. 빌이 더 이상 교회 제직으로 봉사할 수도 없고, 주일학교 교사로 일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자네에게 말했었지. 나는 그날 빌의 재판관과 배심원이었지. 내가 관련되는 한, 그는 소송에서 질 수밖에 없었지. 또 나는 나의 그러한 판단을 자네에게 그대로 받아들이게끔 했던 것이라네.”
“비록 내가 한 말 가운데 어떤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지.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옛 성품에 기인한 연약한 모습들을 지니고 있으니 말일세. 육체의 연약함을 들춰내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이 되어야 마땅한데 말일세.
그 날 내가 자네에게 말한 것 중에는 과장해서 말한 부분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있었다네.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자네까지 빌을 싫어하도록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네. 또 자네가 내게 말한 내용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사실도 알지만, 결코 자네를 비난할 생각은 없네. 잘못은 모두 내게 있었으니까.”
새 성품의 입장에서 옛 성품에 관련된 행동들을 이와 같이 고백하기란 쉽지 않다. 옛 성품은 교만하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는 새 성품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옛 성품은, 타인에게 자신의 누룩을 먹이는 일에 민첩하다.
반면에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들이 지닌 새 성품으로 다른 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권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육에 속한 누룩으로 먹일 수도 있고, 영의 떡으로 먹일 수도 있다.
성령께서는 이 점에 대해 골로새서 4장6절에서 매우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듯이, 은혜는 우리의 입술과 마음의 열매에 맛을 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들은 우리로부터 옛 성품의 부패상이 아닌, 새 성품에 기인한 축복들을 받게 된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즉,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가운데 생명의 떡을 떼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아 드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우리들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죽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마른 뼈들로 가득 찬 이 죽음의 계곡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의 삶에 영적인 소생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영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행위다. 우리가 소유한 새 성품의 이러한 측면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채워 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영적전쟁을 영적승리로/크레이그 매시/나침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