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011

새 성품의 작용 – 신령(神靈)함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리라(고전2:15)

성령은 새 성품의 본질이다. 신령하다는 것은 새 성품을 지닌 결과로 나타난다. 영성의 신령한 측면은 영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과 관계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신령한 성품이 바라는 것은 계속하여 신령한 것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신령한 것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속에서 보여 주신 영원한 진리들이다.

신령한 성품은 자기 자신의 태도, 감정 그리고 행동들을 의와 진리와 바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본다.

영적인 진리에 자기 자신을 일키시킬 때에 신령하게 된다. 이 점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감정적인 체험을 계속함으로써 신령하게 되려고 시도하는 신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하루나 한 주간 혹은 한 달 정도는 흥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체험이 지속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숙은 신령한 사람이 영적인 진리를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살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옛 성품은 우렁찬 사중주곡이나 장엄한 성가곡 혹은 유머 있는 설교를 즐기기도 한다. 또한 옛 성품은 교회의 여러 모임들, 수련회 그리고 종교적인 색채를 띤 여러 활동들을 즐길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옛 성품은 떠들썩한 일들, 많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말미암은 흥분 상태, 그리고 눈물이 핑 돌게 하는 강력한 호소들도 즐길 수 있다. , 옛 성품도 자신이 공격받지 않는 한, 성령의 메시지를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중 그 어떤 것도 신령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새 성품도 이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지만, 이 일들이 성장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신령한 사람이 성장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뿐이다.

신령한 사람이 중요시해야 할 한가지 일이 갈라디아서 6 1절에 기록되어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옛 성품 때문에 그의 삶에 부정한 일을 범했을 경우,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이 옛 성품으로 인해 초래한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일이 온유함과 두렵고 떨림으로 행해져야 하는 이유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똑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옛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임들에서 이렇게 효과적으로 도움을 주고받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좀처럼 그런 모습을 대할 수 없다. 교회에서 한 지체가 범죄하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이 사랑과 온유함으로 범죄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가서 그가 다시 회복되도록 도와주는가?

그렇지 않다. 그 대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비난과 겁에 질린 모습,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경멸하는 것 등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 수군거리고 분리되며, 죄를 범한 사람이 결국 교회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매우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처럼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연약한 신자의 죄를 담당하라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진정으로 연합될 것이다.

신령한 성품이 감당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로마서 111절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에게 부여하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할 책임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측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척도는, 그가 다른 신자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기를 얼마나 갈망하며 얼마나 성공적으로 그 은사를 나누어 주는가에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해야만 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3:1)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의 옛 성품에 지배당해 신령한 은사들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영적전쟁을 영적승리로/크레이그 매시/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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