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10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러분이 가장 뚜렷이 기억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영원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문명 역시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시작된 인류의 역사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은 곧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를 알리는 경고가 온 세상에 널리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자들이 아무리 마지막 때를 경고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12 10절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떠나 정결한 마음을 이뤄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전히 악을 행하며, 점점 더 악해집니다. 검은 것은 더 검게, 흰 것은 더 희게, 육은 더 육으로, 영은 더 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 11절 말씀은 이처럼 악인과 의인으로 양극화되는 마지막 때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양극화 되어가는 마지막 때의 모습

1)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11절 전반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와 더러움 속에 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는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의롭게 만드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만,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찌하실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사람은 그대로 불의하게, 더러운 사람은 더럽게 남겨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이 무엇인지는 고린도전서 6 9-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 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불의한 것입니다. 즉 불의한 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유혹에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우리가 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성경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곳곳에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여야 구원 받는다고 수없이 기록하고 있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가 뭔지 수없이 기록하고 있는데도 그런 건 다 빼버리고 무조건 구원 받는 것처럼 가르쳐가지고 어찌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일들이 계속 쌓이면 더러운 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며 난잡하며 방탕한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음행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음행을 넘어선 것들이 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일을 저지르거나, 입에 담기도 민망하여 세상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지저분하고 충격적인 일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음행 중에서도 더러운 것에 속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 시기의 경우에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더러운 행함이 나옵니다. 상대를 시기하는 마음이나, 그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행하는 자체도 이미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투기가 지나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 합니다.

TV 사극 등을 보면, 종종 궁중의 여인들끼리 시기하여 저주를 하거나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상대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바늘로 찌르는 등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대를 해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마음과 행함이 도를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의 양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이 나오는 것이 바로 더러운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이에도 서로 이간질 시키는 것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더러운 행동입니까? 거짓말해가면서 이간질 시키는 사람들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이간질 시켜 상대를 매장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더러운 행동들인지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의 불법과 불의는 더 심해지고 죄악의 전파 속도도 빨라집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십여 년 전만 해도 너무 수치스럽게 여겼던 일들을 이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행합니다.

한 번, 두 번, 불의하고 더러운 일들을 점점 접하게 되면, 그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린 듯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양심이 무뎌져서 악한 것을 보아도 경계하지 못하고 어느새 자신도 물들어서 따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자란 평범한 아이들도 나쁜 친구들을 만나 함께하게 되면 악하게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쁜 친구들이 때리고 욕하고 훔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아직은 양심에 찔리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자기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따라하다 보면, 점차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도 자연스럽게 욕하고 때리고 담대하게 훔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거하면서 불의와 불법을 계속 보고 들으니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들어 갑니다. 세상 어디서도 깨끗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2).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선한 양심 속에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 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어찌하든 자기를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버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본문 11절 후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자"는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 세상과 구별되며,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처럼,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 깊이가 다릅니다. 성결을 이룬 사람들 중에서도 영의 사람과 온 영의 사람의 깊이가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의로운 차원을 넘어, 진리에 속한 모든 분야를 두루 갖췄을 때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면서 깨우치는 만큼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으면, 말이나 행동이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나옵니다. 선에 속한 지식과 주의 교양을 갖추어 말과 행실에서 책잡을 것이 없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늘의 지혜를 받아서 경우에 맞게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 15-16절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우리도 선을 좇아가야 되고 우리 주님을 닮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야 되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의로우며 더 나아가 거룩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죄악과 접하기 싫다고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살 수는 없으며, 자신이 원치 않아도 악한 것을 보고 듣기가 쉬우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악에 무감각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 설령 교회에서 죄를 지적한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 때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결단하여 돌이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죄를 버리지도 못하는 상태로, 교회와 세상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죄를 지적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그런 곳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요? 이런 세상이니,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죄를 지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받을 백성이라면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교회에서 죄를 지적해도 자기를 지키지 않고 세상에 물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하고 더러운 채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려면,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고 한 대로, 말씀과 기도 속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이 노력과 함께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또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내가 거룩해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이게 진리인지 비 진리인지 죄인지 악인지 선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뭘 버려야 되는지 뭘 하지 말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고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해서 내가 거룩해질 수 있고 성결 될 수 있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고, 기도의 힘으로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서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의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지므로, 무엇이 문제인가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데 곤고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불의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심히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3).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요한계시록 22:17절 후반에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듣는 자란 복음을 듣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로마서 2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 곧 참으로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된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목마른 자가 나오는데 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편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많이 바뀌었다면, 이 여인의 인생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고달프고 힘든 삶을 인내하며 어찌하든 만족을 찾아보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진정으로 충만함과 기쁨을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곤고했겠으며 얼마나 갈급했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을 채우고자 육적인 것을 취하고 또 취해 봅니다. 그러나 육을 아무리 취해도 그 마음에 진정한 해갈은 되지 않습니다. 짠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오히려 육을 취할수록 갈급함은 더해 갑니다. 이럴 때는 육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수를 찾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4: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수이며,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을 때, 그 마음에 생명수가 채워지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목마름이 해결되고, 희열이 넘쳤을 것입니다. 이처럼 거듭나는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변화된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열심히 행해 나갑니다. 그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서 부지런히 배우고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 속에 영원히 솟아나는 생수를 공급받게 됩니다. 영생을 사모하며 의에 갈급한 사람은 누구라도 값없이 생명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3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데 많은 교회들이 대표기도 할때를 보면 "이 죄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하는 등 죄인 자가 왜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지요?

죄를 짓고 사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사는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0절에도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하였듯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라 하신대로 하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 버리고 죄와 악을 버리기 때문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하고 말씀을 늘 듣고 아무리 듣고 안다 해도 내가 마음에 행치 않으면 의로워지지 않으면 마음에 할례하지 않으면 악을 버리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든 레이족이든 장로님들 권사님들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할례하지 아니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곡이 되어가야지 쭉정이 신앙생활하면 안 될 것입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아직도 간음기가 있고 욕심이 있고 교만하고 악을 가지고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도적질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하나님 말씀을 들어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세월만 지금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성령을 보내주신 것도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길이 열렸고, 주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한 번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아 나도 믿으니까 구원 받았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개념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믿습니다" 하면 그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개념을 안다고 하면 그런 말을 못합니다. 물론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근데 믿는다고 하는 게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참 믿음이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안타까운 지금의 현실입니다.

듣고 지식으로만 알고 "믿습니다"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행치 아니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이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고.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역사는 아무것도 따르지 않지 않습니까? "믿습니다"해서 응답이 오나요? "믿습니다" 하면 응답이 와야 하는 것인데 성경은 분명히 수없이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고 간구한 것은 응답 받은 줄로 믿으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다 주신다, 이렇게 곳곳에 기록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갓난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는데, 젖도 먹지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면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수를 마신 사람이라 해도 더 이상 생명수를 마시지 않고 영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로 인해 고난 당하셨고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제는 죄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죄 가운데 살면, 한번 성령을 받았다 해도 성령이 소멸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생명책에서도 이름이 지워집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그 마음에 희열이 넘치고 감사가 가득하므로 부지런히 죄를 벗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심방합니다. 마음을 다해 예물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의 값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구원에 대해 어떤 값을 지불할 수 있다 해도, 그 값은 어느 정도라고 정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고 세상 모든 보화를 드렸다 해도, 구원의 값을 치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귀한 독생자가 처참한 형벌과 사망을 대신 당해 주셨는데, 무엇으로 그 값을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말할 수 없는 행복으로 가득한 천국을 주신 것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그 은혜를 중심에서 깨닫는 사람이라면,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도 그냥 받고만 있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와 사랑의 향으로 드릴 때 기뻐 받으시고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큰 축복으로 돌려주십니다. 성결의 능력을 더하시고 영혼이 잘되게 하십니다. 심는대로 30, 60, 100배로 갚아주시고 믿고 구하는대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4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거룩함을 이루어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를 많이 버렸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잘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죄를 버리기는 하는데 그 속도가 더디고 억지로 힘들게 싸워 버린다면, 이것도 민망한 일입니다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의 밑바닥, 가장 깊은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은혜가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서 죄를 버린다는 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인데, 더러운 죄를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더구나 그 죄 때문에 질병과 재앙과 온갖 시험 환난을 겪는 것인데, 당장이라도 벗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중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4). 성경 말씀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됨 
이어지는 18-19절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했습니다.

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임의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신다 했습니다. 또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신다 했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가졌다면, 이러한 말씀을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빼는 것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은 빼거나 희석시켜서 가르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결에 대한 부분입니다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와 악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거룩하라", "성결하라", "죄를 버리라", "육체의 일을 행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이런 말씀들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은 빼 버리고,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흐린다"는 말씀도 있는데, 이런 말씀도 싹 빼고 가르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도 있는데 성령을 한 번 받으면 무조건 구원받는 것처럼 말합니다. 한번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입니다. 장차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시면,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 흠도 점도 없으신 신랑을 맞아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혼인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예복을 갖춰야 하며, 영광스럽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에 맞는 거룩한 단장을 해야 합니다.

계시록 22: 14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두루마기'는 주님의 신부들이 입어야 할 예복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으면, 자세가 반듯해지고 행실도 평소보다 품위 있게 변합니다. 마음가짐도 달라집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예복, 곧 두루마기는 우리의 행실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기 전에는 두루마기가 검은 색입니다. 온갖 죄악에 찌들어 새까맣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고 나면, 맑은 물로 부지런히 두루마기를 빨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할례하며, 거룩한 행실로 신부단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그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결국, 죄악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하게 할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방언이나 각종 은사를 금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잘못이라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 신약 수없이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는데 부르짖어 꼭 기도해야 되느냐 잠잠히 기도해야지 초신자나 부르짖어 기도하지 초신자가 아닌 사람은 묵상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이 못 들으시느냐 이런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짖어 기도하라면 부르짖어 기도하면 될 터인데 또 방언을 하면 잘못되었다 하는 둥 하나님 말슴들을 이렇게 제하여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나 선지자들이나 제자나 사도 바울이나 부르짖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고 우리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에 있는 것을 제하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수도 없이 구약 신약에 말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표적을 비롯하여 영의 세계에 대한 말씀들이 자기 지식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그런 부분은 빼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천국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결코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결정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했는가, 행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나뉘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결코 사람의 생각 속에 더하거나 빼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 6절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물에 빠져 죽으면 육의 생명을 잃지만, 영혼이 실족할 때는 영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삼가 근신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5).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20절에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짓는 22장에서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세 차례나 반복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12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말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마지막 때에 사는 증거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고 또 말씀하고 있는데 속히 오시리라 하면 당연히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죄 짓고 구원 받을 자신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서 그 말을 안 받으려고 하겠지만 믿음이 있고 내가 천국갈 수 있다 하는 사람들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처럼 거듭하여 경계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날과 시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징조에 비춰 보면, 그때가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한 2000여 년 전에 비해 끝 날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설령 그 때가 넉넉히 남아 있다 할지라도, 각자의 마지막 날이 언제 이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라 해도,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당장이라도 가야 합니다. 언제라도 부르심에 응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죄의 담을 신속히 헐어버리고 죄의 담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이처럼 주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주님을 맞을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습니다.

그러나 진정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을 때 소망이 되고 가슴이 벅찹니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눈물부터 나오고, 그리운 주님께 무슨 말씀부터 드릴까, 어떤 모습으로 안길까 하면서 마음이 설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은 칼에 목을 베이고 사자 밥이 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해도 영광인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내 믿음 지킬 때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당시 믿음의 선진들도 칼에 목 베이고 사자 밥이 되면서도 찬양할 수 있었고 기도할 수 있었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두려운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그립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은 순교하는 것도 아니고 살아서 주님을 맞게 된다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기쁨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을 얼마나 소망하는가에 따라 내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또 내가 얼마나 신부단장이 되었는지를 스스로 측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도 하나님이 은혜, 주님의 은혜가 입혀집니다.

6).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21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자들은 이미 주님을 믿는 자들과 앞으로 믿을 자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 자체가 은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셨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 날마다 인도받게 하십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심같이 구하는 것마다 응답하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성령의 불 담으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범사에 형통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 끝나면 그립던 주님의 품에 안기고 천국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이 은혜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을지라도 각자가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은혜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이것도 감사하고, 저것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말로는 은혜와 감사가 풍성한데 정작 그 마음은 변화가 더디기도 합니다. 감사할 줄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정말로 그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은혜를 통해 변화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열매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깊은 진리를 깨우쳤다. 하거나, 나의 근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는 "내가 이러한 사랑을 받았으니 내 생명 다해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고 눈물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길이 보입니다. 속히 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지켜보면 그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 있기도 하고 더 이상 은혜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고 쏟아 버리기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 밧줄을 필사적으로 잡는 것처럼, 그 은혜를 꼭 붙잡아야 합니다. 중심에 새겨서 영적인 열매를 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결단하고 마음을 지키고자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성결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며 더 많은 열매를 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성결의 능력뿐 아니라 실한 열매를 맺을 능력도 더하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에서 떠나고자 노력하던 성도들도 한 번 두 번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각종 예배에 다 나가던 사람이 이제는 간신히 주일과 금요철야만 나가고, 때로는 주일 대예배만 근근이 드립니다. 기도 시간도 한 번 두 번 빠지기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아예 쉬어 버리게 됩니다.

충만함이 없으니 구역이나 기관 모임도 빠지게 되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나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과 걸리고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에 속한 일들은 조금씩 줄이고, 반대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합니다. 충만할 때는 버린 것 같았던 것들을 다시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빠져들다가 중한 질병이 오거나 큰 시험 환란이 왔을 때, 이때라도 돌이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회개하여 돌이킬 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도 없습니다세상 방법을 구하기도 하고, 그러다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 부탁드립니다. 날마다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존하시기를 바랍니다.
  
자료제공 : 우림과 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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