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10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신다. 요즘 먹고 살 만하니까 교회생활을 액세서리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졌다. 과거처럼 코가 석자나 바지는 생활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는 생활이 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뜨거웠던 기도생활도, 간절했던 새벽기도도, 이제는 졸업한 지 오래된 것 같다.

신약성경 마 9:1~8, 2:1~12, 5:17~26에 나오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중풍병자를 비롯하여 그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할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절실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중풍병자 (네케) 자기 생각으로 똘똘 뭉쳐 머리 안이 굳어져 마비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들어와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리스도 예수의 사상이 내 안에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 죄를 깊이 뉘우침 또는 마비됨이란 의미로서 사람의 생각으로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의 피, 그리스도의 생명이 몸 안에 돌지 않아서 마비되어 절뚝거리는 상태, 자신의 생각의 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말고 있다.

다른 예로 문둥병자는 예수의 피로 갈아야 하는 상태, 말씀이 오염되어 변질된 상태, 열병환자는 자신의 감정과 혈기에 열이 넘쳐 나 있는 상태, 혈루병 환자 : 생명인 피를 내면세계에서 돌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여 레마를 내놓은 상태, 생명의 본질이 마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 병을 고친 사건은 육신적인 병을 고친 사람도 해당되지만 그 사건을 접하고 있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해당되는 병을 갖고 있음을 진단하시고 고침을 받기를 원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그 병을 치료함을 얻는 자가 바로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

신유는 고치는 사역만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치료받는 것도 신유의 은사를 받은 것임을 직시하고 성경을 대했으면 한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갔더니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할 때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가? (왕하 5:11~12) 자신이 살고 있던 고향에 강은 너무나 아름답고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목욕하기가 너무나 좋은 곳이다.

그런데 겨우 시냇물처럼 사람들이 폴짝 뛰어 건너뛸 수 있는 너무나 초라한 개천이라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목욕하기가 너무나 용이하지 않음을 분개한 것이다. 그러나 요단(야르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상태로 되어진 생명이 흐르는 강으로서 내가 낮아지고 낮아져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어 내 생각이 깨어지고 씻겨지는 강을 의미한다.

나아만 장군에게 일곱 번 목욕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단순히 목욕하는 차원이 아니라 짐승의 속성을 완전히 씻으라는 명령이다. 나아만 장군의 내면세계 속에 잠자고 있는 짐승의 속성을 말씀의 방망이로 완전히 깨어져 하얗게 어린 아기처럼 피부가 깨긋해 지는 장면은 마치 마술처럼 영화 드라마처럼 멋진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 피부로 바꾸어졌다는 뜻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변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내가 갖고 있는 짐승의 속성이 강물 속에 씻기고 씻겨서 깨끗하게 된 상태를 말하는데 예수를 처음 믿었다고 해서 완벽하게 완전한 구원을 이뤄진 것이 아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는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 3:7~8 요단 물로 들어가라는 말씀도 낮아지고 낮아지는 요단 강안에서 꼼짝 달싹하지 말고 확실하게 서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여자문제, 돈 문제, 기타 문제로 넘어지고 있는가? 이미 드러난 목회자들의 잘못도 문제이겠지만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희희낙락하지 말라.

이미 드러난 목회자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자숙하고 자성하고 있다면 진정한 참회 속에서 주의 뜻을 이행하고 있다면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쉬지 않고 계속 감행해야 할 것이다. 만약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면 과감하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뤄진 강, 요단 강물 속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바로 세례며 침례인 것이다. 베드로전서 3:21처럼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바로 요단 강물에 서 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목욕을 해야 되는 나아만 장군인 것이다. 말씀 속에 퐁당 잠겨 있어야 한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속에 들어가서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물에 잠겨야 한다.

3절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바이샤우후 베아르비아)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동침 안에서 새 생명으로 들어 올렸다는 의미를 말한다. (고전 12:25~27, 6:1~2) 중풍병자를 한 사람이 들고 올 수 없으며 두 사람도 안 된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되지 않으면 들고 올 수 없다.

4절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히타르)라는 말씀은 “뚫다, 깨트리다, 지붕이음을 제거하다”는 의미로서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굳어져 있는 중풍병자의 머리속의 생각 하나 하나를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왓장을 벗기듯 깨뜨려서 벗겨냈다는 뜻을 갖고 있다. ( 9:18~19) 그러면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중풍병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글을 쓴 본인을 비롯하여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일 것이다. 얼마나 수많은 잡념 속에 사로잡혀 고정관념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바로 중풍병자일 것이다. 내가 먼저 네 사람이든 네 천사이든 지금 예수님 앞으로 인도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지붕의 기왓장을 벗겨내는 것처럼 하나하나 벗겨져야 한다.

5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서 저희는 ‘복수’로 중풍병자가 아닌 환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다. 도저히 중풍병자의 믿음은 아주 미미하여 치료받을 수 있을 만큼 신앙의 뿌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네 사람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친구로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로 동침되어 있는 성도들이 필요한 시대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깨닫고 중풍병자의 고정된 관념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예수님 앞에다 내려놓는 믿음이 절실한 시대다. 이런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을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대목에서 기도하는 차원이 바로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람이 해야 되는 기도이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아무런 체험 없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중풍병자가 낫기 위해 데려간 네 사람의 신세를 진 것을 갚는 기도다.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온 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빚을 갚고자 하는 간절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바로 빛을 탕감 받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심보다는 네 사람(레바이)의 믿음을 아주 귀하게 여기신 것이다. 네 사람의 단어 어근(라바)은 “동침하다”라는 단어로 즉 짐승의 속성이 소멸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역사를 우리가 체험해야 한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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